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벌레도 주체적 경험을 즐긴다.

  • 저는 "전자도 주체적 삶을 즐긴다"에 공감했었습니다.

    "우주의 끝에 있는 전자 하나도 하나님께서는 이끄십니다."라는 C.S. Lewis의 말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ㅎ

    휘페르테스 2020.08.08 14:43
    • 우주의 끝에 있는 전자 하나도 하나님께서는 이끄십니다 라는 C.S 루이스의 말 너무 좋네요. 메모해놓고 저도 인용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완식 2020.08.14 13:55 DEL

 

짚신벌레도 주체적 경험을 즐긴다.

- 21회 콜로퀴움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에 대한 소감 -

 

글_ 과신대 김완식 기자 (comebyhere@daum.net)

 

 

故 신영복 선생은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글을 쓰기 위해 떠난 여행은 편한 것이 아니었으며 좋은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런 부담감 없이 다시 떠나보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어딘가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여행지가 너무 좋았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청산유수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할 법 한데,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할지 저런 이야기를 할지를 생각하며 여행을 하다 보면 여행의 참 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21회 콜로퀴움 강의를 들으면서 그 분의 마음이 딱 제 마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강의 내용에 빠져들다 보면 강의가 끝나고 나서 이 얘기 저 얘기할 말이 참 많을 터인데 강의 처음부터 어떻게 소감문을 써야 할지 무슨 내용을 넣어야 할지를 생각하며 듣다 보니 강의 듣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콜로퀴움 주제가 철학과 관련된 내용이다 보니 철알못(철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저로서는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이라는 강의 제목부터가 사뭇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강의였으며 나름 느끼고 생각할 게 많았습니다. 다음은 개인적으로 느낀 소감들을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21회 콜로퀴움은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장왕식 교수님께서 강의를 맡아주셨습니다. 강의 주제는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자연주의 철학과 창조론>입니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과정신학적 관점에서 본’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자연주의는 결국 허무주위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자연주의를 과정신학 입장에서 보면 우주를 우연으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자연주의 철학 또는 과학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허무주의로 인도하고 있는지를 살펴본 후에 그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써의 과정신학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Science is truth >

"과학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 미국의 대통령 자문 위원, Fouci 박사 -

 

이번 콜로퀴움 강의를 들으면서 제가 가장 깜짝 놀란 말이 ‘Science is truth’, 즉 ‘과학이 진리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번역하는 사람의 의도나 가치관에 따라 ‘진리’라고도 할 수 있고 ‘진실’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실질적으로는 진리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로 생각해왔던 기독교 신앙적 입장과는 상반되는 것이라 다소 당황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과학이 우리 삶을 그리고 우리 가치관을 이렇게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과학은 하나님을 배제한 자연주의를 말하는 과학이요, 허무주의로 향하는 과학을 말하는 것입니다.

 

 

< 자연은 스스로 목적이다? >

 

‘자연은 스스로 목적이다’라는 말은 자연주의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가 목적이기 때문에 외부의 어떤 개입이나 도움도 사실 필요치 않게 되는 것이죠. 즉, 자연주의는 우리의 삶에 어떠한 목적이나 의미 부여를 하지 않습니다. 경희대 물리학과 김상욱 교수가 쓴 <울림과 떨림>이란 책을 예전에 참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단순히 물리학적인 내용을 넘어서 인문학까지 가미한 흔적이 보여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유익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책의 끝부분에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력의 산물이고 우주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의미는 없다’라고 언급했는데 이 말은 저에게 매우 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저는 현재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로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다니는 자녀 2명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교회에서 배우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과 교회에서나 집에서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직까지는 저에게 왜 다르냐고 심각하게 물어오는 학생은 없었지만 간혹 어떤 학생들은 이러한 차이로 인한 갈등에 힘겨워 하다가 결국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스스로가 목적이 되어 존재하고 있는 우주와 자연이 선택하여 진화하게 된 사람과 동물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가르치는 교육적 환경에서 결국 무신론과 유물론자들이 되어가는 학생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 옴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기계적 결정론으로부터 또는 이기적 유전자가 지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교육 환경으로부터 학생들뿐만 아니라 허무주의에 치닫고 목적의식 없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 짚신벌레도 주체적 경험을 즐긴다 >

풀잎 하나가 생성할 때도 인간 이성은 그것을

기계적 원인들을 통해 이해해서는 안 된다.

- 칸트, 판단력 비판 -

 

앞서 ‘과학이 진리다’라는 말에서 좌절감을 느꼈다면 위의 칸트의 말은 저를 다시 일으켜 주고 산소를 공급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칸트의 말은 바로 목적론적인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며, 과정신학을 만든 화이트 헤드 또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과정신학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자연주의의 기계적 결정론에 의한 무신론과 유물론이 만든 허무주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짚신벌레도 빛이 있다면 빛을 향해 움직이고, 아메바도 설탕가루를 향해 움직인다고 합니다. 비록 미물일지라도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심지어 양자역학에서는 전자마저도 주체적인 경험을 즐긴다고 합니다.

 

“양자 얽힘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어떤 조건에서 아원자 입자들은 ‘자유롭게’ 그 어떤 물리적 사건들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은 채 반응한다. 그들도 체험하고 결단한다.”

_ 존 H. 콘웨이, 사이먼 코헨

 

콘웨이와 코헨의 말은 주체적 경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진화의 역사에서 소수의 선구적 물고기들이 과감히 땅 위로 진출해 양서류, 포유류가 되었다고 하는 볼드윈 효과 또한 진화에서 있어서도 능동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짚신벌레도 주체적 경험을 즐긴다는 말이 참 재미있게도 들렸지만 한편으로는 하물며 미물도 그러한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정신학은 곧 유기체의 철학을 바탕으로 우연과 필연, 기계와 목적, 진화와 창조를 함께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혹자는 이 말을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입장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우연과 기계와 진화만을 주장하는 자연주의는 결국 허무주의로 귀결됩니다. 필연과 목적과 창조만 주장하는 신앙은 근본주의로 나아가게 됩니다.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도 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을 통해 접한 강의에서 과정신학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으나 자연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서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설명한 과정신학은 목적성을 가지고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를 준 좋은 강의였다고 생각합니다.

 

 

서두에 언급한 故 신영복 선생의 <나무야, 나무야>에 나온 글을 인용하여 짧은 소감문을 마칠까 합니다. 그 분의 글이 우연과 필연, 기계와 목적, 진화와 창조를 함께 생각하는 과정신학의 개념과 맥을 같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빛은 어두움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지혜는 당신의 말처럼 ‘결합의 방법’입니다. 선량하나 나약하지 않고 냉철하나 비정하지 않고 치열하나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결합의 지혜’, ‘결합의 용기’라고 생각됩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