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정대경 박사 (과신대 연구 팀장)

 

5월 과신대 연구모임은 백우인 목사님이 계시는 카페 “거기”에서 모였습니다. 계속해서 해리슨의 <The Territories of Science and Religion>을 읽으면서 모입니다. 드디어 다음 모임이 해리슨 책 마무리하는 모임입니다.

 

요즘 쓰고 있는 논문의 큰 줄기와 해리슨의 주장이 잘 맞아떨어집니다. 논문은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일으키는데 일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시작했습니다.

 

형이상학적 자연주의 안에서 인간 삶이 추구하는 가치와 의미는 물리적인 것 혹은 신체적인 것으로 축소됩니다. 생명연장, 의료복지 등 막대한 비용과 투자가 이 분야에 이뤄지는 것이 큰 흐름 안에서 인간실존의 궁극적 가치가 신체적-물리적인 것으로 축소되면서 일어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해리슨도 마찬가지로 근세 이후 르네상스, 종교개혁, 새로운 자연철학의 출현 등에 의해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기존 시각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신적-도덕적 층위가 물리적 층위로 환원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내적인 덕목을 지식을 통해 실현하는 종교적-자기성찰적 개념들이었던 scientia와 religio 같은 개념들이 외재적 개념들, 곧 기독 종교의 핵심 교리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체계들로 개념적 전환이 일어났다 주장합니다.

 

이와 발맞추어 종교 내 궁극적 가치였던 caritas(charity), 곧 하나님과 합일적 사랑, 이웃과 합일적 사랑은 전자가 후자로 축소되며 합쳐짐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의 외적인 표현인 공리, 유용성, 복지 등을 실현하는 것으로 강조점이 옮겨갑니다. 이후 인간과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신적 실재가 불필요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 자연스레 종교적인 동기로부터 시작되었던 charity는 인간적인 차원만 남게 되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는 듯 보입니다.

 

큰 틀에서 해리슨의 주장, 실재에 대한 다차원적-다층적 이해가 물리적-문자적 차원으로 축소되면서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가치와 의미도 같이 축소되었다는 이해가 그럴듯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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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정대경 박사 (과신대 연구 팀장)

 

4월 연구모임에서는 종교와 과학 학제 간 연구 관련 서적 중 고전 격인 이안 바버의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챕터 1과 계속해서 함께 보고 있는 피터 해리슨의 <The Territories of Science and Religion> 챕터 3을 읽고 모였습니다. 바버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과학에서 논의되는 “데이터” 개념이 신학 연구에 있어서 사용될 수 있는가에 관련된 논의였습니다. 바버는 신학이론이 구성되는 데 사용되는 자료들을 데이터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고, 과학 연구 방법과 신학 연구 방법 사이 유사성을 토대로 과학과 종교 학제 간 연구 가능성을 제안했습니다. 신학 연구에서 데이터라는 것은 보통 theological sources라고 불리는 성서, 전통, 이성, 경험 등을 보통 의미하는데, 토론 중에 신학적 “데이터”라는 것이 과연 과학적 “데이터” 개념과 유사한 것일 수 있겠는가가 쟁점이었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서로 다른 전공의 학자들, 전문과학, 과학철학, 과학사를 전공하신 선생님들과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도전을 줍니다. 예상치 못했던 부분들을 생각하게 되고, 과학이나 과학철학적 이해에 있어 브로드하고 추상적으로 이해했던 부분들을 조금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과신대 연구모임이 가지는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체계화되고,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방식으로 연구모임이 잘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리슨 책의 챕터 3도 참 흥미로웠습니다. 챕터 3의 주요 요지는 고대와 중세까지는 자연적 존재자들(natural objects or beings)에는 물리적 층위뿐만 아니라, 소위 도덕적-정신적 층위가 존재한다는 것에 크게 이견이 없었는데, 르네상스 이후 시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자연스레 존재자들 내 도덕적-정신적 층위가 사라지거나, 물리적 층위로 환원되기 시작했다는 지적입니다. 이러한 사유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 자연적 존재자들의 행위와 더불어 일어나는 것(i.e. double-agency)이 모순적이거나,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없다가(이미 자연적 존재자들 안에 물리적 층위와 더불어 비물리적 층위가 있기 때문에), 물리적 층위에 대한 강조가 일어나게 되면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을 물리적 층위에 국한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입니다.

 

이 맥락에서 자연 내 일어나는 사건의 원인을 자연적 존재자들로만 국한해서 생각하거나, 기회원인론 같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신적 존재의 행위 결과로만 보는 "either or”의 사유방식이 자연을 이해하는데 대두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유가 역사 안에서 점차 자연주의와 결탁하게 되면서 신적 행위라는 것이 자연계 내 사건들을 설명하는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전락하게 되는 의도치 않은 결과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해리슨의 이러한 지적이 일리 있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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