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호모 사피엔스의 귓속말

인간의 타락과 진화 | 윌리엄 T. 카바노프, 제임스 K. A. 스미스 편집| 새물결플러스 | 2019

 

심기주 (과신대 기자단)

 

 

성령이 인도하는 신학적 상상력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열 명의 학자들이 ‘인간이, 인간이 아닌 영장류로부터 출현했다면 이는 인간의 기원과 죄의 기원을 포함한 기독교 신학의 기원에 관한 전통적 설명과 관련해서 어떤 함의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모인 결과이다.

 

이 책이 단순히 기고문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이 학자들이 3년동안 같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또 우정을 나누며 공동체로서 토론해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교회의 한 모습 같달까? 사실 요즘 들어 공동체의 필요성은 많이 느끼는데 비해 예배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이 책에서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신학적 작업은 신실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예배가 필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꽂혔다. ‘우리의 상상력의 근육을 훈련시키고 늘리려면 시간, 즉 쟁점들과 기회들에 대해 심사숙고할 시간, 경청하고 묵상할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실한 상상력을 기르는 데는 성경 이야기의 운율로 상상력에 세례를 베푸는 일이 필요하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목표다.’ (20쪽)

 

즉, 예배에 녹아 있는 성경 이야기로부터 하나님의 영감을 얻고 신학적 상상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집필한 신학자들의 공동체인 ‘골로새 포럼’은 예전적인 예배를 신학적 상상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꼽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전통을 계승하며 신학적 상상력으로 균형을 잡는 모습이 가장 매력적이면서 좋은 부분이었다.

 

전통에 충실한 확장

 

여지껏 과신대에서 인터뷰하고 콜로퀴움에 오셨던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조언해주신 것은 “신학이 과학의 연구결과를 신학화하는 데만 신경 쓰느라 신학 본연의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신학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간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실 여러 글들을 보며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 과학에 맞춰 해석을 계속하는 것은 뭔가 끼워 맞추기 식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서론에서 말하는 매킨타이어의 전통에 대한 정의는 내 고민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전통은 특정한 근본적 동의가 정의되고 재정의되는 주장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되는 주장이다.”

 

이 다음에 나오는 전통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전통’은 성경에 의해 촉진되고 기독교 예배 의식 속에 담겨 있으며 초교파적 신조(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등)로 표현된 보편 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가리킨다. 이는 이미 전통 내부에 표현, 확장, 수정이라는 확대되고 있는 층위들을 지닌 살아 있는 전통(25쪽)’이라는 것이다.’ 전통은 정적이며 고정되어 있어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기독교 전통은 그 속에 역동적인 ‘역사’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 책에서는 전통의 방향성에 충실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확장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 점이 나는 흥미로웠다. 아!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창의적이면서도 깊은 고민과 대화가 가능하다니! 나의 신앙의 길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어떤 움직임이 “전통에 충실한 확장”인지 아니면 전통과는 무관한 것인지를 분별하면서 나아갈 때, 전통은 그저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숨 쉬고 나와 교감하는 유기체가 되는 것이다.

 

 

아담과 호모 사피엔스

 

그렇다. 내가 처음에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돌이켜 보면 원래 나는 성경을 접할 때, 말씀 묵상을 할 때, 그것들이 현실에 잘 와 닿지 않았다. 성경 속의 인물들은 그저 수 천년 전에 있었던 많이 들어봐서 친숙한 외국인들이고, 성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2D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스파이더맨 영화와 오히려 비슷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것은 단지 모든 인류의 책임과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답답하게 하는 요소일 뿐이었지 딱히 내게 와 닿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면서 창세기를 쓴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용의 각각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다각도로 알게 될 때, 창세기는 내게 4D 영화, 아니 ‘실재’로 다가왔다. 아담은 단지 모든 인류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용도가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아담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우리에게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는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가인이 “선을 행할” 수 있고, “죄가 문에 도사리고 앉아” 있을지라도 그가 “죄를” 반드시 잘 다스려야만 한다(창 4: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셨던 말씀은 죄(창세기에서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예)는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인간은 (최소한 처음에는) 죄에 맞서 싸울 수 있다.(187쪽)’

 

특히 아담에서 가인, 라멕을 거쳐 죄가 불덩이처럼 늘어나는 것을 묘사하는 창세기 6장까지, 창세기는 죄가 점점 발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처드 미들턴은 창세기에서 진술한 것처럼 죄가 발달한다는 관점은 초기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서 도덕적인 악이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도덕적, 종교적 의식이 발달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간들은 자신의 양심이 '폭력적인 행동을 금하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충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충고를 무시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치론적인 해석을 피하면서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것은 판넨베르크의 논리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넨베르크는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는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 중간지대로서의 철학을 매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윌리엄 브라운은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 우선, 구약 본문을 '설명'하고, 해당 본문의 신학적 주제를 가지고 과학으로 온다. 그리고 이 주제를, 과학을 통해 세계를 볼 때 관련 있을 법한 측면들과 관련지어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에서 얻은 통찰을 가지고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온다.(147쪽)

 

즉, 어떤 면에서는 각각의 주제를 뽑아 과학과 신학을 넘나 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중간지대를 활용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담과 원죄’, 그리고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도덕적, 종교적 의식 발달’의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것도 이런 중간지대를 거치고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는 원죄 뿐만 아니라, 타락, 죽음 등 다양한 전통과 관련된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신학과 과학의 대화 방식인 것 같다. 이를 활용할 때도, “전통에 충실한 확장”이 또 가능하지 않을까? 전통에 충실하면서, 즉, 기독교의 본질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 사회를 무시하지 않고 현실적인 대안과 조언을 제시해줄 수 있는 기독교의 역동성을 기대해본다.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 4:7b)”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죄의 유혹을 다스리라고 주님이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죄의 발달과정을 곱씹으며 죄에서 떠나라고 외치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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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책] 신의 언어 - 두 세계관의 유쾌한 공존

[과신책] 과학자의  읽기

 

두 세계관의 유쾌한 공존
신의 언어 | 프랜시스 S. 콜린스 | 김영사 | 2009

 

김영웅

 

 

군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던 나는 그 해 제대를 했다. 2000년도는 내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하나의 작은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2000년도는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인류 역사에서 커다란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벌어진 놀라운 해였다. 세계적으로 10년이 넘게 투자된 Human Genome Project가 완성되던 해였기 때문이다. 그 해엔 네 종류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전체 약 30억 개 길이의 인간 유전체 서열이 모두 밝혀졌음이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공개되었다. 우리 몸의 설계도 초안이라 할 수 있는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 지도가 드디어 처음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 유명해진 제임스 왓슨의 뒤를 이어 미국에서 Human Genome Project를 끝까지 이끌었던 책임자로서 2000년 6월 백악관에서 열렸던 이 프로젝트의 성공적 완성을 축하하며 선포하는 감격적인 자리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 옆에 서있던 사람의 이름은 프랜시스 S. 콜린스였다. 그는 이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전문 과학도서도 아니고 신학도서도 아니며 자서전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진솔한 목소리가 곳곳에 잘 침투되어있어 이 모두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책이다. 물리와 화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어 Human Genome Project를 이끈 과학자로서,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를 거쳐 나와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살아내며 유신론적 진화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과학과 신앙 사이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커다란 간극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질문하고 답을 해온 선배로서의 프랜시스 콜린스를 우린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논리 정연하면서도 진정성이 여과 없이 드러난 필체는 덤이다.

 

생물학자인 나에게 그의 목소리는 이 분야를 앞서간 그 어느 누구의 목소리보다도 호소력이 있었다. 진지하게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모두를 포함해서, 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그의 진솔한 내러티브는 분명 하나의 빛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어두웠던 부분을 밝혀줄 것이다.

 

 

그가 이끈 프로젝트가 역사상 처음으로 밝혀낸 것은 인간의 모든 염색체의 뼈대가 되는 DNA의 염기서열이다. 그는 이를 감히 ‘신의 언어’라고 표현한다.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이 관여하여 어렵사리 밝혀낸 그 암호와도 같은 염기서열은 분명 현대과학과 지성이 일궈낸 쾌거일진데, 그 프로젝트 리더가 자신의 입으로 그 암호를 ‘과학의 언어’가 아닌, 종교적 색채가 단박에 드러나는 ‘신의 언어’라고 표현했음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우린 과학과 신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다. 제목만 곰곰이 씹어봐도 우린 그 안에서 과학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이 잡음 없이 공존하며 더욱 풍성하게 서로를 강화시키고 성숙시키며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 프랜시스 콜린스는 생물학적 진화를 정의할 때 필수요소인 DNA 변화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진화를 엄연한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 진화의 정교한 메커니즘이 다름 아닌 신의 창조방법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그렇다. ‘유신론적 진화’라는 말이 주는 불완전한 뉘앙스 때문에 책에서 ‘바이오로고스’라 칭하자고 제안까지 하는 그의 관점을, 나도 한 명의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으로서 이제는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게도 그리스도인이자 과학도로서 하나님을 수호하고자 하는 순진한 마음에 진화라는 단어를 방어적으로 거부했던 때가 있었다. 대학원생 초창기 시절이었다. 어떤 유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 방편으로 생물학자들은 그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다른 종들과의 그것과 얼마나 비슷한지, 또 진화 단계 중 어느 단계에서부터 보존되어 왔는지 비교하여 보여주곤 한다. 이를테면, A라는 유전자는 포유류인 생쥐와 침팬지에서는 비슷한 염기서열로 존재하지만, B라는 유전자는 양서류인 개구리나 어류인 물고기에서부터 존재한다면, A보다는 B가 더 역사적으로 훨씬 더 오래되고 더 기본적인 기능을 한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포유류에서만 중요한 유전자보다는 척추동물 전체에서 중요한 유전자라는 사실이 던지는 의미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난 다른 종과 인간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비교한다는 데에 불편함을 느꼈었다. 비교하는 행위 자체가 진화를 인정하는 기본적인 행위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는 수 없이 비교를 하긴 했지만, 난 그때 뭔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었다. 마치 사탄의 폭력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후미에를 밟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책을 읽고 약 15년 전의 그 찜찜함을 다시 소환해보니 감회가 새롭다. 과학과 신학의 사이에서 어정쩡한 입장으로 당당하지 못하고, 어디서도 말 못할 괴리감을 가슴에 간직한 채 보냈던 그때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 당시 내게 만약 이 책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뭔가 아주 많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엄연한 과학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화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만 하면 알러지 반응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여기거나, 진화나 과학을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거나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다. 과학과 신앙은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으며, 그 유쾌한 공존이야말로 원래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