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책]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

[과신책] 학자의  읽기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
브레넌 매닝 | 부랑아 복음 | 진흥 | 2002

 

김영웅

 

 

얼마나 오죽했으면 종으로 살게 해 달라는 결단까지 하고 아버지를 다시 찾아왔을까? 한 번 떠난,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집에,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재산을 모두 탕진한 채 부랑아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함축하는 바는 수많은 글과 책에서 다루어졌지만, 브레넌 매닝의 '부랑아 복음'은 그렇게 부랑아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에 중점을 두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묻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런 몰골을 하게 되었는지,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왜 이제야 돌아왔는지, 가지고 나간 재산은 어떻게 했는지, 혹은 이제 잘못을 제대로 뉘우쳤는지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죄를 고백하고 종으로 살게 해 달라는 아들의 요구에 다음과 같이 종들에게 명령하면서 응답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잔치를 벌였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어떻게 보면 맹목적으로 보이기도 하며, 그래서 더욱 어리석게도 보이는 그 아버지의 사랑. 브레넌 매닝은 이 압도적이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바로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의 수혜자라는 것이다!

 

 

이 책은 새로운 무언가를 더 가르쳐 주기보다 이미 배운 것을 다시 일깨워주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바를 고스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부랑아'였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시뻘건 죄악에 물든 죄인이었고, 그래서 우리 안의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전적으로 처참하게 타락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이 임했다.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체스터톤이 한 번은 "하나님의 맹렬한 사랑"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저자인 브레드 매닝은 이를 그대로 수용한다. 우리 역시 그러한 어리석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하여 이 책을 마주한다면, 이 책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를 건진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은혜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다시 일깨워줄 것이다.

 

돌이켜보자. 우리들 각자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첫사랑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졌다. 급기야 우리들은 아이들을 훈계할 때, 마치 하나님이 착한 아이들만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가르치거나, 집사로서, 장로로서, 또는 목사로서 보여야 합당할 것만 같은 경건한 모습에다가 스스로를 끼어 맞추려고 애를 써야만 하나님께서 더 큰 상을 주시고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리라 은연중 믿게 되었다.

 

우린 말로는 은혜의 복음을 운운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마치 개인적인 경건 훈련과 자기 부인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빚어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살고 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강조점을 두며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눈에 들려고 무언가 더 해내야만 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브레넌은 이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기 위해 더 이상 취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우리 중엔 그 어떤 누구도 가치 있는 존재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은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을 우린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는 신들 중 죄인을 사랑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미 알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 어떤 공로도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써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소식이요, 사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좋은 은혜의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 예를 들어 좀 더 경건하거나 좀 더 구제, 봉사, 헌신을 많이 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배타적인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러한 행위에 따라 점수가 매겨져 있는 피라미드 구조의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예수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나라인 것이다.

 

미국에서 유명했던 CCM 가수, 마이클 W. 스미스가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린 우리가 가진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시며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은혜의 복음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우린 그것으로부터 해방받았다. 놀라운 은혜의 달콤한 소리가 자기기만의 필요에서 우리를 구해내었던 것이다. 브레넌은 말한다. 은혜로 산다는 것은 우리 전 생애의 이야기, 곧 인생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다 인정한다는 의미라고 말이다. 우리 삶의 그늘진 면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다.

 

 

내 가슴을 묵직하게 툭 때리는 브레넌 자신의 예화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한 때 알코올 중독자였던 브레넌이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당하게 "브레넌이라고 합니다. 저는 알코올 중독자입니다."라고 선언했고, 그때야말로 그가 최고의 해방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주변 사람들의 압력,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 사람들에게 존경받아야 한다는 속박으로부터 바람직하게 독립할 수 있게 해 준다. 누군가를 의식하는 보이지 않고 두려운 구속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함은 곧 타인을 공감하는 진정한 긍휼과 용서를 베풀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우리가 거룩하게 여호와의 공의를 행하는 삶과도 직결된다. 우리 인간은 도긴개긴, 모두 나그네요, 부랑아 인생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공감이 복음으로 해방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더럽고 추악한 모습일 때, 바로 죄인일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들여진 존재인 것이다. 모두 은혜의 수혜자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익숙히 알고 있었으나 브레넌 덕분에 다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영적인 사실이 있다. 역시 은혜의 복음에 대해서다.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이 회개에 선행하며, 죄인은 그가 자비를 구하기 전에 먼저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용서는 이미 주어진 것이다. 죄인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완전한 사면이다. 은혜로운 용서인 것이다. 로마서 5:8 말씀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는 말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지하지도 못했을 때"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돌아온 탕자를 먼저 마중 나와 기쁘게 반기며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전적인 은혜란 그렇게 우리를 압도하며 찾아오는 것이다. 반성과 회개는 그 이후에 일어난다. 그리고 그 증거로 우린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이웃사랑으로, 공적인 복음을 표출하는 것이다. 가장 작은 자에게 하는 행동이 예수님께 하는 행동과 같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도 받은 은혜에 다 보답할 수는 없겠지만, 유한한 육을 가지고 유한한 삶을 살게 되는 그 한계를 가지고 최대한 자발적으로 우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며,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인 것이다. 이는 또한 시내산 언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기쁨과 감사함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도 같다. 그때도 은혜가 먼저였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 순종이 따라오는 것이었다. 언제나 은혜가 율법보다 먼저 온다. 율법은 결코 구원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먼저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행하는 우리의 올바른 반응인 것이다. 그 순종을 통해서 우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찾을 수 있다.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파리나 보르도, 리용, 디종 같은 대도시든 아니면 생 레미 같은 작은 마을이든 프랑스에서 부활절을 보내게 되면 건물 벽이나 버스 옆면에 손으로 쓴, 혹은 검은색으로 인쇄되어 내걸린 한 문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사람들이 그 문구를 노래하고 읊조리고 암송하는 것도 듣게 될 것이라고 한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그 문구로 부활절 인사를 나누는 것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문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L'amour de Dieu est folie!" 즉, 하나님의 사랑은 어리석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더 크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더 사랑받기 위해 어떤 공로를 세울 필요가 전혀 없다. 기독교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어떤 경건한 규칙을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두 손을 활짝 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타인을 공감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은혜와 감사에 무감각해져 있거나 냉담해진 분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콧대가 높아진 채 나그네 됨의 정체성을 잊어버린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어떤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끼어 맞추려는 부질없는 노력에 허덕이는 분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고 다시 두 번째의 부르심을 듣는 기적이 일어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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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질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존재했는가 | C. 존 콜린스 | 김광만 역 | 새물결플러스 | 2019

 

최승주 (과신대 정회원)

 

 

이 책은 교회 역사 대부분에 걸쳐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왔던 창세기의 등장인물과 존재들-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생명을 알게 하는 나무 등-에 대해서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진짜 존재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법을 소개한다. 책을 지은 C. 존 콜린스는 구약학 교수답게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대할 때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읽는 것을 조심하면서도 동시에 역사적 핵심을 발견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구약의 본문들뿐만 아니라 신약 그리고 구약을 읽는 또 하나의 방식인 외경의 본문들, 그리고 질문에 대한 여러 신학자의 입장을 친절하게 나열하면서 소개한다.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성서에서 아담과 하와를 다루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의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설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1. 책 내용 및 주요 포인트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 중 나에게 훅 들어온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 보았다.

 

1)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 대한 신학자들의 여러 의견이 있다.

 

만약 이 책을 3~4년 전에 접했다면 ‘맙소사’, ‘말도 안돼’, ‘저자는 이단 아닌가?’ 등등의 생각을 먼저 했을 것 같다. 다행히(??) 몇 해 전 과신대를 알게 되면서 미시적 수준의 지각변동을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터라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수긍이 갔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관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이다(59p). 그렇다면 왜 한국 교회 안에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한 나는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합동측 교단에서 조신(??)하게 자라서 질문하거나 토를 다는 것이 불신앙으로 비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어서이거나, 아니면 내가 성장하던 당시에는 이런 신학적 논의가 지금보다는 덜 활발해서였을 수도 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의미하는 바는?

 

주일학교에서 배우기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의 눈코입을 진흙으로 붙여 주셨다고 했다. 저자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담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실존성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 실재성을 옹호하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담긴 고통과 고난의 문제라고 주장한다(76p). 이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은, 책의 내용을 그대로 빌리자면 “학자들의 노력이 그런 질문들을 공평하게 다루는 데 실패했다”라고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눈코입을 닮았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성화에서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인간을 위해 오실 거고 온 인류가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데 확인된 우주의 크기만 해도 138억 광년만큼 큰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꼭 지구에 오실까? 꼭 인간에게만 오실까? 그럴 리 없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여기에서는 외현적)을 닮아 특별하다는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제한하는 생각일 수 있겠다.

 

3) 창세기와 과학의 조화? 일치주의는 주의할 것

 

역시나 대부분의 교회 역사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의 과정, 아담 가족이 살았던 시대 등을 과학적(또는 역사적) 설명과 일치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이러한 시도는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전도의 전략으로 사용되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소개하면서 일치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이에 즉각 반대하는 반일치주의도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시나리오를 살피는 것이 여러 가지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결코 성서의 주요 스토리라인을 깨는 일이 아님을 알려준다.

 

 

2. 그래도 남는 질문?

 

1) 어디까지가 내러티브이고, 누가 정하는가?

 

창 1~11장은 그렇다 하자. 12장에서 등장하는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복으로 부르신 사건은 신화라고는 볼 수 없을까? 새로운 아담인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라는데(69p)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노아의 홍수는 상징적, 비유적 표현일까 역사적 사실일까?

 

2) 관습적으로 사용했던 복음에 대한 설명이 흔들리는 건 아닐까?

 

기독교는 오랫동안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관습적으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죄는 언제 들어왔을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고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믿어 왔는데, 이것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죄는 언제 들어왔을까? 인간에게 죄의 DNA가 작동할 가능성이 있도록 창조 때 이미 허가를 내주신 걸까? 저자 역시 “뱀의 말로써 표현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어떻게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죄로 인한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것도 포함하는 것이라면 역사적 시점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3) 책의 마지막 결론-슬퍼하는 법

 

한 권의 책에서 가장 궁금한 부분은 저자가 아담과 하와가 실존했을까에 대한 논문을 맺는 방식이다. 저자의 결론은 ‘슬퍼하는 법’이라는 세 페이지에 담겨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화를 소개하며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담겨 있고, 죽음이라는 침입자를 추방하시고 회복과 최종적인 복을 주신다는 확신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가슴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 위로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월호 사건, 하나님을 잘 믿는 친구의 과로사,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구의 암으로 인한 죽음... 물론 하나님은 나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실 필요는 없을 테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그 질문에 답을 캐기보다 죽음 앞에 함께 슬퍼하고,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찌글어짐에 함께 애통해하는 것일 뿐이다.

 

 

3. 나에게 과신대란 무엇인가?

 

서평을 마무리하며 나에게 과신대가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과신대를 만나면서 나는 자유함을 얻었다. 궁금해 하고 질문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그리고 질문해야 하는구나... 과신대를 통해 과학자도 신학자도 아닌 내가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를 풀고 있는 중이다.

 

25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손에 합동측 목사이신 아버지가 “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라는 책을 쥐어 주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과학으로도 증명된다는 근사한(??) 사실을 딸에게 알려주고 싶었을거다. (나라도..) 그래서 나는 창조하신 세계를 들여다보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 생물학도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한국교회는 젊은지구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회에게 많은 기회를 주던 때, 믿음이 좋은(??) 나는 종속과목강문계를 외우면서도 이는 시험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주문을 외웠다. 결국 이원론적인 전략을 취한 나는 내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펜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과신대를 만나며 드는 생각은 지금이라도 질문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이다. 또한 세 자녀를 기독대안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로서 아직도 한국교회와 기독학교에 남아있는 일치주의에 대한 문제를 꾸준히 지적하고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지면을 빌어 과신대와 우종학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