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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기초과정

무신론과 종교비판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4. 12.

알리스터 맥그래스 <신 없는 사람들>(IVP, 2012)을 읽고

 

글_ 홍승표

 

 

* 이 글은 과신대 <기초과정II> 과제로 제출된 글입니다. 

 

무신론자들이 종교에 관해 비판할 때, 그들은 종교가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즐겨 사용한다. 즉, 종교는 진리가 아니며 가상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폭력적 기독교’, ‘비이성적 기독교’, ‘비과학적 기독교’로 나눠 그 논증들에 대한 나의 의견을 낼 것이다.

 

 

1. 종교는 폭력적이다

 

해리스와 히친스 같은 학자들은 종교적 신념이 곧장 자살 테러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만약 모든 종교적 신념이 테러로 이어진다면, 세계의 모든 곳에서는 테러와 폭력이 쉬지 않고 자행될 것이다. 이와 같은 논란에 대해 시카고 대학 정치 과학 교수 로버트 페이프는 ‘자살 테러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에, 아니 세상의 그 어떤 종교 사이에도 연관성은 찾아볼 수 없다.’고 발표하며 자살 폭탄 테러의 근본 동기가 정치적인 것이었음을 알려 준다.

 

기독교의 근본은 ‘사랑’이다. 사랑이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온전하게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 것이다. 예수는 몸소 자신의 가르침과 행동에서 줄곧 폭력을 반대했었다. 유대 민족을 로마의 압정으로부터 구원할 메시아로 인식되었던 예수는 유대 민족들의 바람과는 달리 오히려 인내하고 사랑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백마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었다. 이는 기독교의 근본이 폭력보다는 비폭력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실히 하는 대목이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지만, 이는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신상의 문제이다.

 

종교가 폭력을 유발한다면, 종교가 없는 사회는 어떨까? 구 소련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소련 내에서 종교를 없애고자 했었다. ‘종교가 만악의 근원이다’라는 이론이 인정되려면 소련은 그 어떤 폭력도 자행되지 않는 지상낙원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공산당 정부는 비폭력과 지상낙원과는 거리가 먼 정책들을 시행했었다. 이는 종교가 사회적 폭력의 근원이라는 의견이 틀리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폭력은 종교에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욕망에 의해서 발생한다. 옛날의 각종 정복 전쟁이나 정치적인 문제들로 인해 발생한 세계대전 등을 통해 보았을 때, 종교는 오히려 전쟁 원인의 주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몇 개의 사례들로 종교가 폭력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오늘 서울에 비가 왔다는 이유로 ‘서울은 항상 비가 오는 곳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2. 종교는 비이성적이다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무조건적이다’라고 비판한다.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면서 무조건 믿기만 하거나, 또는 그 믿음을 남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믿음을 증명해내라며 압박해내기도 한다.

 

뛰어나 철학자이자 역사가 이사야 벌린 경은, 인간의 확신을 다음의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1. 실증적 관찰을 통해 세워질 수 있는 것들

2. 논리적 추론을 통해 세워질 수 있는 것들

3. 둘 중 어느 것으로도 입증될 수 없는 것들

 

1번은 자연과학을 통해, 2번은 논리와 수학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그리고 3번째 범주는 인간의 문화를 형성했고 인간 실존의 방향과 목적을 제시했지만, 이성이나 과학을 통해서 입증되지 않는 가치나 관념 같은 것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형제애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야한다’라는 세계 인권 선언의 진술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진술은 물증이 남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신념이 물증이 없다 해서, 이 같은 발언들이 ‘비이성적인’ 발언으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무신론은 모든 세계관은 이성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있다는 불편하지만 사실인 진실을 거부한다. 즉 이들은 그저 ‘열성 무신론’이라는 종교를 가지고 그들의 색안경으로 세상을 보려는 자들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아우슈비츠 학살과 같은 각종 만행들을 ‘신의 비도덕적 행위’로 취급하여 종교를 공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만행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의해서 자행된 일들이다. 내가 오늘 아침에 사과를 먹었다고 가정해보자. 사과를 먹은 것은 신의 뜻인가? 정답은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금 나오라고 기도해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즉답’을 요구한다. 이는 어찌 보면 강력한 근본주의적 믿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간은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일어난 만행들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습성이 있다. 요즘에는 그저 그 범인 찾기의 대상이 신이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대표적인 예로 히친스와 도킨스가 신에 대해 퍼붓는 저주가 있다.

 

‘이성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 누구도 ‘이성’의 한계성을 명확하게 지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대부분이 이성적으로 여기는 보편적 가치는 확실히 존재한다. ‘무고한 살인은 나쁜 것이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나쁜 것이다.’, ‘부모를 폭행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명제들은 이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종교가 비이성적이라면, 이와 같은 명제들에 반기를 들고 ‘살인해라’, ‘도적질해라’, ‘불효해라’라며 오히려 권장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타적인 사랑을 우선으로 하는 종교다. 그렇다면 오히려 기독교는 어떤 것보다 이성적인 것으로 취급받을 여지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3. 종교는 비과학적이다

 

과학은 단지 세상의 형태와 과정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고 노력한다. 과학은 그 의미와 가치 판단의 문제에 큰 도움을 주는 학문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을 통해 종교는 여러 가지로 곡해되어왔다. 맥그라스의 의견에 따르면, 과학이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 합리적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참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무엇인가?’이다.

 

그렇기에 과학은 종교에 대한 과학 이론을 입증하지 않는다. 아직 과학은 세상의 기원에 관련된 문제들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과학은 이 가설들 중 어느 하나도 확실한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과학적 사실과 세상의 기원에 관한 가설을 통합시켜줄 수 있는 절대적 이론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실증적이다. 이는 관찰 가능한 것에서 멀어지게 된다면, 그 이외의 것들은 전혀 입증해낼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알고 있다. ‘사랑’, ‘우정’, ‘연민’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내기란 어렵다. 그러니 무신론자들이 과학을 들이밀며 종교를 공격하는 것은 세상 모든 가치를 가시화하려는 몽매한 노력에 불과하다. 과학은 도덕의 기준을 세울 수 없다.

 

또한 과학은 인간의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과학은 답을 해줄 수 없다. 이에 대한 답변은 많은 사람들의 철학적 논고에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 과학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입증할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같은 것들은 입증할 수 없다.

 

 

4. 결론

 

종교는 폭력적이지도, 비이성적이지도, 비과학적이지도 않다. 이는 몇 개의 사실을 가지고 전체를 일반화 시키려는 그릇된 생각이다. 그러나 어째서 이와 같은 비판이 나오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나를 비롯한 교인들이 완전하지 않아서’라고 답하겠다. 교인들이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오해와 비판들이 더욱 더 불거진 것이 아닐까. 때문에 종교 비판을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기보다는, 사회학적인 수용을 통해 현재 기독교가 앓고 있는 문제점을 조금 더 확실하게 파악하고 고쳐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없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여백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채운 부분만 가지고만 이야기한다. 우리가 변호한다고 일일이 대답해봤자, 그것은 온전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변호하는 것이 변호가 된다면, 하나님은 궁색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변호가 필요 없다. 하나님에 대한 변호는 나의 신앙에 대한 변호일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많은 무신론의 도전에 맞서게 된다. 동시에 어째서 종교를 비판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을 때 종교는 한층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을 통해 교계가 변화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신을 변호하는 것이 온전한 변호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무기력하게 ‘알 수 없다’라는 태도로만 일관한다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던 예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을 대할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그 문제에 대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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