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존중과 배려로 다름의 향연을

아담의 역사성 논쟁 | 데니스 O. 라무뤼 외 | 새물결플러스 | 2015

 

김영웅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이나 갈등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인류의 기원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자연스럽게 아담이란 존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자칫 발칙하거나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 의문은 기존에 아무 의심 없이 가지고 있었던 우리들의 믿음과 확신을 재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인류의 기원이 기록되어 있다고 보는 창세기 앞부분을 무언가 놓친 게 있나 스스로 반신반의하며 수없이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그 부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직접 능동적으로 찾아보기도 합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 순간이 기존 교회 안에서 담을 수 없었던 기독교 영역을 처음으로 접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늘 수동적인 자세로 목사를 통한 성경 해석을 주입 받아왔던 분이라면, 아마 이때가 처음으로 교회 안에서 말해주지 않거나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이슈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세상에는 정말 다양하고 다채로운 성경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유일한 진리처럼 믿어왔던 지식이 그저 다양한 해석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더욱 커다란 기독교 세계를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평안히 잠자고만 있던 자신의 신앙이 안일하고 편협했으며, 순수하다고 믿었으나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아담의 의미를 인류의 기원 측면에서만 고민하다가 멈추게 된다면 (물론 이런 고민은 블랙홀과 같아서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멘탈은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채 오히려 전에 없던 활기찬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다행인지도 모르죠) 이러한 고민이 보통 인류의 기원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에게도, 바울에게 그랬듯, 구약 성경만 있었다면 적어도 멘탈이 붕괴되는 고민까진 직면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창세기가 포함된 구약만 있는 게 아니라 신약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예수만 있는 게 아니라 바울도 있습니다. 또한 원죄 개념을 강력히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예정론을 언급한 칼빈도 우리에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빈으로 이어지는 장로교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 중 단 1% 정도가 장로교라고 하는데 말이지요 (그 중의 절반이 한국에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팩트체크 필요하겠지만요). 이러한 불행 (다행?)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편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조성했으며, 급기야 이는 누군가에겐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골치거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골치거리의 근원은 아담과 예수를 연결시킨 바울의 언급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한 사람’에 대한 부분은 첫 번째 아담 뿐만이 아닌 두 번째 아담이라고 알려진 (실제 “두 번째 아담”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단, “두 번째 사람”이라는 말이 고린도전서 15:47에 나옵니다. 아담이란 뜻이 사람이기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이긴 합니다) 예수의 존재 이유까지도 재고하게 만듭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기원과 그 해결책에 관한 부분이지요 (각각이 아담과 예수를 대변합니다). 이로써 우린 마침내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건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무방비 상태로 돌연히 노출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의미를 인류의 기원 문제와 연결시키다가 얼떨결에 시작된 블랙홀의 끝이 예수의 대속을 향하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특히,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성경 전체를 해석해내는 방법에 익숙한, 복음주의권 (그 중에서도 칼빈의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 장로교)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으며 개인의 신앙과 믿음을 구축했던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 아담으로 인한 원죄사건과 그 결과로 인한 인간의 타락, 죄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의 태어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한 구속, 즉 창조-타락-구속의 플롯이 모든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아담의 존재 유무는 자칫 기독교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위험인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복음주의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원죄개념과 죄의 전가를 핵심교리로 여기지 않는 기독교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아담의 역사성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가지지 않겠지요. 그래서 이 글에서 '우리'란 한국 장로교를 포함한 창조-타락-구속 플롯을 받아들이는 복음주의권에 속한 기독교인을 지칭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른 것 같은 참담한 멘붕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린 과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 책은 이러한 질문을 이미 던져보고, 그로 인해 인생을 건 치열한 고민을 거쳐 정립된 네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의 입장을 보여줍니다(각 입장을 대표하는 네 명의 학자들은 모두 복음주의자들입니다). 과연 아담은 실제 역사적 인물일까요, 아님 어떤 상징을 나타내기 위한 고대 근동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상 속 인물일까요? 아담은 과연 첫 번째 사람이자 인류의 조상일까요, 아니면 죄가 세상에 들어온 시점의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에 불과할까요? 아담은 과연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그렇듯, 정자와 난자의 수정에 의해 태어난 게 아니라, 정말 초자연적인 방법, 즉 흙으로 빚어지고 유아 단계를 건너뛴 채 곧장 성인으로 만들어졌던 것일까요(de novo creation)?


물론 성경 본문은 이런 질문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혹은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 어떠한 대답도 명확히 내놓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그저 여러 단편적인 성경 구절들과 고대 근동 지역의 과학과 세계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성경 해석과 신앙고백, 그리고 기독교 교리 등에 의거하여 추측할 뿐입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각 시대에 관점들은 모두 정치적이고 어쩌면 폭력적일 수도 있었을 힘의 영향 아래에서 정립되었다는 사실도 우린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이 책 역시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대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력하게 호소하지만, 그 어떤 입장의 해석도 참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결코 한 입장만을 옹호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빨려 들어갈 정도로 탄탄한 논리를 가진 입장이라 해도 해석은 해석일 뿐, 결코 그것이 진리의 자리를 꿰차진 못합니다. 저는 어떠한 해석을 받아들이든 본인의 신앙이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어떠한 입장을 가진다 하더라도 어느 부분에선가는 논리의 모순이나 비약을 감행하거나 무시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입장을 비하하거나 혐오하거나 배제하며 싸움질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밑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네 가지의 입장을 조화롭게 수평적인 관계에서 다루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한 입장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다름이 다름으로 존재할 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단, 어떤 한 입장이 내세우는 힘의 논리에 의해서 다름이 틀림이나 혹은 악으로 규정되고 제거 대상으로 발전하게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자신이 열심히 연구해온 입장을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의 네 가지 해석 모두 논리적 완전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거기엔 자신의 시간과 열정, 다시 말해 자신의 인생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자의 입장이 조목조목 반박되어질 때면 자신의 자아가 마치 부인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감정 섞인 논쟁의 장면을 볼 때면 솔직히 제 삼자이자 독자에 불과한 저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났을 정도였답니다. 이미 논리의 영역을 이탈하여 오감을 가진 인간으로서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책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논쟁도 그 표면상의 이유는 논리와 근거 부족이지만, 사실 그 이면엔 그것들보다 더 큰 문제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자아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논쟁에서 이성만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감정이 섞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논리로 시작, 진행, 결론지어져야 했을 논쟁이 결국엔 비논리를 불러오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건 결국 그들도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대표하는 배릭 교수 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세 학자의 입장에서도 전적인 동의가 되어지진 않았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진화적 창조론'의 대표인 라무뤼 교수의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부분에서, 저는 그의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왜 굳이 역사적 아담이 존재하지 않았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월튼 교수의 '원형적 창조론'에서는 '이것이 맞지만 저것도 틀린 건 아니다'라는 모호한 논리에 그만의 확실한 색깔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굳이 역사적 아담이 존재해야만 하는가?'하는 질문에서 명징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콜린스 교수의 '오랜 지구 창조론'의 입장에서는 '왜 굳이 유신 진화론을 거부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저는 끝내 만족할 만한 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네 가지 입장과 그들의 논쟁을 모두 지켜본 전직 교수이자 현직 목회자인 그레고리 A. 보이드 목사의 입장이 저로선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역사적 아담이 있든 없든, 우리의 믿음은 안전하다' 라고 압축할 수 있는 그의 입장에서 저는 존중과 배려가 깃든 예수의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린 어느 한 입장을 고르고 그 입장을 변호하는 투사가 되어야만 할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 입장이 연구를 할 필요도 없다거나, 다른 입장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름에 열린 자세를 가지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그 길은 결국 교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름을 다름으로 존중해 주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한 입장의 더 탄탄한 논리를 구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놓쳐왔던 건 어쩌면 그런 자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진 각 입장이 서로의 논리적 결함을 찾아 비방하기도 하고 자신의 입장이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도 하는 단계에 있지만, 언젠가는 다른 해석들이 모두 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채 어떤 입장을 취하든 전적인 개인의 자유에 맡기고 혐오와 배제 대신 존중과 배려의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