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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신앙은 애매함과 모호함의 연속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5. 3.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과정, 과신대 출판팀장)

새물결 플러스에서 튜터로 활동 중인 나는 기독교가 말하는  창조 이야기와  과학이 자연을 탐구하여 밝혀낸 물질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해 오고 있다. 올 해 함께한 책은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를 시작으로  「창조기사논쟁」, 「인간의 타락과 진화」  그리고 「과학과 하나님의 존재」이고 5월은 「케노시스 창조이론」을 준비 중이다.

우리의 독서 여정을 돌아보면, 거센 파도를 만난 듯 우리의 기존의 생각들이 거세게 흔들려 불안해 했다. 도저히 양보 할 수없는 교리적인 부분, 예컨대 원죄와 타락과 구속과 같은 양보할 수 없는 교리적 프레임을 두고서 성서가 우리가 믿어 온 대로 그것을 말하고 있느냐는 도전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리둥절 하기도 했다.

 

과학의 발견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와해시키고 결국에는 하나님도 부정하게 만드는 것 같아 두려웠다. 두려운 마음에 아예 귀를 막고 회피하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과학의 불완전함을 들어 과학적 발견들에 대해  팔짱끼고 유보하는 자세를 넘어 회의하는 눈초리로 맞서기도 했다.

다윈의 진화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기독교와 과학이 갈등이라는 프레임이 과대 광고처럼 부풀려진 것이었으며 이미 정치적인 맥락에서 기독교의 교리적 개념이 퇴락되고 있었음을 보기도 했다. 빅뱅 우주론과 현재의 우주를 존재케 하는 많은 우주 상수들을보면서 미세조정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들을 지나 미세조정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반대하기위해 평행우주며 다중우주를 말하지만(윌리엄 크레이그의 지적)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존재의 망각일 뿐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기도 했다.

창조와 기원에 관한 수 많은 담론들은 실제의 파생태들에 불과하지만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파생되고 추상된 것들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제서야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것, 확고 부동한 것에서 부터 출발하여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잘못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이다. 예건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명제로 사랑이 다 가능하게 했다고 시작을 해버리면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럴 경우에 악의 문제라는 암초에 걸려 넘어진다. 

사랑이라는 보자기로 다 덮어 버릴 것이 아니라 우주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혁명적인 발견과 인생사의 질곡이라는 형상들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로소 그 형상들 기저에 흐르고 있는, 그 형상들이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그 원천이 다름 아닌 자기비움, 곧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좀더 명료하게 형상과 실체를 말해야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령 일곱 사람이 그들의 몸으로 한 마리의 고양이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고양이의 형체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고양이를 이루는 실체들만 있고 실체들에 의한 부대 효과로 나타난 고양이 형상일 뿐이다. 양자장론에서 바라본 세상은 마치 전기장에서 하나의 효과처럼 전자라는 결과물이 나타나듯이. 우리는 물질 자체의 실체를 보는것이 아니라 기저에 있는 장의 일부, 즉  형상의 결과물을 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진화라는 토대 위에서 발전한 생물학과  유전적 증거로  공통의 조상및 생명의 다양성이 설명 되고, 화석상의  증거와 방사성 원소의 반감기를  통해 지구의 나이를 가늠하며  빅뱅우주론을 통해 우주의 시작과 우연성으로 시작된 생명의 고리들이  드러나는 모든 형상들의 기저에는  잠잠하고 온유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물이  있음을 고백한다. 

우리 책모임에는 과학과 성경에 대해 확실한 하나의 결론을 기대하고 그 결론을 하나의 원리삼아 신앙 생활을 할 수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로 참여한 분도 있었을 것이고, 현대 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대화하려는지 궁금해서, 혹은 과학 내용이 어려워서 책 모임에 함께한 분들, 막연하게 들어 온 진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동참한 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 분들과 열심히 책 나눔을 한 후, 책을 덮고서 나온 그 분들의 첫마디는 "다시  제자리네! 속 ,시원하게 다 말해주는 줄 알았더니..."였다. 린 마굴리스가 생명이란 물질들이 모여 비척걸음으로 도약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듯이 우리의 과학과 신학에 대한 의식과 감수성도 그렇게 비척거리며 도약하지 않을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우리의 신앙도 흔들리며 꽃을 피워내지 않을까?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반복되는 모호함의 자리에 서 있는것 같지만 우리의 반복은 헐벗은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 내는 반복이다. 단순한 원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만드는 나선형인 원의 반복이다. 그 차이는 사고의 도약이며 인식 영역의 확장이다. 딱 떨어지는 하나의 속 시원한 결론 처럼 위험한 독선이 어디 있을까? 그 결론은 또 하나의 도그마이고 우상이다. 

우리 책 모임에 참여한 분들은 현대 과학 기술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외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가진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 외쳐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처럼 시대의 징표들을 읽어 내고 부조리한 사회와 권력 구조들을 전복시키는 그러한 역동적인 예언자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독교가 말하는 창조와 현대 과학이 말하는 기원 사이에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와 마음을 열고 들어 보자는 것이고, 우리가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오해는 없었는지, 잘 못 끼워진 첫 단추는 없었는지, 그동안 우리가 들어왔던 교리적인 것들에 대해 전거로써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외치자는 것이다.  

굳어진 신앙관과 한 가지의 성경 해석,그리고 과학 주의의 흐름에 역류하여, 하나님의  충만하고 풍성한 사랑의 손길 안에서 자유하길 원하며  우리의 책모임에서는 계속 흔들릴 작정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이면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이다. 카바노프는 양자역학적 사고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인식 너머에 실재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신학적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적 상상력과 함께 5월에는 「케노시스창조이론」에서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며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길 원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  매력을 함께  향유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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