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과신대 청소년 캠프


"신과 함께"

(앙과 학이 함께)


현직 과학 교사들이 오랜시간 기획하고 

공을 들여 준비한

제1회 과신대 청소년 캠프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_ 2019년 2월 9일 9:30-18:00

장소_ NPOpia (종로구 낙원상가 5층 500호)

대상_ 과신대 정회원 청소년 자녀 및 학부모

* 과신대 사역에 동의하는 모든 학부모, 자녀 20명 추가 모집


등록비학생: 2만원 (형제 등록시 1만원 할인)

학부모: 1만원

등록계좌_ 카카오뱅크 3333-08-9187954 (최경환)



#신과함께_프로그램_안내


09:30-09:45 등록 및 접수
09:45-10:00 개회예배 (말씀: 이택환 목사)

10:00-11:50 1교시 “갈릴레오, 다시 법정에 서다”

(학부모 특강: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2:00-13:00 점심식사

13:00-13:30 부모님과 함께 하는 과학 골든벨

13:30~15:20 2교시 “잃어버린 화석을 찾아서”

(학부모 특강: 자녀와 대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15:20~16:30 과학 공동체 게임

16:30~18:00 3교시 “인류의 뿌리를 탐구해볼까?”

18:00~18:15 시상식 및 단체 사진 촬영


강사 소개


정승화(수정비전학교 과학 교사)

김예지(인천공항초 교사)

구형규(하늘초 교사)

서광(밀알두레학교 과학 교사)

백우인(푸른소망교회 목사, Science Communicator)

차수진(성균관대학교 삼성융합의과학원 Research Fellow)

윤세진(구일고 생명과학 교사)


학부모 특강 강사


박영식(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이지은(TMD 인재양성연구소 교육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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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책] 그동안 페이스북을 통해 다양한 서평을 써온 김영웅 박사님의 글을 연재합니다. 과학자가 읽은 신학책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지만 겸손한 내러티브들의 향연

세계관 수업 | 양희송 | 복있는사람 | 2018


김영웅[각주:1]



자신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오면서 심각한 모순이나 갈등에 부딪혔던 경험이 있다는 증거다. 세계관은 의식세계 이면에 존재하기에, 무엇이든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차원적인 세상에선 그 존재를 자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우린 숙명처럼 낯설고 불편한 세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동안 별문제 없었던 ‘나’만의 작은 세상에서 드디어 ‘너’와 ‘우리’, '그들'로 이루어진 큰 세상을 만나게 되고, 그 안에 존재하는 위계질서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뉜 채, 섞이지 않는 혼합물처럼 어쨌거나 다수와 함께 살아간다. 수평적일 뿐 아니라 수직적이기도 한 이 '다양성'이라는 무시 못 할 변수를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 우린 비로소 ‘세계관’이란 실체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이러한 불가피한 충돌은 때론 한 사람의 인생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지금까지의 모든 기준이 무너져 내리는,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기가 되고, 또 누군가에겐 아주 오래된 숙제가 마침내 풀리는 해방과 자유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자아인식'이 '나'가 아닌 타자를 만날 때에야 비로소 진행되는 것처럼, 세계관의 자각은 두 세계관의 충돌로 말미암아 시작되며, 그 충돌은 누군가에겐 두 번째 인생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의 사활은 새로운 세계를 과감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더불어 옛 세계를 기꺼이 파괴할 수 있는 용기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듯,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하며, 저자도 간파했듯, 낯선 세계와의 조우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머리가 아닌 가슴, 즉 지식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길을 알려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은행의 위치를 기준으로 알려줄 수도 있고, 커피숍이나 편의점, 관공서, 아니면 특별히 크거나 화려하여 주변 건물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잘 띄는 건물 위주로 길을 알려줄 수도 있다. 똑같은 길이라도 알려주는 사람 머릿속에 존재하는 지도 위에 어떤 건물이 표기되어 있는지에 따라 길은 다르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지금 눈을 감고 어떤 길 위에 놓인 건물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 주위의 건물도 함께 떠 올려보자. 모든 건물이 아닌 어떤 특정한 건물 몇 개만이 주로 기억이 날 것이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었음에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을 발견할 때를 우린 종종 경험하지 않는가). 이러한 차이는 곧 세계관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동일한 세상을 바라보아도, 우린 모두 다른 눈으로 그것들을 인식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세계관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세상과 '나', '나'와 '너'의 관계가 형성되며, 나아가 '나'의 정체성 또한 확립되기 때문이다.


우린 누구나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지금 21세기는 근대라는 시기를 지나 메타내러티브(거대담론)가 해체되고 작은 내러티브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와 다양성을 이루고 있는 포스트모던(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 시대다. 나는 세계관의 의미가 적어도 기독교인에게는 남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그저 많은 신 중 하나를 택하여 섬기며 나름대로의 구원을 찾는 여러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저 인간의 생활수칙이나 윤리규범 정도에 그친다면, 기독교의 유일성은, 이미 유럽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천천히 확산되고 있듯, 결국엔 퇴색되고 말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의미는 그것보단 더 크고 더 깊은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보는데, 난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때마침 '세속성자'의 저자이자 '청어람'의 대표, 양희송의 신간, '세계관 수업'을 만났다. 이 책에는 약 20년간 쌓여온,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저자의 연구가 차곡히 담겨있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세계관이라는 주제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기본적인 개념에서부터 국내외 최근 연구결과까지 반영하여 정리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 한 권을 통하여 우린 저자의 인생이 담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깊은 우물에서 길어낸 통찰의 물을 마실 수 있다. 특히 나처럼 성공지향적인 가치관 (혹은 세계관)으로부터 하나님나라 중심의 가치관으로의 변화를 경험하며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위로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관의 개념과 이론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1부 '세계관', 세계관이라는 각도에서 성경 본문의 내러티브를 해석해보는 2부 '성경', 세상살이에 상응하는 기독교 신앙의 재조정과 방향을 제안하는 3부 '현대'로 구성된 이 책은 순서에서부터 저자의 의도(혹은 바람)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단지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개론서나 성경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안하는 방법서에 그치지 않는다. 대신, 현재 우리가 맞이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이 어떤 방식으로 인식되고 전개되어야 하는지, 실제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저자의 살아있는 호흡과 정성이 묻어있는 책이다. 어떤 철학적인 개념이나 방법을 넘어, 기독교 세계관은 실제 살아있어 기독교인과 함께 숨 쉬며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는 기독교인의 눈이 되어주는 것이다.


1부에서 저자는 세계관의 개념과 이론을 간단하게 설명한 뒤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다양한 세계관을 낳는 "삶의 다양성을 대면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원초적인 태도는 겸손함"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은 이런 의미에서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자기 확신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겸손과 경청의 자세로 드러나는 관점이라고 덧붙인다. 이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자세를 가르쳐주는 듯하다. 기독교의 '원죄' 개념을 '자기애' 또는 '교만'으로 해석하고 그에 따른 '겸손'이 기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은 결코 진리를 수호하고 퍼드린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교만'이 아닌,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겸손'의 관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의 최전선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맞닥 뜨린 삶의 현장, 일상이라고 난 생각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은 '작지만 겸손한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내러티브적 접근' 방법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논한다. 이야기 형태로 세계관이 유지, 공유, 확산된다고 보는 '내러티브적 접근'은 네 가지 간단한 질문 -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야기를 통해 해나감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 예로 이 책의 2부는, 구약에선 창세기 1장 창조 이야기, 신약에선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이야기를 톰 라이트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읽고 해석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신화냐 아니냐를 떠나 창세기가 쓰였던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 팽배했던 세계관과의 충돌로 (특히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 해석할 수 있으며, 역사적 예수의 행적 또한 유대-팔레스타인의 지배적 세계관과의 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우리의 삶 또한 내러티브의 장 위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우리 자신이 속한 이야기를 제대로 갖지 못한다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경고한다. 또한 우린 삶의 내러티브를 어디서 구할지 묻는 것이 가장 절실한 시대적 질문이며, 이런 점에서 교회의 비극은 성경 내러티브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죽은 말씀으로 여겨지고 있을 때라고 말한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기독교가 개독교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교회가 성경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수용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성경 읽기와 가르침으로써 기독교인을 대량생산하듯 양산해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저자는 '성육신적 성경 읽기'를 제안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를 통하여 육신이 되었듯, 우리가 자신의 몸에 성경의 이야기를 새겨 넣고, 그것을 현장에서 살아내고자 고투하는 가운데 자기 몸에 체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간파한 대로, 성경의 말씀이 살아서 성도들의 삶에 실제로 적용되는 것을 보기 전까지 결코 사람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 삶의 내러티브를 일차적으로 성경에서 구하고, 각자의 독창성과 고유성을 간직한 채 각자의 내러티브의 창의적 재현과 변형과 복귀로 표현되는 삶을 지향할 때 기독교 세계관은 비로소 그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기독교 세계관은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합 가능할까? 3부에서는 이러한 부분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비를 통하여 장단점을 살펴보며 기독교 세계관의 위치와 방향을 논한다. 저자는 개성이 강조되는 작은 내러티브들이 들려지는 이 시대에 필요한 기독교 세계관 논의는 새로운 문법과 언어로 예수의 이야기를 써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옛 관점과 해석에 갇히지 말고 성경을 다시 읽고 예수를 다시 이해하려고 할 때,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면모가 부각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신론과 유신론 같은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그 관점이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결과물처럼 그저 가장 강력한 거대담론으로 자리매김하여 사람들에게 강제성을 부여하는 역할만을 한다면, 기독교 세계관의 본질은 오히려 흐려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독교인들이 일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며 만들어내는, 작지만 겸손한 내러티브들이 이곳저곳에서 꽃 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필요한 기독교 세계관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교회에서도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면서 단지 착하게 살라 거나 서로 사랑하라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표층적인 메시지 ('메시지'라 쓰고 '메아리'라고 읽는다)에 머물지 않고, 한 사람의 세계관을 재건할 수 있는 심층적인 메시지에 초점이 맞춰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전환 이야말로 어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born again (거듭남)’이 아닐까.



  1.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미국 City of Hope에서 Staff Scientist로 일하고, 과신대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 앞으로 매월 우종학 교수님께서 과학과 신학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골라서 [과신Q]라는 제목으로 연재해 주십니다. 교회에서 혹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과신Q]를 주목해 주세요. 시원하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창조기사처럼 부활도 비유로 읽어야 하나요?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창세기 1장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 중에는 창조기사를 과학 교과서처럼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창세기의 1차 독자였던 고대 근동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상식과 세계관에 맞게 기술된 것으로 읽으라는 칼빈의 견해가 건강합니다. 가령, 궁창 위에 물을 두었다는 표현은 하늘 위에 물층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당대의 상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성경은 대기권 어딘가에 물층이 있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건 바람직한 성경읽기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도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비유로 읽어야 되지 않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창조와 부활이라는 두 사건을 기술한 각각의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먼저 기억할 점은 창조기사의 다양한 표현들을 고대 근동의 상식이 반영된 것으로 읽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만물을 하나하나 창조했다는 가르침이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창조기사는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수준에 맞게 쓰였으니 그에 맞게 읽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창조기사와 부활에 대한 기록의 차이점을 살펴보며 이 질문에 답해볼까 합니다.


첫째, 목격자의 유무입니다. 부활 사건은, 여성들과 12제자를 비롯한 목격자들이 있고 그들의 경험이 복음서에 담겨있습니다. 반면 창조 사건은 목격자가 없습니다. 신이 창조하는 과정을 지켜본 누군가가 창세기 1장을 기록한 건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영감을 통해 창세기의 저자가 기록했겠지만, 그 기록과 복음서가 같은 방식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둘째, 주인공의 차이점입니다. 창조 사건의 주체는 초월적 하나님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창조주와 시공간 안에 창조되는 창조물은 분명 대비됩니다. 창조의 과정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시공간과 만물을 창조하는 신의 행위는 말 그대로 인간의 인지 범위를 넘어서는 초월적 사건입니다.

반면, 부활 사건의 주체는 동일한 하나님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입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그분은 인간의 경험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부활 사건은 창조 사건처럼 초월적이지만 그러나 분명히 인간이 보고 듣고 목격할 수 있는 경험적 시공간에서 발생했습니다.


셋째, 궁창과 같은 예로 대표되는 창조기사의 구체적 진술들은 고대 근동의 상식에 따라 기술되었지만, 부활사건은 신약시대의 상식에 어긋나게 기술되었다는 점입니다. 고대 근동인들은 신들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개념에 익숙했고 편평한 땅, 궁창, 그 위의 물층과 같은 세계의 구조에 대한 상식도 갖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을 읽는다면 그들은 흔히 알던 고대 근동의 신화들과 비슷하게 창세기는 여호와라는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전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당대의 상식을 넘어섭니다. 21세기의 우리처럼 신약시대의 그들에게도 죽은 사람의 부활은 상식에 위배됩니다. 부활 사건을 읽는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을 기록한 것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었기에 제사장들은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 갔다고 헛소문을 퍼트리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오늘날 우리가 배운 지구나 우주의 모습과는 다르게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차용해서 창조기사를 기술하고 있지만, 복음서는 신약시대 사람들이 부활을 상식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반영해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기사를 읽은 고대 근동인들은 뭔가 이상한 점도 발견했을 겁니다. 노예로 삼으려고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게 상식이었을 텐데, 창세기는 오히려 인간을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신과 같은 존재로 기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여호와라는 신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을 겁니다.


부활 사건의 기록에도 당대의 상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알려준 자가 천사였듯이, 예수의 무덤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맞이한 것도 천사로 기술됩니다. 천사에 대한 당대의 상식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은 당대의 상식에 어긋났지만 목격자들의 구체적인 진술은 그들의 상식과 세계관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서마다 세부적 차이가 나는 이유도 사건의 각기 다른 면들을 경험한 목격자들이 각자의 인지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식과 세계관을 반영한 언어로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메시지와 그 메시지가 담기는 그릇을 나누어 비교하면 좋습니다. 창조기사의 핵심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낸 그분이 누군지 묻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창조기사에 담겨있습니다. 그분은 자신들의 조상의 신일뿐만 아니라 바벨론이나 이집트의 신들과 다른 유일신이며 만물의 창조주였던 것입니다. 창조기사의 역사성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성은 고대 근동의 상식이라는 그릇에 담깁니다. 인간의 노동 주간에 비유하여 완전수인 7일의 구조로 창조의 주간이 유비됩니다. 고대 근동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땅과 궁창과 같은 세계의 구조가 하나하나 설명됩니다. 이런 구체적 내용은 역사성을 담기 위한 그릇에 해당됩니다. 궁창 위의 물층과 같은 표현에 역사성을 기대어서는 안됩니다.


반면, 부활사건의 핵심은 예수가 신이었다는 선언입니다. 그 선언은 부활을 통해 절정에 이릅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부활 사건의 역사성은 부활 자체에 있습니다. 당대의 상식과 달리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가 자신이 신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구체적 사건이었습니다.



창조기사에 관해서는 배꼽 탄생 비유가 도움이 됩니다. 친엄마가 맞는지 묻는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엄마는 내가 너를 배꼽에서 낳았다고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엄마가 이 아이를 낳았다는 역사성은 배꼽 탄생을 사실이 아니라 비유로 여긴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엄마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며 배꼽 탄생을 계속 주장하거나 반대로 배꼽에서 아이가 탄생할 수 없으니 엄마의 진술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일뿐입니다.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을지는 이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입니다. 어떻게 부활했는지, 누가 돌을 옮겼는지, 천사가 증언을 했는지, 부활한 몸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생화학적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한 기술과 표현들은 이 메시지를 담기 위한 그릇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기사의 역사성과 신학적 메시지는 인정하되, 고대 근동의 상식이 담긴 구체적인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 사건의 경우도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신학적 메시지는 받아들이되 목격자들의 기록의 세부적 차이점은 그들의 이해와 인지와 당대의 상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