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책] 그동안 페이스북을 통해 다양한 서평을 써온 김영웅 박사님의 글을 연재합니다. 과학자가 읽은 신학책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심을 환대하기

확신의 죄 | 피터 엔즈 | 이지혜 역 | 비아토르 | 2018


김영웅[각주:1]



007에게 살인면허가 있다면, 과학자에겐 '의심면허'가 있다. 과학자들에겐 의심하는 행위가 공식적으로 허락된다. 과학자는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하며, 그 의심에 묻고 답을 해야만 하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다. 호기심이라는 멋쩍은 단어로 과학자를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자연 현상 이면에 놓인,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들을 하나씩 밝혀내는 과학자들에게 의심은 호기심과 맞먹을 정도로, 아니 어쩌면 호기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호기심은 의심으로 치열하게 진화할 때만이 그 빛을 발한다.


의심은 예고도 없이 회심한 그리스도인들도 찾아간다. 사소하고 우연한 일상의 조각들도 모두 의심의 통로가 될 수 있기에, 우린 달갑지 않은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이 손님의 방문을 결코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과학자이면서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의심은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인 셈이다.


의심의 방문에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권 밖에 없다. 하나는, 주무시지도 않고 성실하신 의심'님'의 공격을 혼신의 힘을 다해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외부로부터의 모든 공급이 차단된 채 안에서 곪거나 굶어서 자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불청객을 오히려 환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의 단점은 무너지는 것이 결국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버티는 동안은 자신이 견고하게 쌓아왔던 믿음의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전사로서 명예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끝은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처절한 인지부조화와 복합적인 합리화로 가득 찬 위선적인 자기기만, 그리고 파멸이다. 이 결말은 이 책의 저자, 피터 엔즈가 정의하는 '확신의 죄'의 열매가 아닐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오늘날 많은 목사들의 진공 포장된 설교와는 너무도 다른 현실세계를 경험하면서 의심의 순간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반석과도 같았던 안전지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크레바스 바로 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의심의 씨가 우리 마음 밭에 싹을 틔우고 속수무책으로 자라나면서 그 동안 믿어왔고 확신해왔던 세계는 소리 없이 은밀히 함몰하기 시작하고, 이는 곧 내면세계의 비가역적 붕괴를 가져온다. 이 부분에서 피터 엔즈는 말한다. 퓨즈가 끊어지고 믿음이 멈추는, 이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실상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이라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순간들을 통과하도록 묵묵히 인도하신다고. 아멘. 그렇다. 과학자에게 자양분이기도 한 의심은 신앙생활에서도 적이 아니라 주요 요소이며, 의심과 신뢰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우린 비로소 예수를 닮는 삶을 현실에서 일상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믿음과 의심, 그리고 알고자 하지 않는 지혜로움에 대한 책이다." 그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의 시작이요 과정이자 끝"이라고 한다. 그는 확신을 추구하고 고수하는 신앙생활의 위험을 간파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믿음은 올바른 생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역설하는데, 그는 이를 '확신의 죄'라고 정의한다. 그러한 태도가 '죄'인 이유는, 우리가 확신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실재이신 하나님을 지적인 영역에만 가두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우상 숭배와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는지에 대해선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불청객, 의심을 환대하면서 말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부분이라 쓰고 '모든'이라 읽는다) 그리스도인이 믿음과 신앙을 가지게 된 건 사실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직관적이고 다분히 감정적이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비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어 회심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이유가 단 하나라도 존재했었다면, 그 많은 전도와 선교 프로그램들은 모두 퇴색되어 버렸을 것이다. 믿음이 생기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며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연습을 하는 우리들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신비’ 이외에 적당한 단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신비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성자 예수를 닮는 삶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내는 과정 또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뢰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이성이 우리를 배신해도 그대로 남아있는 신뢰. 그것은 결코 의심하지 않고 확신에만 가득 찬 믿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확신에 찬 신앙, 과학처럼 앞뒤가 딱딱 떨어지는 깔끔한 신앙,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은 우리 자아에게 모든 통제권을 재부여해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역했던 죄인의 옛 자아가 적절히 타협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타인들에게 가치를 두지 않는 나르시시즘으로 살아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유 있고 인자하며 친절한, 모든 일상이 그저 아름다운 동화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신앙인들은 스스로 회심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비겁하거나 정의롭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가 책에서 예로 드는 것처럼, 시편과 전도서, 그리고 욥기에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으며, 어쩌면 당돌하고 불경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 구약 기자들의 솔직한 고백들이 많이 담겨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신앙인들의 무사안일, 안빈낙도는 기도제목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구약 기자들이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나서도 결국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으로 돌아간 것을 볼 때, 어쩌면 신앙생활이란 피터 엔즈가 말한 것처럼 “어쨌거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신뢰하는 삶이란 흔들리지 않는 독단적 확신을 넘어, 우리 삶에 지속되는 신비와 불확실성을 정상적인 신앙의 일부로 포용하여, 확신이 사라졌을 때에도 확실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만끽하며, 우리의 이성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함으로 우리의 통제권을 일체 내려놓고 창조주 하나님을 어쨌거나 신뢰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한 신뢰는 우리의 지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길들일 것이고, 의심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불청객은 하나님이 보내신 신성한 손님이 될 것이다.


과학에서 의심하듯, 신앙생활에서도 마음껏 의심하자. 의심하길 두려워하지 말자.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듯, 먼저 배운 지식에 갇혀 하나님을 그 지식에만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용기 내어 의심하고 묻고 답을 해나가자. 이 모든 과정이 곧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아름다운 여정이 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더욱 커질 것이다.



  1. 분자생물학과 마우스 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미국 City of Hope에서 Staff Scientist로 일하고, 과신대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