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수원남부 북클럽]






| 오세조 (수원남부 북클럽 회원)



비가 온 다음날인지 조금은 춥기도 하고 조금은 세상이 깨끗해진 느낌이 드는 오늘, 오리진을 함께 읽기 위해 모임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잠시 후 약속시간이 되자, 회원분들이 한 두 분씩 도착했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오늘 발제를 맡으신 정훈재님이 발제를 시작했다.

참고로 오늘이 수원남부 북클럽 모임에서 가장 많이 모인 날인 것 같다. 특별히 오늘 처음 합류하신 박상용 전도사님은 올해 성공회대를 졸업하시고 이제 부제서품을 기다리시는 분이신데 오스트리아에서 신학석사를 마치신 분이시다.

또한 오늘 발제를 맡아주신 정훈재님께서는 분당/판교 북클럽에서 활동하시는 회원분이신데 분당/판교 북클럽에서도 마침 ‘오리진’으로 진행을 해서 오늘은 특별강사로 초빙을 한 것이다.

오늘 함께 읽어야 발제부분은 오리진 1-6장까지로 1-2장, 3-4장, 5-6장까지 2장씩 발제를 한 후, 질문 및 토의시간을 함께 했다. 개인적으로는 함께 한 어린 학생분들이 발제내용을 잘 이해할까 걱정했는데...

이런, 이런.. 내가 학생회원분들이 어리다고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질문도 하는 것이다.

발제가 끝난 후에, 김남수님은 오늘 학생들에게서 오랜만에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셨다고 하셨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초롱초롱한 눈빛이 앞으로 수원남부 북클럽만의 매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발제와 토론이 다 끝난 후에 회원분들의 각자 스케줄때문에 점심식사는 하지 못하고 다음 일정과 몇 가지만을 토의한 후 다음 만남을 소망하며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잠시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으시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분을 기독교 교리에 가두는 것은 아닌가?

또한 나이는 어리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 학생들이 소위 목회자라는 나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느끼고 있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이래서 어린아이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까?

다음 번 책인 이정모 관장님의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의 발제날이 더욱 더 기다려지는 것은 아마도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진 어린 회원님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 3월 18일에 진행된 제13회 과신대 콜로퀴움은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이용주 교수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1시간 정도의 강의가 끝나고 2부 대담 시간에는 우종학 교수님의 사회로 이용주 교수님과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최승언 교수님께서 패널로 참여해 주셨습니다. 2부 대담 시간에 나왔던 이야기를 손이 가는대로 적어봤습니다. (역시 콜로퀴움의 하이라이트는 대담시간인 것 같습니다.)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면 좋겠지만 강의를 들으며 필기한 내용이라 부정확한 부분도 많고 생략도 많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대담 정리: 최경환 실장



최승언: 판네베르크만큼 현대 과학을 잘 사용한 신학자가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판넨베르크가 복잡계 과학을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더 풍성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종학: 판네베르크가 우발성과 자연법칙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용주: 우발성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필연성도 아닙니다. 판넨베르크는 신플라톤주의의 필연성에 강력히 반대합니다. 신이 왜 세상을 창조했느냐? 창조신앙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신은 이 세계와 인간이 신을 섬기기 위해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이 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 과학에서는 우발성이 어떤 의미인가요?


: 우리는 우연을 상당히 맹목적이고 무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천문학자들은 spontaneou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이 상당히 신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자연의 법칙들이 상당히 규칙적인 것 같지만, 하나 하나의 개체들은 상당히 우발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자연현상을 우리가 보기에 우연과 법칙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 둘이 서로 작용하고, 이 둘을 매개하는 그 무엇이 있을 때, 새로운 것을 발현시킵니다.



: 기독교의 창조론은 유일신론과 다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은 법칙성, 영은 우발성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부분도 한 번 더 설명해 주시죠.


: 아들은 서로 다른 것들이 규칙성 가운데 작용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영원한 아들을 로고스라고 말합니다. 로고스는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철학적 매개를 사용해서 설명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영의 개념도 스토아 철학을 차용합니다.


: 판넨베르크는 영을 장 이론을 통해 설명한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 가시적으로 보이는 물체의 비가시적 근원, 유한한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장처럼 활동하는 영,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유비적인 관계를 설명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에 기초해서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안 받을 수 없습니다.


판넨베르크의 과제이기도 한데, 그는 세상의 혼동과 무질서를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태초에 근원적 혼돈에 대해서 알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일원론을 강조하기 위해 무로부터의 창조를 형성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이 전통을 따라갑니다.


신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판넨베르크는 열심히 노력합니다. top-down 방식을 취하지만 과학적인 실재와 공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판넨베르크는 기본적으로 자연의 법칙성을 강조합니다. 우발성은 법칙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을 배타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초월성이라는 것은 설명될 수 없는 뭔가 신기한 것, 법칙성과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은 법칙성과 우발성 가운데 계신다면, 하나님의 내재성이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은 이미 일어난 사건에서 이미 일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초월성은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라,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 자연현상 가운데도 우연성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우리는 영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파악되지 못하기 때문에 희미하게 볼 뿐이죠. 영이신 하나님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사랑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알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우리와 관계맺고 일하고 계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기 초월의 근원입니다. 초월을 공간적으로나 무관계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지만, 스스로 공간과 시간 안에 들어오시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초월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초월이죠.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지난 월요일에는 과신대 콜로퀴움을 잘 마쳤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독일의 조직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과 창조론을 소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려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고 온라인으로도 많은 분들이 시청해 주셨습니다. 2부 대담 시간에 우종학 교수님께서 작성하신 질문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 보시죠~



1. 우발성과 자연법칙 -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은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가?


판넨베르크는 신의 자유와 신의 사랑, 두 개의 키워드를 사용해서 창조를 표현합니다. 우주는 반드시 존재해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신이 자신의 내적 필요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창조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즉, 우주의 존재는 우발적이고 우연적입니다. 이것은 신의 자유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된 우주가 단지 신이 자기실현을 위해서 소모적으로 사용하고 버리는 소멸적 특성만 갖는 것도 아닙니다. 만물이 존재하도록 붙들고, 창조된 모든 것이 그 완성된 형태로 나가도록 하는 신의 행위는 바로 사랑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혹은 우발성과 우연성을 제거하여 기계적으로 명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피조물들이 고유한 완성의 형태로 나가도록 보존하고 협력하고 돕는 사랑입니다.


보존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만들어진 창조물의 본성을 잃지 않도록 돕는, 시간의 방향으로 따지자면 과거가 기준이 되는 사랑이고, 섭리는 피조물들이 완성되도록 돕는 미래적 목표를 위한 사랑입니다.



2. 자연법칙과 틈새 찾기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관점은?


"자연 사건들의 우발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규칙성들의 한계를 숙고하면서, 문제를 자연 사건들의 규칙성의 틈새를 찾으려는 방향으로 몰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의 신학은 이 자연 사건들의 틈새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유혹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은 자연 과정들 속에 담지된 그 틈새들을 메우고 있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세계는 그 자체로 자동적인 것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은 전체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런 틈새들은 자연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언제나 다시금 메워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를 들어 비유기적 과정들로부터 생명이 기원한다는 사실이 물리학적으로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 그런 주장이 미래에도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기본적으로 물리학이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각 새로운 연구 결과가 제시되면, 또한 그에 따른 새로운 문제들이 야기될 것이라는 것뿐이다."


판넨베르크가 틈새의 신 방식의 접근을 비판하는 관점이 흥미롭군요. 심지어 무생물에서 생물이 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도 무게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과학이 새로운 발견을 하면 새로운 신학적 문제가 대두되겠지요. 생명의 출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란 얘깁니다.



3. 진화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관점은? - 우발성은 이신론적, 기계론적 신관을 오히려 깨트려 주었다.


"다윈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신학과 자연과학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가장 심각한 오류에 속한다.…신학은 (모든 종이 세계의 시작 이래로 변하지 않는다는) 불변이론의 세계관적 전제에 갇혀있었고 인간에 대한 관념론적 과대평가를 통해 눈이 흐릿해져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학에 경고음을 일으킨 것은 다윈의 종의기원설이 일으킨 의문, 곧 창조 속에서 인간이 갖는 특별한 지위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의문이란 바로 신의 목적을 설정하는 목적론적 자연관이 유전과 자연선택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의 우연성에 대한 강조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런 의문을 품게 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유전과 자연선택의 상호작용은 유기체적 생명의 출현이 갖는 목적적합성을 설명해주었다. 목적적합성의 설명은 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에 따르면 오로지 계획하는 이성을 가정할 때만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렇기에 자연선택설은 친구들과 적들 모두에게 유신론적 하나님 표상에 대한 반박으로 보였다. 양측 모두에게 진화의 자연선택설은 종들의 생성에 대해 원칙적으로 단지 기계론적인 설명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이 간과된 것입니다.


"알트너가 지적했던 것처럼 진화의 새로운 세계상은 창조 사건의 역동성을 시간 안에서 열려 있는 과정으로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기계론적인 자연관은 하나님을 기껏해야 이신론적으로 보아 과거 한때의 자연질서의 창시자로 받아들이도록 했고, 자연사건 과정 속에서 계속 창조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진화는 이런 기계론적인 자연관과 이신론적인 신관을 깨트리게 해 주었다는 것이지요.



4. 장이론 - 과학과 신학의 결합인가? 차용인가?


판넨베르크의 입장이 창조과학식으로 물리학과 신학을 직접적으로 결합하려는 건 아닌가? 자연과학과 대화하려는 판넨베르크의 접근이 성령의 내재적 역사를 장이라는 물리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인지, 혹은 과학적 설명과 신학적 설명 사이에 일정 정도 선을 긋고 장과 같은 물리학적 개념을 차용하여 성령의 일하심을 유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불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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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분당/판교 북클럽]






| 강사은 (분당/판교 북클럽 회원)



클레어는 종군 간호사 출신의 당찬 잉글랜드 여성입니다. 우연히 2백년 전 스코틀랜드로 가게 되면서 일어난 일을 짜임새 있게 잘 엮은 미드 '아웃랜더'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여러 복잡한 상황 속에서 2백년 앞선 역사 지식, 의학 지식, 과학 지식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클레어가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다름아닌 '마녀'입니다.


이런 상황이 21세기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과학을 현대판 마녀로 정죄하거나 과학의 이름으로 신앙을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솔직히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신앙 보다는 과학이 더 신뢰할 만한 무엇이긴 합니다. 교회 설교 중에도 자주 듣지 않습니까? '과학적으로' 라는 말이죠. 사회 생활을 하면서 배경이 다른 지인들과 대화할 때 '성경에 쓰여 있기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보다는 '과학적으로' 라는 말이 더 잘 먹히는 세상이죠. 이왕이면 수치도 기억하면 멋있기까지 합니다. 바꿔 말하면 과학은 날마다 새로와지는데 신앙의 언어는 너무나 old해져 있습니다. 첫 독자들이 마주한 창세기는 그렇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18세기에 떨어진 클레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리진'(IVP) 1장~6장의 내용을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녀 재판도 없을테고 클레어의 선한 의지 그대로 잘 받아들여졌을 텐데요. 오리진 전반부는 앞으로 200년이 지난 뒤에도 유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과학의 '관계'는 어떠한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과학도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도 이 책의 설명을 넘어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학을 공부하는 중고등 자녀에게도 과학과 신앙의 조화로운 관계 설정을 위한 기본 소양 도서로 권하고 싶군요.


'오리진'(IVP)은 과학과 신학의 대화 기초를 다지기에 좋은 책입니다. 앞으로 2회 더 이 책으로 토론할 분당/판교 북클럽에 참가하실 분들을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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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광주 북클럽]






| 김재호 (광주 북클럽지기)



오늘(39)에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 '광주 북클럽' 첫모임이 있었습니다.

 

첫 회원으로 5명의 회원이 모여 무크따 1~2장을 함께 읽으며 첫 이야기를 열었는데요, 모임에는 과학자 출신의 교사, 의사선생님, 수영선생님, 무명관 관장님, IT계열 회사원(비기독교인)으로 다양한 영역의 회원들이 모인 덕에 즐겁고 흥미로운 독서모임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비기독교인이면서도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깊은 흥미를 갖고 참여하신 회원님의 비판적 견해가 창조과학에 기초한 신앙이 얼마나 객관적인 논리와 지지를 얻을 수 있겠는지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교재는 우종학 교수님의 무크따 1~2장이었으며, 함께 읽고 주제별 논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시작과 함께 모임을 강타했던 주제는 과학을 품지 못한 기독교에 대한 일반인의 선입견이었습니다. 실제로 회원들이 일상 속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기독교가 얼마나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져왔는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과학적 사실들을 부정하는 태도를 갖고 있을 것 같았다'는 일반인들의 선입견과 '진화론에 대한 맹목적 거부감 표출'로 대변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 등의 경험담은 본 모임이 왜 의미있는지에 대한 반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어서, 진화이론과 진화주의를 구분하여 이해하려는 관점, 갈릴레오 재판에 대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형이상학적 관점과 과학을 엮어본 진화창조론 등의 이야기들은 회원들에게 일종의 신앙적 해방감 같은 느낌을 안겨주기도 하였습니다.

 

특히나 기독교인이면서도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등 진화에 관한 도서들에 큰 흥미를 느끼던 모습에 불편감을 느꼈던 기억들에 대한 해소의 시간이었습니다.

 

광주지역에서도 관신대 북클럽을 통해 기독교계에서 창조와 과학에 대한 자유롭고 폭넓은 대화 문화가 자리잡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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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제주 북클럽]




제주 북클럽은 제주대학교 팽동국 교수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매주 멋진 카페에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북클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성공회대학교 김기석 교수님이 쓰신 

<신학자의 과학 산책>을 읽었고

다음 모임부터는 새로운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제주에 계신 분들은 꼭 참석해 보세요.



일시: 2019년 3월 8일 금요일 저녁 8시 반

장소: 에스프레소 라운지 (제주시 한라대학로 1, 712-5151)

내용: 김기석 저 <신학자의 과학산책> 4부와 5부


문의: paeng@jejunu.ac.kr (팽동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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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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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



과신대의 소식을 전하는

과신대 VIEW - 22호

과신대와 함께하는 분들을
인터뷰로 만나보는


 " 과신대 사람들 " 

(17)
이정모 관장

서울시립과학관 관장
저는 과학계에서도 대학에서 나와 밖에서 활동하고, 신학교나 교회에서도 밖으로 나온 신학자가 필요하다고 봐요. 대학이나 교회라는 플랫폼이 이제는 옛날 플랫폼이에요. 누군가는 새롭게 도전할 필요가 있어요. 플랫폼은 계속 바뀝니다. 우리가 그 플랫폼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대학과 교회는 비용만 많이 들고 소통도 잘 안되고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플랫폼입니다. 새로운 플랫폼이 뭔지는 모르지만 계속 고민을 해야죠. 연습하고 적용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야죠.  (더보기)
보통 하나님의 영원을 시간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전통적인 신학에서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면 종말 때의 하나님은 시간을 파괴하는 존재로 나타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어거스틴, 바르트 등의 생각을 수용해가면서 하나님의 영원을 시간에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것 자체가 영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라는 지적이 나왔어요. 그보다는 하나님의 영원은 영원한 하나님의 현재(presence)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죠. 즉,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하신다는 것이에요. 과거 안에도 현재로 계시고, 현재에도 현재로 계시고, 미래에도 현재로 계시는, 영원히 현재하시는 분인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시간 양태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고, 시간과 공간의 반대자가 아니라, 시공간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더보기)
과신대와 함께하는 분들을
인터뷰로 만나보는


 " 과신대 사람들 " 

(18)
이용주 교수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과신Q]
매월 우종학 교수님께서 과학과 신학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씩 골라
[과신Q]라는 제목으로 연재해주십니다.
교회에서 혹은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다면,
[과신Q]를 주목해 주세요.


(3)
창세기는 왜 쓰였을까요?


(글보기)

[Coming Soon]

Coming Soon!
[13회 콜로퀴움]
판넨베르크가 들려주는 창조이야기


2019.3.18 (월) 저녁 7:30 /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판넨베르크는 현대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법칙과 원리들, 곧 진화론, 열역학 제2법칙, 인간원리, 상대성이론, 나아가 양자역학에 이르는 과학 이론을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 안으로 통합합니다. 이용주 교수님으로부터 현대 자연과학의 중심 내용을 포괄할 수 있는 판넨베르크의 창조론을 들어 봅니다.   (더보기)

Coming Soon!
[14회 콜로퀴움] 합성생물학과 유전자 가위

2019.4.29 (월) 저녁 7:30 /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꽃피는_봄에는
#과신대_콜로퀴움
#3월_판넨베르크의창조론_이용주
#4월_합성생물학과유전자가위_송기원

Coming Soon!
[북클럽] 광주에서 새로운 북클럽 모임을 시작합니다!

드.디.어. 광주에서도 과신대 북클럽이~^^

과신대 북클럽 광주모임을 시작해보려합니다. 첫모임 교재는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입니다. 바른 창조신앙의 관점을 기르기 위한 과학과 신학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많은 신앙인들을 초대합니다. 누구든지 참여 가능합니다. (더보기)

** 일시: 3월 9일(토) 6시30분
** 북클럽 참여는 과신대 사무국으로 문의해주세요.

Coming Soon!
[북클럽] 구로에서 새로운 북클럽 모임을 시작합니다!

과신대 북클럽 모임이 확대되어 이제는 청소년 북클럽 모임까지 생겼습니다. 과학과 신앙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청소년들이 편하게 참석해서 맘껏 이야기 나누는 시간으로 준비했습니다.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실컷 이야기해 보아요~ (더보기)

** 일시: 3월 8일(금) 저녁 7시
** 북클럽 참여는 과신대 사무국으로 문의해주세요.


[과학자의 읽기]

김영웅 박사님의 서평을 연재합니다.
과학자가 읽은 신학책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일상의 조각을 찾아서

주목할 만한 일상 | 프레드릭 뷰크너 | 비아토르 | 2018

(글보기)


[과신대 이야기 - Story]
제 1회 과신대 청소년캠프 후기

과신대 청소년 캠프를 다녀와서 (안겸비, 거창고등학교 2학년)

2월 9일, 하루 동안 진행된 과신대 청소년 캠프에서 나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과학과 신학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준비된 강의와 체험을 통해 과학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어 값진 경험이었다. ... 만약 과학과 신학 사이의 벽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그 고민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고 싶다면 나는 과신대 청소년 캠프를 추천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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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Talk "부모와 자녀가 함께 듣는 공룡이야기" 후기

그동안 몇마리의 공룡을 드셨나요? (심기주, 과신대 기자단)
 

오늘 프로그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역시 과학의 태도였던 것 같습니다. 강의 후 질문 시간에 나왔던 내용인데요~ 과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지금까지 가장 합리적인 거라는 것! 아직 티라노 같은 공룡이 사람과 함께 살았거나 뱃속에서 발견되었거나 하는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죠. 그런데 '만약 그런 것이 발견되면 얼마든지 기존의 이론을 버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과학자들은 되어있다!'는 것을 이 관장님이 말씀해주셨어요. 과학은 "의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 신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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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Talk "창세기와 복음의 공공성" 후기


과신톡 안내지를 만들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6학년 아들이 질문했습니다. "아빠, 공공성이 뭐야?" 자녀를 키우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이의 돌발 질문에는 0.5초 안에 3초 내의 짧은 문장으로 대답하는 순발력이 필요합니다. 순간 등에 식은 땀이 흘렀지만 아마 이렇게 답한 것 같습니다.
"서로 어떻게 도울까 하는거지. 특히 약하고 어려운 사회적 소수자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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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Book Story - 신간 & 서평 소개]
데이비스 영, 랠프 스티얼리 <성경, 바위, 시간> (IVP, 2019)

서평 | 박종범

특별히 나는 이번 신간 속 보수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두 저자, ‘데이비스 영’과 ‘랠프 스티얼리’ 박사가 진실한 신앙 위에서 창조를 위한 지구 연대 논쟁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이후 논의될 내용을 제하더라도, “보수적인 신앙이 곧 창조과학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이지만 신학적 편견에 의해 쉽게 무시되던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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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소식 - Book Club]



과신대와 뜻을 함께 할 협력교회를 모집합니다. 

과신대는 과학주의 무신론이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복음의 변증과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위해 건강한 창조신학을 교육하고 연구합니다. 

과신대의 비전과 사역을 지지한다면 과신대와 함께하는 교회로 동참해 주세요. 

과신대는 앞으로도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기독교 교육 컨텐츠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보급하기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지지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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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비전>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일반계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단체입니다.

과학과 신학의 균형 잡힌 대화를 목표로 2가지 비전을 갖습니다.        

1
-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과학의 결과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의 내용을
함께 읽어가며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연구합니다.
이를 위해 과학 및 일반학문과 신학의 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2
-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바르게 배우도록 한국교회에 균형 있는
교육을 제공하며 이를 위해 목회자들과 함께 노력합니다.

<자문위원>

  강상훈 교수 | 베일러대학교 생물학
  권영준 교수 | 연세대학교 물리학
  김근주 교수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김기석 교수 | 성공회대학교 총장
  김기현 목사 | 로고스서원 대표
  김요한 목사 | 새물결플러스 대표
  김익환 교수 |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
  박근한 교수 | 유타대학교 기계공학부
  박영식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일준 교수 |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박치욱 교수 | 퍼듀대학교 약학대학
  박화경 교수 | 한일장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박희주 교수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신은철 교수 | 카이스트 경영공학부
  신희성 교수 | 인하대학교 수학과
  윤철호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이길연 교수 | 경희대학교 의대, 외과과장
  이문원 교수 | 강원대학교 과학교육학부 명예교수
  이상희 교수 | 캘리포니아대학교 인류학과
  이정모 관장 | 서울시립과학관
  이택환 목사 | 그소망교회
  임범진 교수 | 연세대학교 의대, 병리학교실
  정대권 교수 | 항공대학교 항공전자정보공학
  조성호 교수 | 서울신학대학교 신학
  최승언 교수 |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학
  팽동국 교수 | 제주대 해양시스템공학
  허  균 교수 | 아주대 의과대학 신경과
  현요한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운영위원>

  우종학 | 대표

  장현일 | 총무이사
  정대경 | 연구팀장
  윤세진 | 교육팀장
  백우인 | 출판팀장
  강사은 | 북클럽팀장
  심왕찬 | 미디어팀장

  구형규 | 감사
  김성래 | 감사

  최경환 |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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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진드기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
과학주의 시대의 무신론과 기독교

왕식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최근 과학적 무신론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오늘날 장안에서 조금 팔린다 하는 책들은 대부분 종교에 비판적이며, 특히 자연과학과 관련된 저작들은 다수가 종교에 적대적입니다. 이에 따라 최근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무신론, 유물론, 세속주의 등이 당연하게 선택되어야만 할 옵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에 기초한 윤리와 도덕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현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생성과 변화의 철학들이 유행하게 되면서, 고정된 실체나 그것에 근거한 진리가 모두 와해된 것에 있기도 합니다. 자아, 질서, 주체를 포함해, 신(God) 등의 개념들이 생성 변화라는 큰 바다에서 모두 용해되어 버렸다고 현대인들은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생성과 변화의 철학의 배경에는 바로 자연과학이 새롭게 발견한 탄탄한 이론들의 뒷받침이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전혀 과학적 무신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은 그 무게와 비중에 있어 과거에 발견되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파괴력이 막강합니다. 종교적 지식인과 신학자들이 대응하기에는 그 파급력과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과연 이런 과학적 무신론의 대세를 넘어서 종교가 미래에도 생존할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우려합니다. 정말 종교는 과학의 시대를 넘어서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기 위해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는 첨예한 지점 중 하나인 경험적 지식에 대한 얘기를 다뤄볼까 합니다.

잘 알다시피, 과학은 경험 세계를 다루기에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는 반면 종교는 초경험 세계를 다루기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허구의 지식을 제공한다고 지적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경험 세계만이 확실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루는 대상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입증할 수도 없고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이 과학의 편을 들고 점점 무신론적 경향으로 흐르는 이유에는 경험 세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과학적 발견들과 성과들, 특히 뇌 과학으로 대변되는 과학적 유물론과 환원주의는 오늘날 신(God)이나 영혼, 영성 등과 같은 종교적 개념들을 도저히 긍정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데, 이도 바로 뇌 과학에서 보여주는 경험적 세계가 가장 진실한 세계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 세계란 도대체 어떤 세계이며, 과학과 종교는 이와 관련해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를 살펴보는 것부터 시도해야 합니다. 20세기 말 최고의 철학자라 칭송을 받는 들뢰즈는 인간의 경험 세계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진드기 얘기를 사용하면서 인간과 진드기를 비교한 바 있는데, 그 사례를 인용하면서 논의를 풀어가 봅시다.

들뢰즈에 따르면, 진드기에게는 세상이 세 개의 요소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단지 세 가지로 경험됩니다. 진드기에게 첫째로 경험되는 세계는 빛이며, 두 번째는 포유류의 냄새이며, 세 번째는 포유류의 체온입니다. 포유류의 피를 먹어야 생존하는 진드기는 이 세 개의 세계만이 그의 삶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기에, 그가 가진 몸의 구조는 바로 이 세 개의 대상을 다루기 위한 촉수를 발전시키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빛을 따라 나뭇가지 위로 오르고, 나무 위에 하루 종일 있다가 포유류의 냄새를 맡는 순간 나뭇가지 밑으로 내려와 지나가던 동물 위로 낙하합니다. 마지막으로 해당 동물의 피부 중에서 털이 없고 열이 더 높은 부위를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곳에 피가 많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포유류의 체온이 진드기에게 경험되는 또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드기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는 바로 이 세 개가 전부입니다. 그에겐 하늘의 별도, 꽃의 향기와 꿀을 비롯해 그 어떤 세계도 필요 없고 그의 경험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진드기에 비해 인간은 물론 훨씬 다양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보다 복잡하고 폭넓은 세계로 전개됩니다. 진드기에게는 하늘의 별과 꽃의 아름다움이 대상 세계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중요한 세계가 됩니다. 인간에게는 진드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촉수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진드기를 포함해 다른 그 어떤 생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를 폭넓고 깊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세계가 그저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세계는 우주가 됩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세계가 우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 우리의 논의를 인간 내의 그룹 안으로 들여와 봅시다.



인간의 그룹 중에서 자연 과학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세계는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과학자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보통 인간들이 경험하는 세계 보다 훨씬 다양하고 구체적입니다. 특히 관찰과 실험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만을 참으로 옳다고 믿는 과학자들의 세계는 일부 종교인들의 세계보다는 훨씬 생산적일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 과학자들은 종교인들의 세계 경험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종교인들은 근거도 없고 어쩌면 전혀 존재하지도 않을지 모르는 ‘신,’ ‘영혼,’ ‘정신,’ ‘자유’ 등의 허구적인 개념을 믿으면서 삶을 허송하고 있다고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드기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의 존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넓이는 하나의 존재가 지닌 촉수에 비례합니다. 하나의 존재가 경험하는 세 개는 그의 촉수의 개수, 딱 그만큼입니다. 과학자는 관찰과 실험이라는 촉수를 통해서 그 어떤 다른 인간의 그룹보다 폭넓고 다양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의 촉수로서의 관찰과 실험이 가져다주는 세계, 바로 그만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너무 한정되어 있어서 그가 경험하는 세계가 과연 우주의 진리에 어느 만큼이나 가까이 갈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드기의 비유를 사용한 것은 과학이 다룬 다는 경험 세계의 실상에 대해 얘기하고 그것과 종교의 세계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자가 다루는 세계와 종교가 다루는 세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러 방식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저는 여기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연과학자의 하나로 손꼽히는 아인슈타인의 명구를 사용해 이 문제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종교 없는 과학이 절름발이라면,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학문적 추세가 종교 쪽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런 추세는 뇌 과학의 발달에서 촉진된 면이 많습니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들은 모든 종교 현상들이 뇌신경의 작용으로 낱낱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뇌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대로 과학과 종교는 세계를 경험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식이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 둘은 서로를 보조하며 함께 문명을 건설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과학과 종교 양자는 모두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에서 한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드기가 경험하는 세계의 비유에서 보듯이, 뇌 과학이든 그것보다 더욱 정확한 실험과 관찰에 기초한 과학이든 그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분에 한정될 뿐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지각은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구축한 믿음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은 자신이 지닌 개인적, 사회적 틀이라는 촉수를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로 인해서 뇌신경 안에서 처리되는 모든 과정의 각 단계마다 발생하는 수많은 감정, 지각 그리고 인지된 내용이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과학도 또 하나의 믿음과 신앙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 이상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과학이 경험하는 세계는 종교보다는 때로는 더욱 정교하고 구체적인 진리의 세계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다루는 세계가 제한적이라는 것은 과학마저도 독단의 수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많은 과학자들은 진리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고의 과학자 중의 하나인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말하고, 최고의 수학자 중의 하나인 괴델이 불완전성의 원리를 외친 것은 바로 이런 것과 연관된다고 보겠습니다.

과학적 무신론의 세계란 분명히 인류가 발견한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세계 안에서 인간이 경험한 지극히 제한된 경험에 불과합니다. 물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세계도 인류가 발견한 몇 가지 세계로서 우주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발견하지 못한 우주의 중요한 면을 해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과학의 동반자입니다.

문제는 과학은 변하고 발전하는데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는 멈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은 종교의 진정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종교가 단지 과학이 보지 못하는 진리의 세계의 촉수를 가지고 있다는 자만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면서, 지금처럼 스스로를 변혁시키는 일에 게으르게 되면 종교는 어느 날 인류에게 그저 하나의 시시한 관점, “별 볼 일 없는 미약한 관점”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오늘과 같이 빠르게 진화하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스스로를 변혁해 나가야만 하는 이유라 할 것입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드.디.어. 광주에서도 과신대 북클럽이~^^

과신대 북클럽 광주모임을 시작해보려합니다. 첫모임 교재는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입니다. 바른 창조신앙의 관점을 기르기 위한 과학과 신학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많은 신앙인들을 초대합니다. 누구든지 참여 가능합니다.


📌 일시: 3월 9일(토) 6시30분
📌 장소: 광주광역시 북구 서하로 245번길 42, 2F
📌 교재: 우종학,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IVP
📌 북클럽지기: 김재호 선생님



과신대 북클럽 모임이 확대되어 이제는 청소년 북클럽 모임까지 생겼습니다. 과학과 신앙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청소년들이 편하게 참석해서 맘껏 이야기 나누는 시간으로 준비했습니다.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실컷 이야기해 보아요~


👉  일시: 3월 8일(금) 저녁 7시
👉 장소: 서울시 구로구 디지털로271 디지털밸리 3차 604호
👉교재: 우종학,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새물결플러스
👉북클럽지기: 백우인 선생님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과신대 청소년 캠프를 다녀와서 


안겸비 (거창고등학교 2학년)


‘학교에선 진화를 가르치고, 교회에선 창조를 가르친다.’ 언뜻 보기에는 너무도 당연한 상황이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과학을 배울수록 나의 이 ‘당연한’ 생각은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물음이 생겼다. “과학과 신학은 아예 다른 것일까?”

그러던 중, ‘과학과 신학과의 대화’라는 단체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캠프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과학과 신학과의 관계에 대한 나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다.



캠프는 총 3교시에 걸쳐 진행되었고, 강의뿐 아니라 다양한 체험도 준비되어 있었다.

1교시에는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의 재판을 재구성한 글을 바탕으로, 검사 측과 변호인 측 최후의 변론 및 판결문을 작성하는 활동을 하였다. 각색된 재판의 내용을 보면서, 지금까지는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였다’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지, ‘왜 교회 측에서 갈릴레오의 주장을 반대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회 측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인간이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이 사는 곳, 즉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그렇기에 지구가 중심이 아님을 주장하는 지동설은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성서란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평범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비유와 상징 등을 사용해 쓰인 것이므로,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해가 잘 안되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었고, 더불어 성서의 진정한 해석은 문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2교시에는 ‘화석’의 분석을 통해 과학의 특징을 알아가고, 직접 손가락 화석도 만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강의를 들으며 학자들은 화석을 통해 생명체의 역사를 밝히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과학은 경험적 자료를 바탕으로 탐구하며, 경험적 연구가 불가능한 초자연적 현상은 다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초자연적 현상은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진화를 통해 신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라는 문장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과학의 원론적인 내용을 깊이 탐구해 볼 수 있었다.

3교시에는 ‘인류의 뿌리를 탐구해보자’라는 주제 하에 창조와 진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직접 생물의 계통수를 그려보는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 나는 내가 품어왔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진화라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강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인데, 이를 통해 과학과 신학은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 관계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진화, 진화론, 진화주의 세 가지 용어의 차이점을 배우며 진화는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오개념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과학과 신학은 보완적 관계이다’



2월 9일, 하루 동안 진행된 과신대 청소년 캠프에서 나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과학과 신학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준비된 강의와 체험을 통해 과학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어 값진 경험이었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은, 캠프 참가자 학년이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하게 있었던 반면에, 전반적인 프로그램은 고등학생 이상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캠프의 집중도가 다소 떨어졌던 것이다. 앞으로 참가자의 이해도를 고려한 프로그램과 조 편성이 이뤄진다면 훨씬 더 좋은 캠프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바이다!

만약 과학과 신학 사이의 벽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그 고민에 대한 올바른 답을 찾고 싶다면 나는 과신대 청소년 캠프를 추천하고 싶다. :)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