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은 과학적 합리성을 부정할까?”

성경, 바위, 시간 | 데이비스 영, 랠프 스티얼리 | IVP | 2018


박종범



이번 서평을 준비하며 올해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직면한 학문적 결핍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난 4년간의 신학대학교 재학 중, 나는 성서의 창조를 믿으면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라는 수업을 통해 알게 된 브라이언 그린을 통해 쿼크나 힉스, 초끈 이론이나 M 이론 등의 양자역학의 영역에 조그마한 관심을 가져왔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학문적 관심은 아니었다. 합리적인 신학도이자 신앙인으로 보이기 위해서 양자역학자들의 이론을 우주론에 대입해보기도 하고, 알리스터 맥그래스 같은 저명한 신학자의 저서를 쌓아두고 읽으며 그들의 신학적 작업이 나와 동일하다는 것처럼 포장하기도 했다.


서평의 첫 단락부터 자기반성을 하는 이유는, 나의 신학적 무지함으로 인해 젊은 지구 창조론은 성서를 절대 무오로 믿는 이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라는 그동안의 오만함을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나는 창조에 관해 이렇게 생각해왔다. “창조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믿으며, 창조에 대한 탐구는 합리적으로 열려있다.” 이 말은 스스로에게 창조 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안정감을 갖게 했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던 젊은 지구 창조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합리적 신학도의 이미지를 굳히기 위한 것이었고, 나의 성서 이해는 현대의 과학적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일말의 우월의식이었다. 이 자리를 통해 성서를 하나님의 무류한 말씀이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사과를 드리고 싶다.


특별히 나는 이번 신간 속 보수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두 저자, ‘데이비스 영랠프 스티얼리박사가 진실한 신앙 위에서 창조를 위한 지구 연대 논쟁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이후 논의될 내용을 제하더라도, “보수적인 신앙이 곧 창조과학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이지만 신학적 편견에 의해 쉽게 무시되던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을 통해 변화된 스스로의 소감은 이 정도로 하고, 지금부터는 <성경 바위 시간> 속 살펴볼 만한 포인트들을 각 장마다 간략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1부는 역사적 관점을 통해 보는 지구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 위해 각 시기별로 지질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논쟁이 함께 담겨있다. 특별히 현대 지질학이 출현한 이후 지질학과 성서(성경) 사이의 간극은 더욱 분명해져갔다. 이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두 세기 전부터 영미-유럽권 교회들에서 논의되던 내용이었음을 확인하면서 배우는 점이 크다. 오늘 우리가 치열하게 젊은 지구 창조론의 망령과 논증하는 것이 이전부터도 이어졌다는 사실은 지긋지긋함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를 바로 이해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으로 본다면 우리 세대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을 기대하게 된다.


따라오는 2부는 성경적 관점을 통해 보는 지구의 태고성이다. 1부의 마지막 소제목이 지구의 태고성이었고, 그 내용이 20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연구인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2부에서 지구의 태고성을 성경, 성서적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질학의 역사성에 비춰서 상호 비교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성서 해석은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성서의 본연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성서 해석이 모든 부분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비는 과학과 문화적으로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이번 장의 마지막과 함께 독자의 머릿속에는 분명히 떠오를 것 같다. 그 생각은 보수적 신앙의 그리스도인이나 성서 해석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나 동일할 것으로 판단된다.


성서와 역사 속에서 잠시 잊힌 부분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들은 지질학 박사이자 교수라는 점이다. 3부의 목차를 읽자마자 이전까지는 개론이고, 이제부터 본격 강의 시작인가?”하고 스스로 묻게 되었다. 쉽게 말해, 지구과학 이후에는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정보를 얻던 지질학의 소재들과 용어들이 이번 장에는 즐비하게 등장한다. 이번 장의 마지막 부분이 방사성 연대 측정에 관한 이야기들이기에 이번 장이 흥미와 당혹감을 오가는 기분을 독자들에게 선사해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지질학이나 인접 학문을 연구하거나 관련직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을 제외한) 우리가 이 기회가 아니면 창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들 가운데 지질학이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을 따로 찾기에는 제한 사항이 있다. 이번 장이 책에서 가장 두꺼운 부분을 차지하며 다소 생소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창조에 대한 관심이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로만 구성된다면 이것 또한 창조를 이해하는 시선을 가둬버리는 제약이 될 것이다. 지질학을 이해하는 쉬운 길은 이 책을 읽었지만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 다만 쉬운 길은 모르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지질학자들이 미시간 분지와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통해 지구의 역사를 탐구하고 탐험하는 이 이야기들이 다른 대륙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생각의 여지와 즐거움을 주는 것은 참 특별한 경험이다. (책에 있는 이 지역들의 사진을 보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서 모 포털 사이트를 통해서 찾아보았는데, 컬러로 보니 자연의 광대함과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이가 다른 곳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4철학적 관점이다. 사실 지구의 태고성을 탐구하는 일에 철학적 개념이 사용된다는 것에 놀라움이 있었다. 사실 역사적-성경적-지질학적 관점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기본적인 이해는 있었기에 저자들이 주는 정보들을 습득해서 나의 지식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4부에서 이야기하는 철학적 관점은 들어봤지만 이 개념이 이렇게 적용될 수 있어?”라고 스스로 되 물으며 쉽사리 책장을 넘기지 못한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철학은 어렵다라는 스스로의 성급한 결론이 다양한 분야에서 철학의 개념이 이미 적용되고 있음을 놓친 것 같다. 비록 철학적 관점에 대한 오해로 4부의 시작을 열었지만, 읽어가면서 이번 장이 왜 마지막에 위치하였는지 깨달으며 마치게 되었다. 이 책의 곳곳에서 이미 젊은 지구 창조론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4부에서는 이를 보다 분명히 지적하면서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 가능한 지질학적 증거의 총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 책의 주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지질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입문서로 쓰기에 적절하다. 뻔한 말일 수 있지만, 이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될 독자들은 단순히 지질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만 이 책을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창조에 대한 이해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과학과 멀리 있지 않음을 알고 싶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가까이하고자 하는 노력들 가운데 이 책을 집게 된 이들에게 해답은 아니더라도 해답으로 향하게 하는 성서와 더불어읽을 만한 책으로 적극 추천한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에는 양승훈 교수의 해설이 담겨 있는데, 이 책을 정독하기 전 예습을 위해서나, 읽고서도 여전히 남는 의문들을 정리할 때, 핵심적인 부분들을 다시 생각하고자 할 때도 참 유익하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에 대한 고민이 양승훈 교수에게도 동일하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해설 속에서 묘한 동질감과 더불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지혜 또한 얻어 갈 수 있다.


성서를 해석하는 시선과 신앙이 다르듯 창조를 이해하는 견해들이 다름을 더욱 분명히 깨닫는 오늘날이다. 분명한 점은 이 책을 읽고서 하나님의 창조가, 그리고 이 지구가 우리의 단순한 셈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드는 분들에게나, 앞서 말한 눈가리개를 여전히 벗길 거부하는 분들에게나 이 땅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 이 땅은 하나님의 창조의 땅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들이 창조의 땅을 설명하고자 자신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신앙하는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왔던 과학, 특별히 지질학의 발견을 무시하거나 하대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은 신학을 전공하는 나에게나 신앙 안의 지체들에게는 어려운 부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의 어떠함을 떠나 성서 고유의 가치와 전통을 존중함이 훼손될 것을 항상 염려하고 경계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염원을 가지고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고 이 신앙을 후대에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우리의 이 마음과 이 태도는 충분히 존중받고 앞으로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인도하고 계신다는 신앙처럼,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창조의 세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성서뿐만 아니라 창조의 세계,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또한 이 땅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의 수고는 성서 해석을 위해, 그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힘쓰는 우리의 최선만큼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단순히 젊은 지구 창조론의 카운트 어택(반격) 정도로 그치지 않길 바란다. 창조하신 이를 알기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 창조하신 이가 만드신 땅에 대해 무지하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성경 바위 시간>을 통해 이 땅에 있는 모든 현상, 특별히 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최선이 하나님을 열망하는 우리의 신앙만큼 자라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도한다.


창조의 땅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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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낯섦'을 환대하며 하나님 알아가기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김동문 | 선율 | 2018


김영웅



성경은 모든 답을 알려주는 마법 책이 아닐 뿐더러, 인간의 성공과 번영을 위한 참고서도, 또 자기계발서도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 사이에 생긴 관계의 단절, 그 단절로 인한 결과, 그리고 그 불가항력적인 결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 회복의 메시지가 담긴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목적은, 김근주 교수의 '나를 넘어서는 성경 읽기'에서도 강조되듯,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가 참이라면,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도 참이다.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안위와 유익만을 위해 보험이나 부적 같은 용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무늬만)도 이 세상엔 적지 않지만, 만약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은혜 아닌가!),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하나 생기게 된다. '어떡해야 성경을 바르게 읽을 수 있는가?'

 

성경 읽는 방법에 대한 책과 강연은 이미 넘치도록 많다. 그러나 여기, '성경을 낯설게 읽어보기'를 권하는 특이한 책이 있다. 책의 부제라고 할 수 있는 '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이 책은 벌써 내 주의를 충분히 끌었지만, 책을 열어 프롤로그에 쓰인 '낯설게 만나는 성경'이라는 제목을 읽었을 땐, 이미 내 마음은 이 책에 대한 기대로 충만해졌다. 어제 밤, 아니 오늘 새벽,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될 만큼 또렷한 정신으로 난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림과 글이 절묘하게 어울려,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었고, 읽는 이에게 지루함을 줄 틈도 제공하지 않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으며, 가능한 천천히 읽으려 해도 자꾸만 책장이 넘어갈 수밖에 없을 만큼 강한 흡입력을 가진 책이었다. 높은 곳에 서서 함부로 결론을 지은 뒤 낮은 곳에 위치한 독자에게 교훈이나 지침을 던져주려 하지 않았으며,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 볼 수 있도록 독자의 자리로 내려와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책이었다. 책의 부제에 포함된 '낮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미 저자가 책을 구성한 의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저자와 독자가 함께 읽는 책. 아마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는 누구라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오랜 기간 중동 선교사로서 그들의 낮은 자리의 삶을 직접 함께 하며 살아낸 저자의 일상의 호흡이 배여 있는 책이다. 낯설게 성경을 읽어보자는 그의 바람은 성경이 주어졌던 '그때 그곳'의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자는 의미를 내포한다. 성경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성경은 '그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쓰였던 책이기에, 현재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관점은 성경이 처음 주어졌던 독자들이 이해했던 관점과 똑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오류가 없을 거라는 논리의 비약으로 이루어진 오류로부터도 벗어나야 하며, 한낱 개인의 위로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용도로 성경을 읽는 사적인 복음의 관점으로부터도 벗어나야만 한다. '그때 그곳'의 관점에 대한 이해는 시간과 공간과 문화가 다른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런 낯섦을 거부하지 않고 환대할 때, 우리의 성경 이해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인 김동문 선교사의 겸손한 도움으로 이러한 여정에 뒤늦게나마 발을 내디딜 수 있어 난 참 다행이다. 선교사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 만화책을 이루고 있는 총 18개 짧은 꼭지의 공통분모는 '낮은 자의 하나님'이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낮은 자의 하나님'을 이해해 보며 '낯설게 성경을 읽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다. 교회에서 익숙하게 수없이 많이 들어왔던 성경 본문만이 아니라 그다지 설교 본문으로 많이 사용되지 않은 부분까지 고루 담겨 있는데, 때로는 허를 찔린 듯한 기분으로, 때로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으로 난 감탄과 함께 각 꼭지를 읽어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인간은 고대 근동 신화에서 소개되는 것처럼 신을 대신하여 일하도록 지음 받은 노예 같은 존재가 아닌,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져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임무를 부여 받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 난 이 사실 덕분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할 수 있었고, 기독교의 구별됨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아브라함과 소돔고모라의 나그네를 대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환대 vs. 천대)을 대비하는 부분에서 난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배제와 혐오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방법이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신앙의 완전체 이미지로 알려진 이삭 이면에 있는 아픔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아픔도 아브라함 입장이나 설교자 입장이 아닌 이삭과 하나님의 입장에서 신선하게(낯설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생활에서 새로운 거룩함을 알려주신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성막의 실체(민낯)와 그 안에서 마치 3D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낮은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겼던 제사장의 고군분투했던 삶도 저자가 제공하는 그때 그곳의 현실적인 해설 덕분에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외에도 짧지만 많은 이야기들이 재치 있는(때론 폭소를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림과 함께 책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마도 책을 책장에 꽂아놓지 않고 나처럼 책상 위에 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또 읽고 싶어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말한다. 독자들이 "무엇보다 하나님은 힘 있고 권세 있고 풍족한 이들보다 나그네, 이방인, 여성, 노동자, 마이너리티, 상처 받은 사람, 연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 등 낮은 자에게 온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이 책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고 말이다. 저자의 바람은 적어도 나에겐 성취되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낯설게 읽는 성경 읽기 방법이 이 책을 통해 시작되어, 몰랐거나 희미하게 알았던 하나님을 밝고 선명하게 알아가는 또 다른 시작이 되었음을 믿는다. 신약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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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2. 과학자가 부활을 믿을 수 있나요?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과학자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데 부활을 믿는다면 과학자로서 지적성실성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럴까요? 과학자가 부활을 믿으면 안 된다는 태도 자체가 어찌 보면 상당히 종교적인 듯합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창조를 믿는 신앙, 그리고 예수의 성육신을 믿는 신앙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구성합니다. 물론 부활에 관해서 다양한 형태의 믿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니 복음서는 소설이다, 예수는 사실 죽은 게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다, 예수의 부활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제자 공동체가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등등 말입니다.

 

분명한 점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진술이 모든 세부사항에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세부적인 불일치의 경향은 어떤 역사적인 사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빈 무덤과 그 공동체의 경험과 진술, 그리고 순교로 이어지는 부활의 믿음에 대한 헌신은 부활의 역사성을 매우 강하게 제시합니다.

 

이 글에서 부활의 증거를 제시하거나 과학적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논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활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으로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걸까요?



부활이 가능한지 과학으로 밝힐 수 없다는 점은 아마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물론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단한 사람이 깨어나서 의사들을 당황케 하는 일이 어쩌다 일어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건 일상적인 경험이고 과학적 결론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생물이 됩니다.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이 과학의 시각입니다. 생물은 무생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생물학의 결론입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던 전근대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발생성을 믿었습니다. 가령, 창문을 꼭꼭 닫아 둔 집안에서 초파리가 생기는 걸 보면 초파리는 자연적으로 생겨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바로,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연한다는 자연발생설입니다. 하지만 생명과학이 발전하면서 자연발생설은 폐기되었습니다. 초파리는 마구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생명체인 초파리가 알을 낳아야 그 알에서부터 초파리들이 생겨납니다. 돌들이 갑자기 생명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무생물에서부터 생명체가 만들어 질 수는 없다는 현대 생명과학의 결론은 자연발생성을 폐기시켰습니다.

 

그런데 같은 잣대를 지구 최초의 생명체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과연, 지구에서 첫 생명체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지구 최초의 생명체는 자연발생설을 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46억 년 전 지구가 생성될 때는 생명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 억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생명체가 지구에 등장하고 그 이후 생명체들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그 시점은 대략 38억 년 즈음입니다. 무생물의 시대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한 이 과정을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오래 전 과거의 지구의 자연환경과 조건은 지금과는 매우 다르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점은 무생물의 시대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즉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현했다고 과학자들이 믿는다는 점입니다.


제가 왜 믿는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것은 최초의 생명체가 어떻게 자연적으로 발생하는지 과학으로 엄밀히 밝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과서에도 언급되는 밀러의 실험으로 밝힌 내용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무생물에서 생물의 시대가 시작되려면 빅뱅이 서너 번은 일어나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생명과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고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생명체는 지구에서 자연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계에서 유입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자연발생으로 생명체의 출현을 설명하기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외계유입설을 주장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지구 밖 어느 우주, 어느 행성에서 생명체가 출현했다고 해도 그 생명체는 자연발생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생명체는 어떻게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했는지 여전히 과학으로 밝혀야 합니다. 외계유입설은 생명의 출현에 대해 밝혀야 할 숙제를 지구 밖으로 떠넘긴 셈입니다.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발생한 과정을 과학으로 밝힐 수 없으니 창조주가 기적적으로 만든 것이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견해는 간격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허망한 주장이 되기 쉽습니다. 저는 다만, 과학자들이 무생물에서 생명이 탄생했다고 믿는다는 점, 그리고 생명의 출현 과정을 과학으로 잘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역사에서 무생물과 생물의 시대를 나누고, 그 사이에 생명이 출현했다고 받아들인다는 점을 지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과학은 자연발생설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지구에서 첫 생명체가 탄생한 과정은 현대과학의 자연발생설과 배치된다는 점을 짚어내는 것입니다.

 


부활은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개념과 비슷합니다. 도대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는가를 묻는 우리는 동일하게, 도대체 어떻게 무생물 시대에 생물이 출현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최초의 생명체가 무생물에서 탄생했다고 과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부활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믿음 모두,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지만, 그리고 생명은 자연발생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결론에 위배되는 듯하지만, 여전히 과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 누구도 수십억 년 전 지구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한 과정을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그 전후의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서 무생물에서 생명이 생겨났다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전과 부활 이후의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부활은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과학으로 입증된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과학으로 입증되면 지식이 되어버리고 지식은 그저 이해하고 동의하면 됩니다. 우리는 과학으로 증명되어야만 진리라는 계몽주의의 산물인 증거주의에 깊이 매몰되어 있습니다.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는 건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많은 경험적 증거를 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거나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내의 사랑을 믿습니다. 사랑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건, 무생물이 된 죽은 몸이 다시 생명체가 될 수 있는가를 과학적으로 논쟁하고 탐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육신한 예수와 그의 대속과 부활을 믿는 건 바로 사랑때문입니다.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통치를 회복시키는 그 원대한 구속의 계획에 감격하고 거기에 참여하고 그 일부가 되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단지 과학적 혹은 철학적 논쟁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내어 걸고 예수가 걸어간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헌신과 희생을 끌어냅니다. 예수의 도, 그 고난과 희생의 길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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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교육으로서의 과학적 소양

  

최승언(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구과학교육과)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에 대하여 누구나 한 마디씩 할 수 있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정치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져 왔다. 더구나 우리 학생들은 이렇게 바뀌는 교육정책에 따라서 움직여 왔다. 교육정책의 대부분은 대학입시와 맞물려 있으면서 학생들의 학습량과 사교육 경감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생은 바뀐 교육정책에 대하여 혼란을 거듭했고, 이에 따른 사교육 시장은 팽창하기만 했다. 교육부나 시도 교육청이 아무리 좋은 교육정책 아이디어를 가지고 실현해 보려 해도, 공교육은 무시당하기 일 수였고, 많은 학생들은 오히려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평준화 교육을 보완하기 위한 영재교육, 세계 과학 인재들의 만남의 장인 올림피아드가 오히려 그 본연의 목적을 잃은 채 특목고를 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은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교육은 정시모집을 위해서는 수능에 맞추어져 있고, 수시모집을 위해서는 방과 후 활동 혹은 학교 밖 활동을 포함하여 학생종합생활기록부에 좋은 기록을 위하여 학교 안에서의 모든 시험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교육으로 내몰린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정말 전인적인 인간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건강한 시민으로서 성장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못하더라도 대학교에 진학하여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학문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있는 수학 능력 혹은 역량이라도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하여 부정적인 답을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 역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기우였으면 좋겠다. 



교육 현장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보통 학교에서 과학실험을 한다고 하자. 과학교사는 학생들이 과학실험을 잘 수행하기 위해 과학실로 학생들을 오게 한다. 학생들은 모두 실험복을 입고 있다. 그리고 4, 5명이 한 실험대에 앉아서 교사의 지도 하에 과학실험을 수행한다. 물론 교사는 이 과학 실험을 왜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결과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모두 알려 준다. 학생들 앞에는 실험보고서 양식이 주어져 있어 실험 결과와 그래프를 양식에 주어진 대로 기록하면 된다. 양식이 제공하는 질문에 대하여 실험 결과를 보고 답하면 되는데, 대부분 실험하기도 전에 교과서의 내용을 보고 적거나 선행학습이 되어 있기에 정답 적기에 여념이 없다. 실험 결과도 이웃 실험대의 결과와 다르면 교과서를 보고 자료를 베끼기 일 수다. 이것이 교육 현장의 모습이다. 교사의 주도와 학생의 주도를 각각 어떻게 바꾸어야 이러한 과학 실험 교육이 참과학 교육이 될까? 위에 제시한 과학 실험은 대학 입시를 위한 과학 수험 준비를 위해서도, 과학과 관련된 역량을 위해서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사교육 기관에서는 어떻게 할까? 잘은 모르지만 매우 잘 정리된, 시험을 잘 볼 수 있게 준비된 그 무엇을 제공하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형태의 제공은 공교육 기관에서도 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인가?


사람의 마음은 아주 간단히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열린 마음은 발산적 사고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발산적 사고를 통해 창의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 긍정적이다. 닫힌 마음은 수렴적 사고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수렴적 사고를 통해 비판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비판적이기에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는 합리적인 사고와 연결되어 있다. 합리적인 사고 질서를 만들어 내지만, 창의적인 사고는 우발적이고, 무질서한 면이 있다. 그런데 교수/학습에서도 교사가 주도하는 학습이 있는가 하면, 학생이 주도하는 학습이 있다. 현재의 교수/학습 경향은 교사 주도에서 학생 주도로 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학생의 배움과 관련된 학습에 대하여 교사 주도와 학생 주도 수업 모두 다 장단점이 있다. 공부를 위해서도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열린 마음과 닫힌 마음에 모두에 의해 발해지는 모든 사고 역량이 다 필요하다. 우리는 긍정은 수용하면서도 부정은 수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긍정과 부정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이 하나의 무엇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교육에서도 이 모두가 모이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육에 대하여 어떤 세계관을 가지면 건강할까? 건강하다는 표현은 바람직하다는 표현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표현이라 생각된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이에 대한 실천이 행동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변의 상황이 대학입시에만 집중되어 있어도,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행동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이는 학생본인 뿐만 아니라 학부형들도 가져야할 세계관인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모두 복잡계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예를 들어 한글의 자음, 모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자음과 모음이 글자를 만들어 소리를 나타내고, 글자가 모여 단어를 만들어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어 중요한 뜻을 만들고, 문장들이 모여 시, 수필, 소설, 과학 논문 등이 써져 어떤 중요한 기록물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이 기록물은 글자와 소리와의 연결이 임계가 되어 단어와 문장의 창발에 의한 소산물일 것이다. 이러한 복잡계의 개념은 여러 분야에 응용되어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을, 최무영 교수는 온문화를, 김명용 전 총장은 온신학을, 나는 온교육을 교육에서 창발될 건강한 세계관으로 주장한다. 



온교육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면, 교육에서 회자되는 여러 교육 정책들에서 써지는 가장 낮은 교육 개념들을 낱교육이라 칭하고, 이러한 낱교육들이 정보를 교환하고, 합쳐져 조금 더 큰 열교육을 이루고, 이렇게 이루어지는 열교육은 낱교육들이 가지고 있는 각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합일 뿐만 아니라 합을 뛰어 넘는 새로운 교육적 의미를 창발하게 된다. 이러한 열교육은 각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포텐샬 혹은 자본 그리고 학습 내용에 따라 모두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열교육들이 각 학생들에게 customizing 되어져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열교육들이 모여 창발된 온교육을 이룰 것이다. 어쩌면 이 온교육은 국가 교육과정과는 다른 미국에 제시한 교육표준에 해당할 지도 모른다. 온교육으로 실천되는 교육 현장은 어쩌면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철학, 심리, 사회, 문화, 역사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마다 다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온교육은 매우 추상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이 세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 대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온교육과 관련된 과학교육 중의 하나는 합리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를 모두 할 수 있는, 교사 주도와 학생 주도가 함께하는, 학생 개인 학습과 학생 간의 협업 학습이 모두 이루어지는, 과학 지식과 탐구 활동, 이와 서로 연결되는 과학적 태도 및 과학의 본성이 모두 다루어지는, 그리고 과학 글쓰기와 말하기, 듣기와 읽기가 동반되는, 이러한 모든 것과 함께하여 개인적인 과학 이슈 혹은 사회적인 과학 이슈에 대한 의사 결정 및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 실천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과학적 소양을 이루는 교육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적 소양을 이루는 과학 교육은 아마도 현재 개신교 교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창조과학의 문제를 해결해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 교육이 미래를 살아 내게 하는 역량들을 가지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