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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과학의 도전과 기독교 교육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8. 12. 24.


과학의 도전과 기독교 교육[각주:1]


김정형 교수[각주:2]



과학 시대의 도전


오늘날 우리는 21세기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 21세기 과학 시대는 17-18세기 과학 혁명 시대에 큰 빚을 지고 있지만 과거와는 많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 혁명의 시대는 근대 과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근대 이전의 세계관을 대체하기 시작한 시기였다면, 오늘날 과학 시대는 과학적 세계관이 사회문화 전반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기이다. 과학 혁명의 시대에는 여전히 전통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면, 과학 시대에는 전통적 세계관이 아직까지 완전하게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 세계관과 경쟁할 만큼의 영향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오늘날 우리의 삶은 스마트폰을 상징으로 하는 과학기술이 가져온 문명의 이기를 빼놓고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21세기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한편, 과학 시대는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다. 과학 시대의 도전은 크게 세계관, 인간관, 무신론의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변화하는 세계관. 과학 혁명 이후 지난 수백 년 간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는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최근에는 구글의 빌 게이츠 재단이 지원하는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가 최근까지의 과학의 발전을 집대성하여 그린 하나의 큰 그림(세계관)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https://school.bighistoryproject.com/bhplive). 적어도 상당수의 다음세대가 빅 히스토리를 ‘표준적인’ 세계관으로 배우며 성장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세계관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패러다임 전환처럼) 우리가 가진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과는 직접적으로 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학적 세계관의 내용 중 일부는 전통적 기독교 세계관과 충돌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반대로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더욱 풍성해지는 경우도 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이 세계관의 문제로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빛을 던져줄 수 있는 기회도 있다.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라는 현실 앞에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2) 변화하는 인간관. 과학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두 번째 도전은 인간관의 문제와 관계된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밝혀진 바,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 인간이 다른 모든 생물들과 같이 공통 조상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 등은 인간의 자기 이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나 오늘날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인간이 기계와 공존하는 시대를 넘어 인간 문명이 기계 문명에 의해 대체되는 어두운 미래를 전망하게 할 때도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관의 변화는 앞서 언급한 세계관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현대인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질문을 두고 씨름하고 있는 현대인들과 함께 고민하고 대하며 그들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관, 가치관의 변화 가운데 일부는 전통적인 기독교 인간관에 큰 도전을 안긴다. 예를 들어, 인간의 기원과 본성에 관한 최근 과학 이론들은 인간의 특별 창조, 아담과 하와 및 타락의 역사성, 원죄의 유전, 영혼과 육체의 관계, 기독교의 고유성과 절대성,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의 이슈들에 있어 전통적인 견해를 재고하게 만들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치관이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3) 과학적 무신론. 마지막으로, 과학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세 번째 도전은 세속주의 혹은 무신론의 도전이다. 과학의 발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요청하지 않고도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역사가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고, 기술의 발전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이 땅의 역사를 결정하는 주권자라는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어 보이는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역사 속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으로 알려진 이들은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이 누리고 있는 권위에 호소하여 자신들의 세속주의적, 유물론적,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논리에는 과학의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무신론의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를 혼동하는 큰 맹점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 적대적인 한국의 사회문화 속에서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하게 우려할 사항이다. 과학적 무신론의 득세는 한편으로 오늘날 과학이 누리는 권위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과학적 무신론에는 거부감을 갖지만 현대 과학 기술이 누리는 권위에는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학의 권위에 기댄 무신론자들, 유물론자들, 세속주의자들의 주장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물리적인 세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믿음, 나아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자” 곧 사랑과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과학 신앙을 품은 신앙 교육


먼저 기억할 것은 한국 교회 안에서 신앙 교육을 담당하는 교역자나 교사들 중에 현대 과학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과학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힘들어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교회 안이나 밖에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대 과학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 자체는 신앙 교육과 관련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적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이 현대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신앙에 걸림돌이 되거나 신앙을 위협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 과학에 무관심하거나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한국 교회 내 신앙 교육은 청소년들이 학교나 미디어를 통해서 배우는 과학 이론을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언급하면서, 대체로 과학 교육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하지만 진화론을 포함하여 과학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갖고 있는 현대 과학 이론을 맹목적으로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신앙 교육은 불가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교육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아울러 과학 교육과 신앙 교육이 함께 갈 수 없다는 암묵적인 전제는 과학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큰 짐이 된다.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가 과학 교육에 대해 가진 부정적 인식과 태도는 신앙을 가진 다음세대 아이들이 과학 교육을 중심으로 한 학교 교육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거나 반대로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 다음세대 아이들이 현대 과학 이론뿐 아니라 현대 과학의 괄목할 만한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과학적 사고방식마저도 거부하고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다면, 그 아이들의 전인적 성장은 심각하게 왜곡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또래들과 상식에 근거한 합리적인 소통에 장애가 발생함으로 인해서 장차 교회 밖 공공 영역에서 리더십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결정적인 한계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 교육 안에 과학 교육을 품을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예로, 미국에서는 지난 2004년부터 일군의 기독교 성직자들이 창조과학과 지적설계 운동에 반대하여 진화 이론을 최상의 과학으로 인정하는 ‘성직자 서한 프로젝트’(The Clergy Letter Project)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에서 기독교 성직자들의 편지 내용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비롯하여 논쟁과 갈등의 영역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신앙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 권위 있는 문서로 받아들이지만, 그 중에 상당한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문자적으로 읽지는 않는다. 창조,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등 성경에 기록된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창조주와 창조세계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관한 무시간적인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종교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와 그 성격이 다르다. 종교적 진리의 목적은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있다. 여기에 서명한 우리들은 다양한 전통에 속한 기독교 성직자들로서 성경의 무시간적 진리와 근대과학의 발견들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진화 이론이 엄격한 검증을 거친 기초적인 과학적 진리로서 그 위에 인간의 많은 지식과 업적이 기초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진리를 거부하거나 이것을 단순히 “다양한 이론들 가운데 하나의 이론”으로 취급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과학적 무지를 받아들이고 그러한 무지를 우리의 자녀들에게 대물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은사들 가운데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또한 포함되며 따라서 이러한 은사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믿는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 하나님이 주신 이성능력의 충분한 활용을 배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교만한 행위에 해당한다. 우리는 학교 이사진들이 진화 이론을 인간 지식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가르치는 일을 지지함으로써 과학 교과과정의 순수성을 보전하길 요청한다. 우리는 과학은 과학으로, 종교는 종교로, 서로 구별되지만 동시에 서로를 보완하는 진리 형태로 남기를 원한다.




과학 혁명 이후 현대 과학의 발전이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충돌하고, 전통적 세계관의 붕괴를 초래하고, 무신론이 등장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가져온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과연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 곧 기독교의 핵심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오히려 현대 과학이 절제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풍부한 지식을 가져다줌으로써 기존의 잘못되고 편협한 생각을 교정하고 보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가 기독교의 핵심 진리와는 무관한 고대의 세계관을 고수하기 위해서 현대 과학의 발전에 맞서는 바람에 오히려 과학적 무신론이 득세할 근거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이제서라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과학 교육을 긍정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과학적 무신론의 존재 근거를 뿌리부터 제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요컨대,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 교육은 과학 시대의 상식을 가르치는 과학 교육을 적극적으로 품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교회와 믿음의 가정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와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빅 히스토리를 함께 가르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신앙 교육 현장에서는 낯선 풍경이지만, 신앙 교육이 과학 교육을 품고 있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이와 같은 연출은 그 자체만으로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현대 과학이 신앙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준다. 문자주의적 해석을 고집하는 일부 창조론자들의 우려와 달리, 신앙 교육의 현장에서 과학 교육을 병행하는 이 같은 시도는 과학의 언어와 달리 성경의 언어를 포함한 종교 언어가 시적, 은유적, 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1. 1. 이 글은 김정형 교수가 '문화선교연구원'에 기고한 글을 가져온 것입니다. (원문보기 http://www.cricum.org/1391?category=643369) [본문으로]
  2. 2. 예수님을 사랑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평화의 나라를 소망하고, 교회의 미래를 고민하며,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신학자. 우주의 종말에 관한 신학과 과학의 대화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 작성, <분단 한국을 위한 평화의 신학>의 저자,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조교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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