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드기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
과학주의 시대의 무신론과 기독교

왕식 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


최근 과학적 무신론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오늘날 장안에서 조금 팔린다 하는 책들은 대부분 종교에 비판적이며, 특히 자연과학과 관련된 저작들은 다수가 종교에 적대적입니다. 이에 따라 최근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무신론, 유물론, 세속주의 등이 당연하게 선택되어야만 할 옵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에 기초한 윤리와 도덕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현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생성과 변화의 철학들이 유행하게 되면서, 고정된 실체나 그것에 근거한 진리가 모두 와해된 것에 있기도 합니다. 자아, 질서, 주체를 포함해, 신(God) 등의 개념들이 생성 변화라는 큰 바다에서 모두 용해되어 버렸다고 현대인들은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생성과 변화의 철학의 배경에는 바로 자연과학이 새롭게 발견한 탄탄한 이론들의 뒷받침이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전혀 과학적 무신론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은 그 무게와 비중에 있어 과거에 발견되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파괴력이 막강합니다. 종교적 지식인과 신학자들이 대응하기에는 그 파급력과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과연 이런 과학적 무신론의 대세를 넘어서 종교가 미래에도 생존할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우려합니다. 정말 종교는 과학의 시대를 넘어서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기 위해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는 첨예한 지점 중 하나인 경험적 지식에 대한 얘기를 다뤄볼까 합니다.

잘 알다시피, 과학은 경험 세계를 다루기에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는 반면 종교는 초경험 세계를 다루기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허구의 지식을 제공한다고 지적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경험 세계만이 확실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루는 대상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입증할 수도 없고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이 과학의 편을 들고 점점 무신론적 경향으로 흐르는 이유에는 경험 세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과학적 발견들과 성과들, 특히 뇌 과학으로 대변되는 과학적 유물론과 환원주의는 오늘날 신(God)이나 영혼, 영성 등과 같은 종교적 개념들을 도저히 긍정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데, 이도 바로 뇌 과학에서 보여주는 경험적 세계가 가장 진실한 세계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 세계란 도대체 어떤 세계이며, 과학과 종교는 이와 관련해 어떤 차이를 지니는지를 살펴보는 것부터 시도해야 합니다. 20세기 말 최고의 철학자라 칭송을 받는 들뢰즈는 인간의 경험 세계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진드기 얘기를 사용하면서 인간과 진드기를 비교한 바 있는데, 그 사례를 인용하면서 논의를 풀어가 봅시다.

들뢰즈에 따르면, 진드기에게는 세상이 세 개의 요소로만 구성되어 있기에 단지 세 가지로 경험됩니다. 진드기에게 첫째로 경험되는 세계는 빛이며, 두 번째는 포유류의 냄새이며, 세 번째는 포유류의 체온입니다. 포유류의 피를 먹어야 생존하는 진드기는 이 세 개의 세계만이 그의 삶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기에, 그가 가진 몸의 구조는 바로 이 세 개의 대상을 다루기 위한 촉수를 발전시키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빛을 따라 나뭇가지 위로 오르고, 나무 위에 하루 종일 있다가 포유류의 냄새를 맡는 순간 나뭇가지 밑으로 내려와 지나가던 동물 위로 낙하합니다. 마지막으로 해당 동물의 피부 중에서 털이 없고 열이 더 높은 부위를 발견해 내야 합니다. 그곳에 피가 많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포유류의 체온이 진드기에게 경험되는 또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드기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는 바로 이 세 개가 전부입니다. 그에겐 하늘의 별도, 꽃의 향기와 꿀을 비롯해 그 어떤 세계도 필요 없고 그의 경험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진드기에 비해 인간은 물론 훨씬 다양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보다 복잡하고 폭넓은 세계로 전개됩니다. 진드기에게는 하늘의 별과 꽃의 아름다움이 대상 세계로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중요한 세계가 됩니다. 인간에게는 진드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촉수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진드기를 포함해 다른 그 어떤 생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를 폭넓고 깊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세계가 그저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세계는 우주가 됩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세계가 우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 우리의 논의를 인간 내의 그룹 안으로 들여와 봅시다.



인간의 그룹 중에서 자연 과학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세계는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과학자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보통 인간들이 경험하는 세계 보다 훨씬 다양하고 구체적입니다. 특히 관찰과 실험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만을 참으로 옳다고 믿는 과학자들의 세계는 일부 종교인들의 세계보다는 훨씬 생산적일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 과학자들은 종교인들의 세계 경험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종교인들은 근거도 없고 어쩌면 전혀 존재하지도 않을지 모르는 ‘신,’ ‘영혼,’ ‘정신,’ ‘자유’ 등의 허구적인 개념을 믿으면서 삶을 허송하고 있다고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드기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의 존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넓이는 하나의 존재가 지닌 촉수에 비례합니다. 하나의 존재가 경험하는 세 개는 그의 촉수의 개수, 딱 그만큼입니다. 과학자는 관찰과 실험이라는 촉수를 통해서 그 어떤 다른 인간의 그룹보다 폭넓고 다양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의 촉수로서의 관찰과 실험이 가져다주는 세계, 바로 그만큼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너무 한정되어 있어서 그가 경험하는 세계가 과연 우주의 진리에 어느 만큼이나 가까이 갈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드기의 비유를 사용한 것은 과학이 다룬 다는 경험 세계의 실상에 대해 얘기하고 그것과 종교의 세계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자가 다루는 세계와 종교가 다루는 세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러 방식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저는 여기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연과학자의 하나로 손꼽히는 아인슈타인의 명구를 사용해 이 문제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종교 없는 과학이 절름발이라면,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학문적 추세가 종교 쪽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런 추세는 뇌 과학의 발달에서 촉진된 면이 많습니다. 최근의 과학적 연구들은 모든 종교 현상들이 뇌신경의 작용으로 낱낱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뇌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대로 과학과 종교는 세계를 경험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식이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 둘은 서로를 보조하며 함께 문명을 건설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과학과 종교 양자는 모두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에서 한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드기가 경험하는 세계의 비유에서 보듯이, 뇌 과학이든 그것보다 더욱 정확한 실험과 관찰에 기초한 과학이든 그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분에 한정될 뿐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지각은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구축한 믿음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은 자신이 지닌 개인적, 사회적 틀이라는 촉수를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로 인해서 뇌신경 안에서 처리되는 모든 과정의 각 단계마다 발생하는 수많은 감정, 지각 그리고 인지된 내용이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과학도 또 하나의 믿음과 신앙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 이상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과학이 경험하는 세계는 종교보다는 때로는 더욱 정교하고 구체적인 진리의 세계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가 다루는 세계가 제한적이라는 것은 과학마저도 독단의 수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많은 과학자들은 진리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고의 과학자 중의 하나인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말하고, 최고의 수학자 중의 하나인 괴델이 불완전성의 원리를 외친 것은 바로 이런 것과 연관된다고 보겠습니다.

과학적 무신론의 세계란 분명히 인류가 발견한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세계 안에서 인간이 경험한 지극히 제한된 경험에 불과합니다. 물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세계도 인류가 발견한 몇 가지 세계로서 우주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발견하지 못한 우주의 중요한 면을 해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과학의 동반자입니다.

문제는 과학은 변하고 발전하는데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는 멈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은 종교의 진정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종교가 단지 과학이 보지 못하는 진리의 세계의 촉수를 가지고 있다는 자만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면서, 지금처럼 스스로를 변혁시키는 일에 게으르게 되면 종교는 어느 날 인류에게 그저 하나의 시시한 관점, “별 볼 일 없는 미약한 관점”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오늘과 같이 빠르게 진화하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스스로를 변혁해 나가야만 하는 이유라 할 것입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