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에서 사제로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부천/인천 북클럽]

 

| 박정탁 (부천/인천 북클럽 회원)

 

 

영국의 물리학자 존 폴킹혼은 양자물리학을 끝까지 거부한 아인슈타인을 '최초의 현대인인 줄 알았으나 최후의 고대인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미시세계를 직접 연구하는 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의 고집을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배 물리학자를 향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고 미시세계를 꾸준히 연구한 폴킹혼. 그와 같은 현대 물리학자들 덕분에 우리는 북경에서 펄럭인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서 허리케인이 되어 나타나게 될 '확률'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과학 연구에서 앞선 연구는 '그런것이 있었다' 정도의 가치만이 용납된다고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폴킹혼의 이러한 태도는 지나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해봄직하다. 과학이 계속 발전하고 진보한다는 것은 앞선 과학의 연구가 모조리 폐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논리적으로 입증되고 납득된 과학의 공헌은 더 뛰어난 연구가 나올 때까지만 수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 또 다른 연구에 의해 비난받고 전복되는 것을 잠시 유예받았을 뿐인가? 그렇다면 폴킹혼을 비롯하여 과학자들은 무엇을 위하여 연구하는가?

 

폴킹혼은 이것을 '축적'이라는 온건한 용어를 사용하여 진보의 반대가 꼭 퇴보는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과학의 연구 또한 인문학처럼 축적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말로, 거인이 있어야 거인의 어깨도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그 유명한 '비판적 실재주의'라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실재는 오직 주관과 관념에서나 가능하다"는 염세적인 태도와 "보이는 것이 곧 실재 그 자체"라는 순박한 실재주의의 사이에서 중도를 걷는 이 방법론은 얼마나 유연한가.

 

분명하고 아름답게 존재하는 실재(real)에 대한 확신. 그리고 성실한 연구를 통해 그 실재에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믿음. 실재와 아주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그것이 실재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 겸손함. 그래서 나보다 더 실재에 가까이 간 학자의 연구를 기꺼이 수용하는 유연함. 폴킹혼의 방법론은 동료 과학자들의 진실한 노력을, '실재를 향한 숭고한 발자국'으로 존중하고 있는듯 하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는 선배요 거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을 차갑게 비판하기도 했었으나 학자들에게는 그런 순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로남불이 아니라 학문의 최전선에 서있는 학자들의 고단함이니, 큰 흠이 될 수는 없다.

 

어쨌든 우리 모두 잘 알듯이 이 위대한 물리학자는 캠브릿지 대학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사제가 되었다. 과학신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그의 삶과 궤도를 오늘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어서 유익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기 전에 소탈하고 겸손한 사람이 분명하다. 그래서 사제가 되기로 선택한 그의 결정이 아주 비논리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천/인천 북클럽 모임 안내

 

  • 일시: 2019. 10. 1. (화) 7:00 pm.
  •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 804호 박영식 교수 연구실
  • 교재: 존 폴킹혼, <과학으로 신학하기> (모시는 사람들)
  • 문의: 010-사삼삼삼-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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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북클럽의 새로운 도약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미국 파사데나 북클럽]

 

| 김영웅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

 

 

정체된 분위기를 벗어나 한 단계 도약을 위해 모두들 귀한 시간 내주셔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네 가지 나무를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한 간략한 커리큘럼 개요를 발표하고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약 1년 반 정도의 미래의 방향을 논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하나의 나무가 너무도 컸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이 함께 탐험해 나가야 하는데, 기초적인 지식과 세부적이고 전문적인 지식 사이의 간격을 측량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행착오 없이 한 번에 가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은다면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과정 자체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열의와 이 일의 당위성을 생각하며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침 우종학 교수님도 참석해 주셔서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집단지성의 힘과 다양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달에는 오늘 나눈 중요한 이야기들을 토대로 커리큘럼의 수정과 보완을 하여 다시 모이게 됩니다. 11월달부터는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모임이 있고 제가 그 자리에 있음이 참 감사합니다. 혹시 아나요. 파사데나 학파가 정말 형성되어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생각나실 때 응원 부탁드립니다. 오늘 특별히 참석해 주신 우종학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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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심왕찬님의 유가족을 위한 주택자금 모금 안내

 

새로운 터전에서 故 심왕찬 선생님의 뜻이 유가족의 삶을 통해 이어질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주세요.

 

얼마 전 과신대 정회원이자 실행위원으로 함께 하셨던 故 심왕찬 선생님의 유가족을 위한 장학금을 모금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고 유가족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유가족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유가족의 주택 문제였음을 알게 됐습니다. 현재 유가족은 故 심왕찬 선생님의 회사에서 제공하는 사택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사택에 기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사를 해야 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과신대에서는 이미 개인적으로 성의를 표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유가족에게 가장 시급한 주택자금을 모금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지난번에 뜻을 모아주신 장학금을 보태 주택자금을 모금하고자 합니다. 유가족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여러분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 기간: 목표 금액 (주택보증금 3,000만 원) 달성 시까지
  • 모금 방법: 계좌이체 (신한은행 100-032-022282 과학과신학의대화)
    - '보내는 이'에 본인 이름과 장학금 표기 (예. 김ㅇㅇ장학금) 또는 입금 후 사무국으로 연락(scitheo.office@gmail.com 혹은 facebook 메시지)
    - 해외에서 모금을 원하는 분들은 페이팔(paypal.me/scitheo)을 통해 모금에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입금 후 사무국으로 연락을 주셔야 지정된 목적으로 후원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함께 마음을 모아주실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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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원과의 만남] 대구대학교 차정호 교수님

 

과신대 초창기부터 정회원으로 함께 해 주신 대구대학교 과학교육학부 차정호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번에 진행하고 있는 <기초과정II>에 참여하셔서 세미나 전에 미리 만났습니다. 매주 대구에서 KTX를 타고 올라오시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인터뷰 진행: 최경환 실장, 사진 촬영: 이진호 간사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 저는 대구대학교 차정호 교수입니다. 화학교육과에서 나중에 과학 선생님이 될 예비 교사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희 과신대에 화학 선생님은 처음인 거 같습니다.^^ 

 

- 학부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학위는 교육학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화학을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하고, 교육학 전공이라고 말합니다. ㅎ 

 

저희 과신대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 어느날 페이스북에서 알게 된 거 같아요. 이 주제는 굉장히 오랜 전부터 고민했던 거고, 꽤 오래전부터 양승훈 교수님의 책을 읽어왔습니다. 그리고 우종학 교수님을 알게 됐고, 두 분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렇게 하다가 과신대라는 단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가입하게 됐습니다. 

 

지난번 <기초과정II> 첫 시간에 자기소개를 인상 깊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 까기 오게 된 스토리를 이야기해주시겠어요?

 

- 대학원 때 아내 덕에 신앙을 가지게 됐습니다. 꽤 오래 저항하다가 항복을 했죠. 아버지도 상당히 반대가 심했고요. 저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걸렸기 때문에 누가 전도하러 와도 아예 듣지를 않았죠. 그랬는데, 어쨌든 아내가 먼저 신앙생활을 했고, 저를 집요하게 괴롭혔고, 아내가 저에게 책을 권해줬습니다. 그때 기독교 변증에 대한 책을 주로 읽었는데, 부활에 대한 논증에 매료됐습니다. 부활을 인정하게 되니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신앙을 갖게 됐습니다. 

 

아주 작은 개척교회에서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도에 대구대학교에 임용되면서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쯤에 창조과학을 알게 됐습니다. 완전히 매료됐죠. 이건 애들한테 알려줘야겠다는 사명감에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했죠. 학교에서 교양강좌도 열어서 2학기 정도 '성경의 과학적 이해'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습니다. 저의 흑역사죠. 

 

교회에서도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굉장히 열심히 했죠. 그때도 찜찜한 것이 있었는데, '과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이렇게 깡그리 무시해도 되나?' 이 부분은 항상 걸렸어요. 그래서 지구 연대 문제만큼은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얼버무리고 넘어갔어요. 그 이후에 양승훈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넓어졌고, 지금은 과신대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독서를 하면서 생각이 넓어지고 신앙도 깊어졌습니다. 어쨌든 좀 더 깊이 알아야 가르칠 수 있으니깐 이번 <기초과정II>도 신청하게 된 겁니다. 제가 제일 멀리서 온 줄 알았는데, 경산에서 오신 분이 계셔서 놀랐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이런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고, 한국교회의 이야기인 거 같습니다. 

 

- 사실 저는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머리속이 상당히 넓어졌습니다.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창조과학의 늪에서 벗어서나 다양한 책을 읽는데 너무나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거죠. 이번 과정에 신청하게 된 이유가 나의 포지션을 정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한 소개를 할 수 있겠지만, 제 입장에 대한 고민은 안 할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하나하나 공부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창조기사 논쟁>을 읽고 있는데, 너무 신학적이어서 '내가 이거까지 알아야 하나?' 싶었습니다. 제가 어느 깊이까지 알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내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희 과신대에 문의를 주시는 분들 대부분은 청소년들 교육에 대한 것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창조신앙을 가르치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몰라 고민하십니다. 

 

-  요새 제가 하는 고민 중 하나는 생각이 점점 깨지면서 보수적인 신앙으로부터 나오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제가 말을 못 하겠어요. 자기 검열에 들어가게 되더라고요. 질문이 생기고 물어보고 싶은 순간이 생기는데, 이걸 받아주질 않아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를 못하겠어요. 내가 관계에 깨어질지언정 질문을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깐 괴로운 거죠. 

 

그래서 10년 전 제가 했던 창조과학 AS를 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AS 강의를 하려고요. 

 

그래서 전략이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창조과학이 교회에서 먹히는 이유는 은혜롭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저희도 은혜롭게 전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나라의 과학교육에 대해서도 한말씀 해 주세요. 

 

저의 주요 관심은 우리 제자들을 어떻게 더 많이 임용시키냐입니다.^^ 예전에는 임용고시에 많이 합격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제는 어떤 교사가 되게 하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교사가 되더라도 어떤 교사가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교사가 과학을 어떻게 가르치고, 그 이전에 학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거죠. 과학을 가르치는 것은 둘째 문제고, 이 험한 세상에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냐가 더 중요한 거 같아요. 

 

초등학교 때는 과학자가 꿈인 친구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서 입시라는 벽에 부딪치면, 그리고 졸업 이후를 생각하면, 그렇게 좋아하던 과학을 이용하려고만 해요. 그런데 그 꿈을 다시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교수님은 앞으로 어떤 소명을 갖고 계신가요?

 

일단 제가 교회에서 AS 강의를 하는 것이 목표고요. 대학에서는 일반 학생들도 들을 수 있는 입소문 난 교양과학을 하나 맡아서 하는 겁니다. 성경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과목을 하나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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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를 읽고

 

이규석 박사 (전남대학교 치의학, 과신대 광주 북클럽 회원)

 

 

태양계, 항성, 은하, 은하군, 은하단, 빅뱅, 우주의 끝……

 

우주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끝없는 확장성과 광대함이었다. 광대한 우주 속의 지구가 너무도 작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은 겸허함을 배우고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을 되살리게 되며, 더 나아가 누군가는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신에 대한 경외심, 누미노제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첨단 과학이론과 정교한 기술들에 밀접하게 엮여서 발전해온 천문학이 과학의 발달에 따라 잊어버렸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다시 일깨우고, 더 나아가 새로운 종교적 체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꽤나 아이러니해 보인다.

 

이런 새로운 종교적 체험은 과학적 지식을 이해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일반인들도 과학적 지식을 쉽게 소개한 과학서적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는 우주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한 책으로서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잘 이끌어내는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우주에 존재하는 다양한 존재 중 가장 기이한 특성을 지닌 블랙홀에 대해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확장성과 광대함이 연상되는 대개의 우주적 존재들과 달리 블랙홀은 끝없는 수축성과 무한소라는 꽤나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블랙홀은 부피는 0에 밀도는 무한대라는 마치 수학공식에서나 존재할 법한 기이한 존재이고, 빛조차 가두는 강한 중력으로 시공간을 왜곡시켜 바깥의 우주와 단절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은하의 중심에서 수많은 별들을 거느리는 존재이며, 모든 물질을 탐욕스럽게 삼켜버리는 동시에 우리 은하 전체의 밝기보다 수십배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존재이다. 이런 기이한 특성을 가진 블랙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지의 존재이지만 만물을 창조하신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지기에는 지나치게 독특한, 소위 이단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우종학 교수의 블랙홀 강의>는 블랙홀이 무엇이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잘 정리한 동시에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졌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다. 덕분에 그동안 미지의 존재로만 여겨져 왔던 블랙홀조차도 우주 속에서 물질이 만들어내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었고, 또 이런 존재를 가능케 하신 창조주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블랙홀에 대한 내용이 아무리 신기하고 놀랍다고 하더라도 건조한 사실의 나열만으로는 신기함과 놀라움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블랙홀에 대한 발견을 가능케 한 기발한 착상들과 그에 따른 연구과정들이 생생히 담겨 있다. 저자가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하고 있고, 동료 과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기에 담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런 내용들은 블랙홀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동시에 과학적 발견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흥미롭고 즐거운 과정인지 잘 보여준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다른 과학과 달리 인위적인 실험이 거의 불가능한 분야인 천문학이 어떤 방식을 통해 연구를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천문학이 정교한 관측과 이론물리학을 이용한 해석과 예측을 통해 새로운 발견과 발전을 거듭해나간다는 내용은 수학적으로 정교한 이론이 아직 부족한 분야인 생명과학에 종사하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무척 흥미롭고 질투 나는 부분이었다. 

 

책의 마무리가 다소 갑작스럽고 딱딱하게 끝나는 점이 조금 아쉽지만 이는 저자가 먼 훗날 자신의 연구성과를 모두 종합하고 과학자로서 살아온 삶을 뒤돌아본 뒤에 적길 원해서 남겨둔 여백이 아닐까 싶다. 더욱 흥미진진한 연구활동을 통해 더 훌륭한 연구성과를 이뤄낸 뒤 멋지게 책을 마무리하시길 응원하며 나 역시 과학자로서 이 책과 같은 멋진 책을 써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보며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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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사무국 소식 201909

 

지난 8월 22일에는 과신대와 청어람 공동주최로 우종학 교수님의 <블랙홀 강의> 북콘서트를 진행했습니다. 

 

정말 다양한 연령 대의 청중들이 참여했습니다. 특별히 가족 단위로 오신 분들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블랙홀 강의를 듣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습니다. 

 

앞으로 과신대에서도 프리미엄 교양 과학 강좌를 많이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8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에서 2019년 자문위원 모임을 가졌습니다. 개강을 앞두고 가장 바쁠 시기에 시간을 내셔서 참석해 주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년 간 과신대 행정과 사역을 간단하게 브리핑하고, 자문위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무국에서 열심히 받아 적으면서 앞으로의 사역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할 일이 많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길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과신대를 위해 구체적인 조언과 권면의 말씀을 해 주신 자문위원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8월 26일에는 과신대 <기초과정II> 5기를 개강했습니다. 첫 시간에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대전, 세종, 대구, 경산에 KTX를 타고 올라오신 분들 때문입니다. 먼 곳에서 <기초과정II>을 듣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하신 분들의 열정과 수고에 절로 탄성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6주간 열심히 공부해서 모두 멋진 수료증을 들고 인증사진을 찍기를 소원합니다. <기초과정II> 5기 화이팅입니다!!

 

 

 

 마지막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합니다. 지난 8월 7일 오후에 과신대 정회원이자 실행위원으로 섬겨주셨던 심왕찬 선생님께서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에 사무국은 지난 며칠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동안 과신대를 위해 헌신해주시고 많은 일을 해오신 분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남은 유가족을 위해 과신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자녀들을 위한 장학기금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함께 정성을 보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故 심왕찬 선생님 장학금 모금 안내: https://www.scitheo.org/410 

 

 

 

과신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1. 우리의 삶의 터전이자 근거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피조세계가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파괴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으로 인해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으며,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산림이 불에 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더 많이 소유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과 자연을 돌볼 줄 아는 마음을 허락해주십시오. 

 

2. 지혜의 하나님,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배우고 연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하시고, 잘못된 가르침과 지식이 사람들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자녀들이 일반은총으로 허락하신 이 세상의 학문과 지식을 잘 연마하고 훈련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고 사람들을 섬기는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3. 자비하신 하나님, 슬픔과 아픔 속에 있는 우리의 이웃을 돌봐주시옵소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빠진 이들, 미래를 약속받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동자들,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청년들에게 주님의 긍휼과 은총을 내려주시옵소서. 비관적인 현실을 넘어서 미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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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자문위원 모임 20190830

 

지난주 금요일에는 과신대 자문위원 모임이 있었습니다. 학기 전이라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두 가지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했습니다.

 

 

1. 앞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과 매뉴얼을 만들자.

 

시중에 나와있는 창세기 성경공부 교재에서 특히 창조 부분은 대부분 창조과학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데, 올바른 성경해석과 창조론 정립을 위해 대안적인 교재와 교육이 시급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어서 과신대의 내용을 중고등부, 청년부에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표준적인 교안을 만들어서 강사들을 교육하고 훈련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 대한 대안적 읽기를 가르치고 보급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우주, 지구, 생명'과 같은 주제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교육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2. (그리스도인을 위한) 교양 과학 강좌를 개설하자.

 

교양 과학 강좌의 필요성에 대해서 대부분의 자문위원들이 동감하셨습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 올바른 창조론 정립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교양 수준의 (제대로 된) 과학 강좌도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저 상식적인 수준의 과학 내용만 잘 알고 있어도 과학에 대한 많은 오해가 해소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과신대 자문위원 교수님들은 각 분야의 전문 과학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좋은 과학 강좌를 만들 수 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내년부터 멋진 과학 강좌가 개설될 것 같습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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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6. 지구 6천 년설을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과신Q] 6. 지구 6천 년설을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회 내에서 지구 6천 년설을 신봉하는 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분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과학을 수용하는 저를 신앙이 없고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합니다.

 

이런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진리라고 믿는 점은 동일하지만, 창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시간이나 방법, 그리고 과정에 대한 ‘창조의 그림’을 서로 다르게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함께 공존합니다. 어떤 태도가 지혜로울까요?

 

지구의 연대가 수십억 년이 되었다는 건 과학적으로 잘 알려진 상식입니다. 지구가 6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젊은지구론은 극단적 문자주의 입장을 제외하면 신학적으로도 비판받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에는 창조과학의 지구 6천 년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학교에서 지구 나이를 46억 년으로 배우는 청소년들이 교회에서 지구 나이를 6천 년으로 배우면 심각한 신앙적 갈등이 생깁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많은 분들이 염려합니다. 지구 6천 년설을 믿는 사람들이 문자주의와 창조과학에서 벗어나서 더 이상 잘못된 정보 때문에 기독교를 반과학적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화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젊은지구론을 믿지 않는 일이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1-3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그 당시 교회는 고기를 먹는 사람과 채소만 먹는 사람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채소만 먹는 사람들은 제사에 사용되었을지도 모르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상에게 드리는 제사에 사용된 음식은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제사에 사용된 음식이라고 해도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두 그룹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채소만 먹는 사람들을 업신여겼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로마서 14장은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의 권면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안 되는가의 문제에 관해서 바울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고기를 먹는 것이 잘못이라면 바울도 고기를 먹는 자들을 정죄했을 것입니다.

 

지구의 연대가 46억 년인가 아니면 6천 년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분명합니다. 지구 나이가 46억 년임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자연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잘 드러냅니다.

 

둘째,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점은 신학적으로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채소만 먹는 자들을 품어줍니다. 채소만 먹는 자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여전히 유대교 전통에 사로잡혀서 이방신들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는 일이 부정하다고 생각한 교인들을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로 여겼습니다.

 

창조-진화 문제에도 같은 적용이 가능합니다. 지구 6천 년설만이 옳다고 믿으며, 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해서 창조하실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여전히 고대의 창조론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즉각적이고 기적적으로 만들어야만 진정한 창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처럼 믿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진화를 포함한 어떤 방법으로도 창조하실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고 지구를 자연적 방법을 통해 46억 년 전에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구 6천 년설을 신봉하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품어야 합니다.

 

셋째, 바울은 채소만 먹는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유대교 전통에 사로잡혀서 제사음식을 부정하다고 보는 어리석은 자들로 취급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을 열등하다고 깔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채우라고 말합니다. 15장 1절을 보면,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은 기독교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모든 음식이 선한데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는 부정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유대교의 율법에 얽매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훼손하는 결과를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연약한 자로 여기고 믿음이 강한 자들이 그들의 약점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지구 6천 년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고대의 창조론에 얽매여 지구 연대를 6천 년이라고 주장하는 근본주의 입장을 깔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처럼 우리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돕고 그들의 약점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6일이라는 시간에 제한하거나 현대 과학의 결과를 부정하는 일은 오히려 기독교의 창조론을 훼손합니다. 성경과 과학이 모순된다고 보는 그들의 관점은 오히려 기독교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창조에 관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품고 그들이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넷째, 바울은 채소만 먹는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 권고는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한 권고와는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채식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신앙을 버리고 율법을 범한 자들로 정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판단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고기를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다며 바울은 양쪽의 입장은 모두 선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지구 6천 년설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권고가 가능할 것입니다. 지구 나이가 46억 년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성경을 버린 사람들이라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지구 6천 년설을 믿거나 지구 연대가 46억 년이라고 믿거나 모두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자들입니다. 과학을 수용하는 사람들을 창조를 믿지 않는다며 정죄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구 연대에 대한 견해가 다르고 창조의 그림이 서로 다르더라도 그 그림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섯째,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바울의 권고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고기를 먹는 자와 채소만 먹는 자의 입장을 바울이 공평하게 인정한 듯하지만, 채소만 먹는 자를 믿음이 약한 자로 표현한 점을 보면, 그리고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언한 점을 보면 바울의 신학적 입장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실천사항을 내놓습니다. 21절을 보면 믿음이 약한 형제가 보고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고기를 삼가라고까지 충고합니다.

 

물론 이 충고는 고기를 먹는 일이 죄라고 인정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고기를 안 먹는 듯 위선적으로 행동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시험에 들고 실족할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지구 6천 년설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구의 연대가 46억 년 되었다거나 진화의 방법으로 지구를 창조하셨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과학 상식도 모르는 미개하고 반지성적인 사람들로 업신여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한 신앙을 나름대로 존중하고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도와주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물론 지구 6천 년설이 맞다고 인정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도 지구 6천 년설을 믿는다며 위선적으로 행동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이 무너지지 않게 오히려 그들의 창조신앙이 더 커질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이해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더 위대합니다. 창조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일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는 일은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매우 다른 과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에 대해 더 깊이 알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과학으로 밝혀진 사실들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더 풍성하게 이해하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의 신앙이 성장하고 그리고 공동체의 믿음이 자라는 데에 있습니다.

 

창조에 관한 나의 믿음이 강하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를 폭넓게 이해하고 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창조하실 수 있다는 큰 믿음이 있다면, 믿음이 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6천 년 전에 우주와 지구와 생명체들을 뚝딱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그리고 창조과학만이 기독교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업신여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이 실족할 위험이 있다면 심지어 창조의 다양한 그림들을 아예 꺼내지 않은 채 창조라는 진리만 함께 누리는 단계에 머무르는 참을성과 이해심과 성숙함을 가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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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겸손: 편견과 오만함을 넘어

 

[과신책] 학자의  읽기

 

겸손: 편견과 오만함을 넘어
로완 윌리엄스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 복있는사람 | 2015

 

김영웅

 

 

진리처럼 믿어왔던 것들이 하나의 의견에 불과할 수 있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서있던 자리가 치우친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언젠간 그 시간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

 

닫혀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꾹 잠겨있던 녹슨 눈과 거미줄 쳐진 귀가 마침내 열리는 순간, 누군가에겐 자신이 쌓고 지켜왔던 성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인생의 극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기꺼이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결단의 시간이 되기도 하며, 또 누군가에겐 한동안 놓고 있던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 삶을 재조정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대학생 때 교회를 잠시 떠나기까지 다녔던 여러 교회들이 대부분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해서 다시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였다. 내가 배워서 알고 있던 기독교에 관한 모든 정보는 내가 소속되어 있었던 교단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내게는 오직 그곳에서 배워 처음 알게 되었던 지식이 기독교와 교회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전부였다.

 

불행하게도, 별 문제가 없었다. 교회에서는 신앙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으로 통했다 (공부 잘하는 인간이 교회에 결석하지 않고 출석하며, 질문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기까지 하면, 백이면 백 신앙 좋다는 소리 듣는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지금도 그러리라는 데에 오백 원 건다). 그러나 내게도 어느 날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그 일련의 과정이 처음엔 인생의 극소점을 넘어 최소점으로 다가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가 아닌 기회이자 발판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으며, 나중엔 그때를 생각하면서 현재 내 삶의 키를 재조정하는 기억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때였다. 내가 알고 믿었던 것들이 가졌던 찬란한 유일성과 엄숙한 절대성이 깨어지게 된 건. 메커니즘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위치한 지점이 가운데가 아니라 상당히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름 좀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기독교 관련 지식들이 하나의 해석이나 주장에 불과한 게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주 작아졌다.

 

 

미국에 오게 되면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여러 교파가 기독교라는 지붕 아래 존재한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성공회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라고 이해하면 성공회를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설명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내가 읽었던 신학책의 꽤 많은 저자들이 성공회 배경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번에 처음 접한 로완 윌리엄스 또한 성공회 소속 신학자이다. 그는 천 년 전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성 안셀무스 이후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지도자라는 평까지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을 가진 아주 짧지만 묵직한 책을 읽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요소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핵심 요소 네 가지를 친절하게 풀어준다. 자상한 선생님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알려주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세례와 성경, 성찬례와 기도, 이 네 가지에 관한 지식은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배워왔던 기본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는 또 한 번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이 전부가 아니었고, 상당히 편향되어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도 신학적인 요소들이 매일 접하는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 거룩한 백성의 참 의미가 결코 어떤 위력을 행사하며 겉으로 드러난 집단이나, 저기 산속에 따로 존재하는 은둔형 단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의가 판을 치고 죄악과 혼돈이 가득하고 여전히 유혹이 넘쳐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그 세상을 등지는 것도 아니요, 그 세상과 똑같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 세상 속에 존재하되 혐오와 배제와 차별의 유혹을 물리치고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것, 연약하고 불완전한 모습이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나도 용기 내어 몸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 세상 속에 존재하는 죄악과 혼돈을 피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맞서는 것, 그 삶을 기꺼이 끌어안는 것, 모든 사람을 섬기며 모든 사람에게 복이 임하길 간구하는 것, 그러나 위를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것, 그래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도움을 구하여 우리가 쓰이는 것, 예언자적인 사명으로 불의와 죄악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 상하좌우의 모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다리를 놓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더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되고, 예전엔 몰랐던 많은 숨겨진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간다. 성공회 대주교의 글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모범답안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것 또한 만남의 축복이라 믿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운다는 것은 어느 정상에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만해지지 않기 위함이다. 세상엔 정말 탐험할 것이 많아 교만해진다는 건 곧 옹색함이요 게으름이며, 용기 없음일지도 모른다. 조만간 성공회 교회를 찾아 예배에 직접 참석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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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설(creationism) 논쟁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

 

창조설(creationism) 논쟁을 넘어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으로

 

김정형 (장로회신학대학교)

 

 

한국교회의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은 창조론(the doctrine of creation)을 창조설(creationism)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창조 세계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주장으로서 창조설은 창조자 하나님에 관한 교리로서 창조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이다. 영어의 ‘creationism’을 ‘창조론’으로 번역하면서 오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creationism’을 ‘창조론’ 대신 ‘창조설’로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창조론’이란 용어는 창조자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미 아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는 한국교회의 창조 신앙이 다양한 창조설 사이의 논쟁을 넘어 성서와 기독교 전통의 창조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창조설은 창조자 하나님의 성품이나 계획보다 창조 세계의 기원과 역사와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창조 신앙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사상사 속에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창조설이 존재했다.

 

• 평평한 지구 창조설 (flat earth creationism)

  • 지구 중심 창조설 (geocentric creationism)

    • 젊은 지구 창조설 (young-earth creationism)

      • 간극 창조설 (gap creationism)

        • 날-시대 창조설 (day-age creationism)

          • 점진적 창조설 (progressive creationism)

            • 진화적 창조설 (evolutionary creationism)

 

이 스펙트럼에서 위로 갈수록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에 더 충실하고, 아래로 갈수록 현대 과학 이론에 더 수용적이다. 한편 이 스펙트럼 상의 다양한 창조설 입장은 모두 창조자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지만, 창조론의 핵심 내용에 해당하는 창조자 하나님의 성품이나 계획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다만 창조 세계의 기원과 역사와 모습에 관해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말하자면, 다양한 창조설 사이의 논쟁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창조론의 핵심 진리를 비껴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창조설 논쟁을 넘어서 성서와 기독교 전통의 창조론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창조 세계의 기원과 역사와 모습에 관한 한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신 아버지, 유일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과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자’(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대한 보편교회의 신앙고백에 동참하고 있다.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이 신앙고백은 세상과 인간의 궁극적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을 뿐 아니라, 세상과 인간의 궁극적 운명 역시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온 세상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다. 이것이 참된 의미에서 기독교 창조 신앙의 핵심 진리이며, 신학적 의미에서 참된 창조론의 중심 내용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궁극적 기원이 되시며 궁극적 운명이 되신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우주와 인간의 시간적 기원을 추적하는 역사적 · 과학적 연구와 상당히 다른 차원에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과 땅에서 펼쳐지는 우주와 생명의 역사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서로 차원이 다른 두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다니엘 밀리오리(Daniel L. Migliore)의 다음 진술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기간과 단계와 과정에 대해 우리의 과거의 가정이 아무리 광범위하게 수정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중심적 주장에는 본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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