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원역사 논쟁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는 사랑과 연합의 과정

 

제임스 K. 호프마이어 외 2인 | 창세기 원역사 논쟁: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한 세 가지 견해 | 주현규 역 | 새물결플러스 (2020)

 

 

토라의 첫 번째 책이자 정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창세기는 모세 율법의 서론이며, 성경 나머지 부분에 나오는 구속사의 시작이다. 성경은 창조로부터 타락으로, 타락에서 구속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재창조로 나아가는 네 악장(창조-타락-구속-재창조)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이라고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처음의 두 악장을 간략하게 기술함으로써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기초를 놓아주는 것과 아울러 세 번째 악장을 시작한다. 네 번째 악장은 성경의 마지막 두 장(계 21-22장)의 주제인데, 이 두 장에 창조의 이미지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계 21:1, 5; 22:1-6).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과 조화롭고 놀라운 관계가 재건되게 되는 새로운 시작과 같다.

 

일반적으로 창세기는 신학적 플롯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창조로부터 바벨탑까지(창세기 1-11장), 족장 이야기들(12-36장, 38장), 요셉 이야기(37, 39-50장). 창세기 1장과 2장의 주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있으며, 또한 세상을 창조하시되 근동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에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으셨다는 선언을 하셨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창세기 3-11장은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저지르는 죄와 반역을 강조해 주는 이야기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이 급격한 도덕적 타락을 하고 있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죄가 만연되고 증가하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은 자신이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해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3-11장의 다섯 개 이야기는 타락, 가인, 네피림, 홍수, 바벨탑 이야기이고 각 이야기는 죄-(심판의) 말씀-완화(은혜)-심판이라는 문학적 구조를 통해 첫째, 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강화된다 둘째, 죄에 대한 심판도 역시 증가한다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창조는 이후에 오는 모든 것들의 기초이다. 에덴 동산은 과거에 자신들의 죄 때문에 잃어버린 모든 것들, 그리고 현재 그들이 갈망하는 모든 것들을 상징한다. 타락에 대한 이야기(창 3장)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기록할 뿐만 아니라 심판의 완화, 즉 구원의 복음에 대한 최초의 선포로서의 원시복음(창 3:14-15)을 제시되고 있다. 타락 기록은 구속사의 시작점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거의 모든 내용과 관련이 있다. 창조의 기록은 특히 계시록 21-22장에서 그 메아리를 찾아볼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에덴 동산의 많은 요소들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종말이 최초의 창조의 회복을 내포하고 있다는 신앙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 또 바벨탑 이야기는 오순절 날 방언(외국어)을 말하는 은사가 내린 것에 대한 신약의 기록에 비추어서 흥미롭게 이해될 수도 있다.

 

 

창세기가 처음 기록된 때와 오늘날 우리 사이에는 수천 년의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가 창세기의 저자들과 문화적인 맥락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처럼 어린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고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간됨의 경험을 공유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어떤 일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 고민하기도 한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과 우리는 아주 큰 차이점을 가진 동시에, 삶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들을 함께 공유한다. 이 공유 가능한 경험들을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사용했던 문학적인 장르에 대한 이해로 어느 정도나 바꿀 수 있을까?
그들과 우리가 소유한 지식의 간극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우리 문화에도 창세기 1-11장과 비슷한 장르가 존재할까?
만일 그렇다면, 어떤 장르의 글일까?

또 창세기 1-11장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쓰인 역사인가?
허구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본문 전체를 아우르는 장르에 대한 이해는 개별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연구가 지난 2000여 년 동안 줄곧 진행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이 논쟁적인 문제들을 상세히 탐구하고 성경을 읽는 개인과 성도 모두 이 논쟁의 주된 화제에 주목하여 더 많은 지식을 얻도록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창세기 1-11장의 장르와 역사성 그리고 그에 따른 성경 해석상의 의미에 대하여 제임스 호프마이어, 고든 웬함, 켄톤 스팍스 세 명의 성경학자들이 작성한 짤막한 논문들로 이 책은 구성되어 있다.

 

James K. Hoffmeier

 

먼저 호프마이어는 그의 논문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 내러티브가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들 및 실제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호프마이어는 고대 독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창세기의 지리학적 단서들과 문학적인 요소들, 그리고 역사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여러 특징을 지목하여 설명을 이어간다. 그는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이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 여러 가지 신화를 빌려온 것이 아니라, 그 신화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정반대의 관점으로 기록되었다는 이해를 기초로 하여 성경의 신학적인 담론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즉 이스라엘의 서기관들은 권위가 있고 역사적으로도 정확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당대의 오해들과 신화들을 바로잡으려 했다는 것이다.

 

웬함 역시 호프마이어의 주장에 동의하며 창세기를 원형적인 역사로 믿는다. 그러나 웬함은 “원형적인 역사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 기저에 창세기 1-11장을 전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데 주저하게 만드는 암류(undercurrent)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적인 실재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부분이 창세기 1-11장에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를 통해-마치 인상파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실제로 발생했었던 일들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일축한다. 웬함은 창세기를 과거와 연결된 현재를 위해 역사를 해석해놓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스팍스는 창세기의 저자들은 우리가 생각 하는 것처럼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문 “고대 역사 편찬 문헌으로 이해한 창세기 1-11장”에서 창세기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은 창세기 내러티브가 기술하는 것과 달리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스팍스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역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역사 문헌 편찬을 위해 널리 사용되던 문학적인 양식들을 채택했지만, 특정 장소와 시대에 발생한 사건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려는 목적은 없었다고 간주한다. 다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성품을 가지셨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 성경 저자들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신학적인 이야기들을 차용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성경 전체의 서론을 형성하는 창세기 1-11장이 하나님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 호프마이어는 창세기 1-11장을 역사적인 사건들이 문자 그대로 기록된 역사적인 내러티브로 이해하고, 웬함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창세기 1-11장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스팍스는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공간과 시대에 실제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어떤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기초로 하는 신학적인 담론을 활용해서 말씀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스팍스의 논리에 따르자면,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실제로 발생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문학적으로 뛰어난 예술가들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교훈하신 것과 아주 흡사하다.

 

Gordon Wenham

 

창세기 1-11장이 역사적 기록인지, 아니면 문학적 양식인지에 관한 물음은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자 마음먹은 독자들에게는 무척 골치 아픈 문제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최첨단 과학 시대의 다양한 분야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구 결과물들과, 수천 년 동안 신앙 공동체 형성의 근간이 되어온 성경 상의 담론이 서로 충돌한다는 전제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문학적인 차원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신학적인 문제로 확장된다. 실제로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동일한 교리를 표방하는 신앙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이라고 할지라도, 창세기 1-11장에 대해서 반드시 한 가지의 동일한 이해와 해석만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과 불일치가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없는 일반 성도들을 자칫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걱정스러운 시선도 있지만, 건전한 신앙생활과 신학적 토대는 “토론”과 “논쟁”의 과정을 통해 입증되고 또 더 견고해지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도 세 명의 학자들이 밝힌 이러한 불일치에 대한 논평을 통해 확인된다.

 

성경 본문에 대한 “나”의 이해와 더불어 다른 이들의 의견에도 겸손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지닌다면, 창세기 1-11장의 장르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에 대한 창의적인 해석과 깊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물론, 더욱 건설적이고 유의미한 논의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읽기’ 행위는 대개의 경우 저자를 이해하게 된 것만큼이나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여정도 동반한다. 그것은 ‘보는 것’과 ‘보기 원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인식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성경의 이해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저자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초기 교회 시대에 믿음의 선조들과 같은 방식으로 창세기 1-11장을 읽지 못하고 또한 읽지 않는다. 초기 교회 시절의 성경 해석가들은 창세기 1-11 장이 실제로 역사를 반영했는지, 안 했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성경이 사실이라고만 생각했으며, 성경을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인 패러다임 대신에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범주로 다뤘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독자들이 성경을 과학적인 관점으로 읽으려 한다든지, 장르에 관한 질문을 갖는다든지, 창세기 1-11장에 기록된 원시 역사가 천체 물리학자들과 유전 생물학자들 그리고 고대 근동의 역사를 연구한 역사학자들이 재구성한 역사와 조화를 이루는지 따져본다든지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고대 근동 문헌들이 더 추가적으로 발굴될 것이고 역사적인 연구법과 과학적 지식은 더욱 정교하게 발전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 다른 질문과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할 것이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도 그렇게 계속 바뀌어갈 것이다. 이렇게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을 새로운 통찰력과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다시 탐색하고 재평가하는 과정은 기독교 신앙이 어떤 형태로든지 지성적인 일관성과 설득력을 지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엘리자베스 존슨은 “기독교 신앙이 모든 세대에 호소력 있게 다가가려면 당대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방식들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창세기를 연구하는데 장르와 역사성이라고 하는 주제들은 이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에 속한 많은 이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사안들이다. 그러나 그 사안들이 기독교가 하나됨을 저해하는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다. 이런 주제들이 우리의 연합을 깨트리는 자극제가 되거나, 자애로운 사랑 대신에 갈등과 다툼을 조장하게 해서는 안 된다. 창세기 1-11장과 관련해서 직면하게 되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다른 의견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인내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에 대해 한마음으로 의견을 모으고 함께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어도 자비와 사랑을 확장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창세기 1-11장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실제로 원시 역사 시대에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또한 묘사된 그대로 발생했든지 아니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창세기 1-11장은 궁극적으로 모든 기독교인이 뿌리를 내리고 흠모하며 닮아가고자 염원하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실 초기 교회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에 대해 오늘 우리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상이한 관점과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최우선적으로 조성하고자 하신 것은 자애로운 사랑이지 정확함을 기초로 한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이 더 옳은지에 대한 열망은 자주 그것이 필요한 목적을 잃게 하곤 한다. 창세기의 첫 부분에 대한 현대적 지성의 탐구적 열정은 그것이 진정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알량한 지식으로 대립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닌 꾸준한 한계의 인식과 겸손이 탐구의 방향이며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성경을 읽고 바르게 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은 결국 그리스도 안으로 더 많은 연합을 이끄는 행위이다. 오래 전부터 창세기 1장을 펼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7일이나 걸리셨나는 의문이 있다. 순식간의 찰나에 창조하실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적 지성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7일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담겨있는 스스로 낮추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는 이해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한계이다. 창세기 논쟁은 우리 사이의 인식의 차이를 극복해가는 사랑과 연합의 과정이 되어야 하며, 위대한 예술작품의 압도적 감동을 표현하려는 다양한 시도와 같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

 

박우민 (woomin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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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E=mc²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의 일생

 

데이비드 보더니스 | E=mc² -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방정식의 일생 | 김희봉 역 | 웅진지식하우스(2014)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이나 초중고 학생들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과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1명만 꼽아 보라고 하면, 아마도 아인슈타인이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꽤 높을 것이다. 그만큼 아인슈타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자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고 더불어 그가 제시했던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도 이해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고 있는 유명한 이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E=mc2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발견한 공식이다.

 

이 책은 이 공식을 어떻게 유도하는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E=mc2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들을 이야기하고, 그를 통해서 이 식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하는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구성요소인 에너지(E), 질량(m), 빛의 속도(c), 제곱(2), 등호(=) 등과 관련된 여러 과학자의 연구 과정과 논란, 결론 등을 먼저 설명하고 있다. 이런 기초의 이해를 바탕에 두고 아인슈타인에 의해 E=mc2이 태어난 과정을 설명한다. 특히 4부에서는 이 방정식을 이용하여 원자 폭탄이 만들어진 과정을 2차 세계대전의 긴박한 역사적 사실과 각 과학자들의 입장, 각 나라의 상황 등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게 한다.

 

마지막 5부에서는 이 공식이 우리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더불어 이 방정식의 미래를 우주의 진화 과정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또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했던 블랙홀과의 연관성도 이야기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은 언듯 보면 정확하고, 불변하며, 객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학의 특성 중 하나는 변화 가능성(혹은 과학지식의 잠정성)이다. 물론 아침에 비가 내리다가 점심 때가 되면 날이 개는 것과 같이 수시로 날씨가 변화하는 그런 변화는 아니다. 이것은 많은 과학자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전의 과학적 사실이나 이론 등이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 지식이 변화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도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대한 간략한 한 편의 과학사를 볼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원자에 대한 개념의 변화나 빛의 성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과학자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고뇌하고, 갈등하면서 선택을 하는... 그래서 과학자의 삶도 우리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과학도 우리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가끔은 과학적 지식과 우리의 삶이 별로 관계없는 듯 보이고, 종종 과학 지식은 너무 어려워서 그냥 과학자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불리는 요즘처럼 과학에 관심을 갖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갖추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멀어 보이는 과학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 한번쯤 과학자들이 어떤 연구를 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건 어떨까? 그러기 위해 이 책이 하나의 본보기 같은 역할을 해 줄 수도 있겠다.

 

윤세진_ 과신대 교사팀, 구일고등학교 생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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