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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월간 과신뷰

과신대 View Vol.7 (2017.12)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8.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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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과신대의 소식을 전하는

과신대 VIEW - 7호

- 과신대 칼럼 -

" 신학도가 바라본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난점과 희망 "

최현진
(하늘.진 성경 아카데미 대표 / 과신대 홍보 이사)

 

  지난달(2017년 10월 25일) 장신대에서 “장신신학, 한국교회에 말 걸다!”라는 제하에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장신대에서는 신학이 ‘시대적 문제들에 대해 시의적절한 답변을 찾아가는 과제’를 포함한다는 점을 인식하여 매년 현안과 쟁점과 필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듣고, 묻고,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해왔는데 이번 세미나 첫째 날 두 번째 영역의 주제가 바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였다. 세 명의 교수가 각각 ‘과학적 무신론의 도전 앞에 선 기독교 창조신앙’, ‘인간지능에 대한 이해’,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가져올 새로운 선교의 기회’라는 제목의 발표를 하였고 의미 있는 대화들이 오고갔다. 특히 장신대 김정형 교수(장신대 조직신학)가 담당했던 [소위 ‘과학적 무신론’의 도전 앞에 선 기독교 창조 신앙]이 필자에게 인상 깊었다.

  김정형 교수는 이 발제를 통해 ‘과학적 무신론’의 도전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창조신앙을 바르게 증언하기 위한 세 가지 과제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과학적 창조론(혹은 ‘창조과학’)’의 잘못된 접근 방법을 반성하고 극복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서학적 과제로서 과학시대를 위해 창세기를 새롭게 읽는 것이고, 세 번째는 조직신학의 분야인 바 과학시대를 위해 기독교 창조 신학 곧 교의학적 창조론을 새롭게 쓰는 것이다. 

  그는 과학혁명 이후 근대 과학이 전제한 세계관을 ‘자연주의적(naturalistic) 세계관’이라 언급하였고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metaphysical naturalism)’를 구분하여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정하는 유신론과 양립불가능한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주장인 후자를 무신론적 세계관을 내포하지 않으며 무신론과 유신론 모두에 중립적인 전자로부터 구분하여 신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연계하여 ‘과학적 무신론’의 도전을 넘어설 디딤돌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필자가 보기에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의 구분은 우종학 교수가 평소 강조한 바 ‘진화론’과 ‘진화주의’를 구분한 점과 크게 공명을 이룬다. ‘방법적 자연주의’는 ‘진화론’과 같은 맥락이고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는 ‘진화주의’와 같은 궤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즉, 그동안 우종학교수가 강조한 내용이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동일하게 지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정형 교수는 ‘과학적 무신론’의 도전 앞에서 ‘과학적 창조론(혹은 ‘창조과학’)’으로 응대하는 것은 가장 나쁜 전략이라는 견해도 피력했다. ‘과학적 창조론(혹은 ‘창조과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한계 안에서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근대 과학과 자연 세계의 궁극적 근원과 목적으로서 초월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를 추구하는 창조교리를 동일한 지평에 혼합하는 자기모순과 범주 혼동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과학시대에 창세기를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에 근대과학 이전의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반영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존 월튼의 견해를 소개하였다. 이어 ‘과학적 창조론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 외에 다른 무엇이 담겨 있다는 거부감을 따라 창조신앙의 진리와 성경에 내포된 고대근동의 세계관을 혼동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리라 주장하면, 결국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서학적 진리 주장마저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오히려 성경기자가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서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통합하는 방식을 신중하게 살펴 ‘신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통합시켜주는 바른 방법’을 배워야 함을 여러 신학자들의 글을 빌어 설득력 있게 진술하였다.
 
  필자는 김정형 교수의 발제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제목에서 밝힌 바 이 주장을 따라 조금 더 나아가면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행함에 있어 겪게 되는 신학 내부의 난점을 만나게 된다. 

  필자의 장신대 신학과 재학시절의 일화이다. 당시 신학교들은 각각의 신학적 입장에 심각한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술제와 체육대회 등 다양한 노력들을 전개했었는데, 모임이 이어질수록 소위 ‘보수’와 ‘진보’의 차이와 그 차이로 말미암아 발생한 ‘흉한 도랑’만을 절감하고 말았다. 당시 중도적 입장에서 양 극단의 신학적 견해를 조화시켜 보기 위해 필자를 포함한 모교 장신대의 신학생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도대체 장신대의 신학은 뭐냐? 너희들은 박쥐냐? 너희들조차 견해가 서로 다른 데 무슨 일치냐?’라는 정당한(?) 비아냥을 받아야 만했다.

  2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이야기지만, 신학도의 입장에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절박한 과제인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있어서 이 난점은 여전히 심각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우종학 교수의 견해와 장신대의 견해가 공명을 이룬다는 것은 우종학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신학적 학풍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의 반증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이 지점이 ‘과신대’에 몸담고 있는 여러 교단의 목회자와 신학도들이 심각하게 인식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바르고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대화하기 위해 여러 신학적 학풍의 다양성의 풍성함을 유지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찬미‘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한 신학도들의 유의미한 대화의 문법과 방법론 찾기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20여 년 전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난점‘에 당황하면서도 각기 다양한 관점과 방법들의 대화와 공명을 통해 창조와 구속의 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하게 찬양하고자 하는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을 인식했을 때의 떨림을 중년이 넘어 다시금 경험하는 것은 기쁨이며 부담인 것은 분명하다.


< 과신대 사람들 >


과신대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계신 분들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과신대 사람들>.
이번 호의 주인공은 현재 과신대 자문위원으로 계신
서울신학대학교 박영식 교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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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이하 과)]
안녕하세요, 교수님. 인터뷰에 앞서 간단한 본인 소개 및 전공 분야를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영식 교수(이하 박)]
안녕하세요. 저는 박영식이라고 합니다. 지금 서울신학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있습니다. 전공은 조직신학입니다.

[과]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과신대와 함께하게 되셨습니까?

[박] 제가 어떻게 과신대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예전에 우종학 교수님이 번역한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을 읽다가 번역이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별아저씨의 집’이라는 블로그를 통해 수정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때가 계기가 되어 우종학 교수님을 알게 되고 어쩌다 보니, 자문위원으로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과] ‘과학과 종교(신학)의 대화’라는 주제로 수업을 진행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수업 분위기가 어떠한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박] 일단 수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몰라서 그렇죠. 특히 고등학교 때 이과를 나온 학생들이 유심히 수업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업이 ‘어렵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런 분야의 학문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 교수님은 ‘과학과 신학 간의 대화’를 어떠한 입장에서 바라보십니까?

[박] 일단 저는 과학과 신학은 완전히 다른 분야의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학과 사회가 각각의 독립적인 학문인 것처럼, 과학과 신학 역시 개별적으로 보아야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질문이 제기될 때에는 경우가 달라집니다. 질문이 발생하면 두 학문은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사회학적인 변동에 수학적 패턴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고, 경제활동 내에서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있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저는 과학과 신학이 오른손과 왼손처럼 딱딱 맞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각 학문은 각자의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에는 각자가 대답하는 질문이 서로 상충되거나 대립되기보다는, 공명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은 서로 다른 악기죠? 서로 다른 악기임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충분히 합주할 수 있습니다. 그것과 같이 신학과 과학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작동하지만, 동일한 테마(Theme)를 두고 같이 합주하면 아름답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 앞으로 과학과 신학이라는 학문 내에서 연구하고자 하는 분야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박] ‘섭리’라는 기독교 개념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조명해야 하는 지에 대한 문제를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창조 이후에 인간의 진화에 대해 신이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초자연적인 섭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물질세계 내에서 창조주의 섭리를 과학과 함께 고찰해보는 연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지금까지는 ‘과학’을 신학자들이 어떻게 조명하고 해석해왔는지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면, 이제는 ‘신학’이라는 주제를 과학자들이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가령, 예수님의 부활체(體)를 현대 물리학에서, 생물학에서, 의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와 같은 문제를 다루어보는 것이죠.

옛날에는 이러한 주제를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벽을 통과하는 장면과 같은 경우는 이전 시대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Wi-fi를 보면 충분히 벽을 뚫고도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편재하기까지 합니다. 이곳에도 있고, 저곳에도 있고……. 근원적으로 부활, 재림은 과학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 마지막으로 과신대 VIEW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 제가 한 말씀을 드릴 입장이 아닌데요...(웃음) 앞으로도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시고, 힘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작성 | 이준봉, 과신대 기자단



이 글은 박영식 교수님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영식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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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람들>은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기대해주세요!!

 
 
<제 3회 과신대 포럼>

포스트휴먼과 기독교 신앙

발제 | 박일준 교수, 손화철 교수
패널 | 신익상 교수, 전진권 박사
 

  학술모임 단체 과신대에서 주최하는 제 3회 포럼이 <포스트휴먼과 기독교 신앙>이라는 주제로 서울대학교 멀티미디어 강의실에서 열렸다. 필자는 "컴퓨터와 기계의 도움으로 인간의 몸이 연장(extension)되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간에 대한 정의는 바뀌는 걸까?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영생할 수 있을까? 과학 기술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좋은 면만 있을까? 인공지능이 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아닐까? 죽음은 있을까?" 등 많은 물음을 안고 강의실을 찾았다. 첫눈이 내리는 제법 추운 날이었는데도 강연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궁금증과 기대로 종종거렸고 현장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긴장감과 호응이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김남호 교수(울산대 심리철학)가 사회를 맡았고  박일준 교수(감신대 종교철학)가 ‘제 2기계 시대의 사이보그: 테크노 영지주의 혹은 체현된 주체?’, 손화철 교수(한동대 기술철학)가 ‘포스트휴먼 시대의 기독교와 기술’을 주제로 각각 발표하였다. 

  박일준 교수는 인간의 본질을 정신(mind)으로 규정하고 그의 연장인 ‘몸(body)’을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인공기계의 수준으로 확대 연장하려는 시도가 데카르트의 정신/연장의 이분법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는 우려의 측면과, 인간과 기계의 공생을 위한 철학적 담론이 필요한 시대에 인간을 사이보그로 규정한 것은 인간 중심주의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만물의 영장으로 살아왔던 인간이 이제 다른 모든 존재들과 더불어 동등하게 연대할 수 있는 사유의 틀을 모색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측면을 설파하였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몸’에 대한 담론들 속에서 기독교의 ‘성육신’ 개념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했다. 

  또한, 박일준 교수는 “사이보그는 인간의 욕망을 위해 창조된 존재 그래서 인간을 위해 종속된 존재를 의미한다.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비인간으로 취급당해왔던 여성들의 모습이 사이보그의 상황과 같기 때문에 여성을 사이보그라고 표현했다. 신처럼 불멸과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탄생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수많은 인간들은 그들의 몸이 기계처럼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역설적인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생물학적 몸의 연장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은 처음부터 사이보그였다. 권력과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다수의 인간들은 기계로 취급을 받기에, 인간은 기계와 존재론적으로 구별된 존재가 아니다. 사이보그와 동물과 여성은 억압된 몸의 경험을 공유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동료-고난자’이다.” 라고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신학의 본래성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 전능한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전능한 신은 무기력하고 무능한 인간 자체가 되어서 십자가에서 모진 모멸을 받으며 죽었다. 그 죽음을 통해 신의 아들 예수는 구원을 이루었다.

  박일준 교수는 기독교가 기술 발전이 낳을 소외 계층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과 기계, 자연과 인공의 대립적 구조가 아니라, 포스트휴먼 시대에 기술을 소유·향유하지 못하고 뒤처지며 생겨날 고통받는 사람들과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동료-고난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들뢰즈는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실천은 ‘사이보그-되기’, ‘동물-되기’, ‘여성-되기’라고 말했다. 인간-기계, 자연-인간, 유기체-무기체, 인간-동물, 남-녀의 대립적 이분구조를 넘어 다른 존재들을 위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존재들을 위한 연대와 공생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는 주장으로 발제를 마쳤고, 이에 대해 신익상 교수님(성공회대)는 “성육신을 공생과 관련시키기 위해서는 성육신의 희생적 측면이 강조되며 공생을 위해서는 자발적 희생이 먼저 요구되는데 가지지 못한 자, 낮은 곳에 있는 자에게 가진 자, 높이 있는 자의 자발적 희생 없이 공생을 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진권 (고등과학원)박사는 기술 발전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기술로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적인 구원의 의미를 흔드는 것으로 인간 향상 기술의 성격에 관한 논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구체적인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하자고 했다. 인공적으로 DNA를 만들어 인공 생명체를 만드는 기술이 성공한 상황에서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는 의도가 들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성에 대한 도전은 과장된 표현일 뿐이며, 기술 발전은 진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확장이라는 견해가 있음을 지적했다. 

   손화철 교수는 기술 철학자로서 포스트휴먼 이론이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는 부분, 즉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기술의 진보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그에 대한 통제는 불가능하므로 기술의 진보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전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삶의 여건과 가능성,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겨날 수 있지만 인간이 기술 개발과 진보의 주체라면 미래의 기술은 예측이 아니라 기획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스트휴먼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이할 대비를 할 것이 아니라 어떤 미래, 어떤 시대를 추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오늘 현재 삶의 맥락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손화철 교수는 포스트휴머니즘을 ‘포스트휴먼-이즘(Posthuman-ism)’과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으로 구분하여 차이를 말씀했다. 포스트휴먼-이즘은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술 발달로 인한 ‘새로운 인간(Posthuman)’의 모습으로  뇌에 칩을 심는다든지, 인공수정 과정에서 인류의 지능을 더 좋게 만든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인간이 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더 좋아질 수 있고, 인공장기를 계속 교체하면서 질병과 죽음에서 자유로워져 모두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꿈을 심어 준다. ‘포스트-휴머니즘’ 은 새로운 휴머니즘을 말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기에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라고도 한다. 기술의 발달이 새로운 인간을 만들 것이라는 예측을 넘어, 기술의 발달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하게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기술의 발전을 변할 수 없는 상수로 마치 날씨의 변화와 같다고 말하는 손 교수는 우리가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부분은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온다면 그 과정에 필연적인 기술발전의 과정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기술과 기술 발전에 대한 물음을 좀 더 이어나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바람직한 모습이 무엇인지를 제시는 것이라며 ‘목적이 이끄는 기술발전’을 말했다. 강한 인공지능이 등장했을 때 생겨날 여러 가지 일들을 예측하고 분석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당장 대안을 마련하거나 조치를 취할 수가 없으므로 그보다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인공 지능의 개발의 방향에 대한 고민, 다시 말해 그것을 왜 개발해야 하는지에 대한 접근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술의 발전을 하나님의 창조의 연장선상에 두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식의 접근이 아니라 개발되는 기술들에 ‘왜?’ 라고 묻고 답해야 한다. 왜 그 기술이 필요한지, 그 기술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좋아지는지, 하나님 나라와 부합되는지 물어야 하고 확실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어도 자신과 타인 안에 소통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한 신익상 교수의 의견은 기술 개발의 현장에서 “왜?”를 묻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정의 ,평화, 하나님 나라, 창조, 타락, 하나님의 통치 등의 의미를 먼저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진권 박사는 ‘목적이 이끄는 기술 발전’에 대해서 기술 발전 또한 하나님이 창조로 여기면서 그 창조가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한 방식으로 쓰이는 지에 관심을 기울이자는 것인데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는 의견이었다. 

  흥미진진한 발제에 이어 과신대 대표 우종학 (서울대)교수의 사회로 토론이 이어졌다. 발표를 맡은 박일준 교수, 손화철 교수, 신익상 교수, 전진권 박사가 패널로 참여했다. 패널에게 우리의 궁금증을 직접 묻는 질문도 있었고 시간이 부족해 O, X로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질문도 여러 개 있었다. 현장에서 강연을 듣는 묘미가 바로 이 시간이 아닐까 싶을 만큼 재미있고 또 진지했다. '인공지능은 ‘신’의 위치에도 오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신익상 교수는 인공지능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대답하면서 “신이 신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신은 불평등한 신으로 누구에게는 신이지만 누구에게는 재앙일 것” 이라고 부연하였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인공지능에게 법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전진권 박사는 자동차가 마차를 대신해 등장했을 때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음을 예로 들며, 세계적으로는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 그 인공지능을 사용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를 논의하는 추세라고 하셨다. 손화철 교수는 “알파고는 이세돌도 예측 불가능한 수를 둔다. 더 큰 문제는 알고리즘은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곳에 수를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알파고의 생각을 알 수 없다.”며 인공지능이 도덕적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글로 옮기기에는 조금 어려운, 현장에 있어야만 들을 수 있었던 박일준 교수의 어록 2가지와 ‘되기’, ‘목적이 이끄는 기술발전’ 을 되새겨 보며 인간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동료-고난자가 되었음을 기억하고 소외되고 낮은 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하고, 기술의 발전을 당연시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필요성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불러본다. 하나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인가요? 
작성 | 백우인, 과신대 기자단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서울남부 북클럽 
 
| 김진희 (서울 남부 북클럽 회원) 

안녕하세요? 저는 과신대 서울남부 북클럽의 회원입니다. 무크따, 창조론자들, 최초의 7일, 오리진과 같은 책에 관심을 가지고 북클럽에 참여해오다가, 창조기사논쟁 북클럽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창조기사논쟁 북클럽이 처음 열렸을 때 저는 첫 번째 발제자로 <리처드 E. 에이버벡>을 발제하게 되었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전통적인 성서해석을 선호하면서, 창조과학처럼 극단적 문자주의는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에이버벡의 발제문을 준비하며, 문자적 해석과 고대근동문헌과 비교한 문학적 해석을 조화시키려는 면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어지는 다음 북클럽에 두 차례 참석하며 토드 비일, 트램퍼 롱맨의 관점도 보게 되었는데, 트램퍼 롱맨은 에이버벡과 토드비일에 비해 문자적 해석의 한계를 더 많이 보여주고, 대안적 해석을 보여줌으로써 신앙적으로 더 자유롭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의 “날들”을 에이버벡이나 토드비일과는 달리 문자적으로 24시간으로 해석하지 않고, 첫 3일은 “영역이나 거주지 창조”, 뒷 3일을 “창조될 거주자들이 채울 장소”로 해석함으로써, 문자적 24시간 해석에 매이지 않고, 문학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해 냄으로써 성경 해석에 있어서, 신앙적으로 생각의 폭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는 모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발제에 이어서는, 롱맨의 창조기사 해석에 대해서, 에이버벡, 토드비일 등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점과 동의하지 않는 점을 다룬 논평을 봄으로써 타 신학자의 관점에서 롱맨의 해석과 일치하는 부분과 한계점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에이버벡은 롱맨의 주장이 너무 오늘날의 과학에 의존한다는 점과 아담 창조 이야기를 비유로 해석하는 것의 한계점을 지적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 같은 경우 아담 창조 이야기를 비유로 해석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만, 한편으론 이 해석이 가져올 한계점을 생각하면서 아담 창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더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북클럽에서는 발제 뒤에 토의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그 시간을 통해서 독서모임에 함께하는 많은 동료들한테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독서 모임 안에서 고단수(?)이신 분들에게 흥미로운 답변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신앙적 선배들이나 신대원 출신 목사님들도 많이 계셔서 무신론자들의 도전에 응답하여 신앙에 도움 되는 말을 많이 듣고, 격려 받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혹시 본인의 신앙이 무신론자나 이성의 도전에 직면하시거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폭넓게 알고 싶으시면 과신대 독서모임에 참여하시는 것도 훌륭한 선택일거라 생각합니다.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부천 북클럽 



| 이준봉 (과신대 기자단, 부천 북클럽 회원) 

어느덧 종강을 앞두는 시기가 찾아왔다. 올해 여름방학부터 시작한 과신대 부천 북클럽 스터디 모임도 우여곡절 끝에 계속 진행되고 있다. 수업, 학생회, 아르바이트, 동아리, 각종 행사에 몸담고 있는 회원들의 일정은 맘 놓고 모이도록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라고, 어떤 학생은 정규수업시간을 일부분 빼면서까지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아직 배움과 토론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필자가 과학과 신학 관련 스터디 모임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은 적지 않은 학생들이 ‘과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공계열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학우들이 스터디에 관심을 표현하고 모임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아직 부천 북클럽은 공식적인 시간을 정하지 못해서, 관심을 표하는 학우들이 함께 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학기를 마치고 다음 학기부터는 고정적으로 시간을 정해, 스터디 모임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홍보 및 참여를 권유하는 등 스터디 모임을 알리기를 힘쓰고자 한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과학과 신학 사이의 오해를 가지고 있는 학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학생들에게 두 학문 간의 올바른 이해를 도와주는 장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오직 학생으로만 구성된 부천 북클럽 모임에 ‘지원’을 희망하는 분도 여럿 나타났다. 격려차 방문하시고 싶어 하시는 분, 강의 혹은 세미나를 진행해주시겠다는 분, 북클럽 모임을 지도해줄 수 있으시다는 분 등 도와주기를 원하는 분들이 생긴 것이다. 북클럽의 진행자인 필자에게 그러한 분들의 호의는 크나큰 힘이 되어주었다. 

한때, 과학에 문외한이었던 본인이 과연 이러한 모임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그 때마다 과신대 사역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부천 북클럽 회원들, 지원해주시겠다고 하신 교수님과 목사님들, 또 서울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과신대 멤버들이 있었기에 아직까지 본인이 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과신대와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도 과신대 활동을 통해 유익하고 설레는 시간이 가득하기를 소망하여 본다.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전주 북클럽 

| 김재상 (과신대 기획이사, 전주 북클럽 회원) 

성큼 다가온 겨울을 느끼며 지난 21일 저녁 마로덕선교사기념관에서 전주지역 북스터디 모임을 가졌습니다. 5명으로 시작한 전주 스터디였습니다. 새로 세 분이 이번 모임부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희년운동에 참여하시는 목사님과 한일장신대학교 학생 두 분이 함께 했습니다. 이제 8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세 분의 뉴커머와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오리진』(IVP)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1장과 2장이 스터디 범위였으나, 주로 1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장에 대해서는 기적에 대한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1장에서 저자들은 ‘잘못된 질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학을 토대로 성경 읽기 방법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성경을 토대로 과학을 연구할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무엇을 택하든지 과학적으로든 신학적으로든 그리고 사회적으로든 설득력이 없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성경해석에 대한 과학의 영향에 대해 여러 경험사례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과학지식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이는 승리주의 오류를 낳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자연에 대한 묘사나 우주관 등은 고대 과학지식을 배경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몸의 비유를 해석할 때, 바울이 사용한 의학 용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하면서 성경해석 시 과학지식 활용에 대해 나름의 생각들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의학이 보는 머리와 바울 당시 의학이 보는 머리의 차이를 유념하여 해석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지식의 고고학 또는 계보학 차원에서 과학지식 활용은 단지 성서해석뿐 아니라 교회사 측면에서의 활용도 가능하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와 속사도 시대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치료자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었는데, 이러한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의학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의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로 질병 치유라는 점에 무게를 두겠지만, 당시 의학은 다양한 맥락을 살핀다면 ‘치료자 예수’가 지닌 여러 역사적 의의를 추론할 수 있으리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해석에서 당시 과학지식으로 사회적 배경을 파악해갈 때 주의할 점은 고대 서양과학 시각으로 동양 사고를 해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지식은 서양 중심의 사고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과학지식으로 성경 속 배경을 재구성할 때 과학이 지니고 있는 서양 사고방식이 의연 중 나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성경해석 시 중동의학이나 동의보감 같은 동양과학과 동양사고 방식 역시 유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합니다. 중동의 눈, 동양의 눈으로 읽는 성경해석이지요. 이러한 점은 성경해석에 대한 과학 영향이 지닌 한계일 것입니다. 

이러한 한계는 방법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성경해석에 대한 과학의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과학방법론이 해석자 관점에 미칠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철학적 자연주의와 방법론적 자연주의라는 과학방법론 입장에서 성경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비교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서와 자연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라면, 성서를 조명하는 성령 하나님은 자연 역시 조명하시지 않으실까? 창조의 영인 성령이 자연에 대한 인식을 여셨던 경험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세계에 대한 창조 인식과 자연에 대한 과학 인식의 차이는 유념할 필요가 있겠지요. 

바쁜 12월에도 전주지역은 모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12월 26일에도 『오리진』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계속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한일장신대학교에서 과신대 활동을 알리며 참여할 학생들을 모으려고 합니다. 기도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짧게 보는 과신대 ISSUE 


01 과신대 회원의 밤 (2017)

일시 : 2017년 12월 16일 토요일 저녁 6시
장소 : 새물결아카데미 북카페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로 11, 모자빌딩 5층)

과신대 회원들을 모시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를 가지고자 합니다.
맛있는 식사와 다양한 공연 그리고 과신대 1년 사역을 결산하는 시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과신대 회원이라면 누구나 오셔서 즐길 수 있으니 회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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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과신대 북클럽 지원

과신대에서 각 지역의 북클럽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도서 혹은 소정의 간식비가 지원될 예정이므로
회원 여러분께서는 북클럽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문의 : 행정간사 이진호, scitheo.office@gmail.com)


현재 서울남부, 전주, 부천, 제주 4개의 북클럽이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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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 과신대랑 소통하기

유선 연락 (070-8093-8003) 및 행정간사 번호를 통한 문의는
평일 오후 1:00 - 6:00 에만 답변을 드립니다.
(단, 과신대 강좌가 있는 날은 당일 오전부터 문의 가능합니다.)

Facebook : facebook.com/scitheo
Kakao Talk : scitheo
E-mail : scitheo.office@gmail.com


 

- 과신대 회원 등록 및 후원 안내 -

 

<과학과 신학의 대화>의 사역은 회원 여러분의 후원으로 이루어집니다.
 

<과.신.대 회원 등록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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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비전>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일반계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 잡힌 대화를 목표로 2가지 비전을 갖습니다.        

1.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의 결과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내용을
함께 읽어가며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연구합니다.
이를 위해 과학 및 일반학문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2.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바르게 배우도록 한국교회에 균형 있는
교육을 제공하며 이를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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