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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기술이 발전할수록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구체화된다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7. 31.

 

강응섭 (예명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정신분석학-리더십학 교수)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계통발생적 측면에서나 개체발생적 측면에서 줄곧 제기되어 왔다. 인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역사 이전 시기에는 그림, 건축 등 비언어적 형태로, 역사 시기에는 언어적 형태로 기록을 남겼다. 비언어적 형태는 언어적 형태 속에 스며들어 그 흔적을 공유해 왔다.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그 흔적을 본다. 자연의 초기 모습, 이미지로 그려지는 역사 이전 시기의 그 모습은 역사 시기의 산물인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실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언어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언어는 역사 이전 시기의 모습을 역사 시기에 전하려고 도입한 고난도의 기술(Technic)이다. 그 기술을 터득한 이래로 인간은 계속해서 그 기술을 정교하게 만들어 왔고, 그것을 이용해 기록 문화를 남겨 왔다.


철기시대의 산물인 ‘쟁기’로부터 ‘정보화 기술’과 ‘디지털 기술’이 대두되기까지 우리는 지금, 네 번에 걸친 산업혁명의 산물들과 공존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이어져 있다. 창세기 2장은 그 질문에 근거하여 서술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다”(5절)는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6절)와 대조를 이룬다. 6절은 1장 2절의 ‘깊음(테홈)’에서 시작되는 물의 오름과 연관된다. 즉, 5절과 6절의 대비는 물의 내림과 물의 오름의 대비, 물의 없음과 물의 있음의 대비를 보여 준다.


우리는 보통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말하는데, 창세기 2장에서는 물이 아래서 위로 올라온다고 말한다. 물이 아래서 위로 올라오는 모습은 안개 낀 새벽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지면을 적실 정도로 충분한 안개가 올라왔다. 대류 현상의 물기로 인해 충분한 수분을 머금은 흙은 하나님이 사람을 짓는 재료가 된다. 그리고 바람은 지어진 사람을 말린다. 그래서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기록한다. 기록 문자가 없던 시기의 모습을 기록 문자로 정리함으로 인간의 기원을 담고 있는 5~7절은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이에게 큰 실마리를 제공한다.

 

바울은 이 구절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다루었다. 그러면서 ‘생령’(산 영)과 ‘살려 주는 영’을 대비한다. ‘산 영’(a living soul, ψυχη, psyche)은 창세기 2장 7절의 네페쉬(nephesh)의 번역이다. 기독교에서 보통 ‘영혼’이라고 말하는 ‘프시케’는 심리학(Psychology), 정신분석학(Psychanalysis)의 어근이 된다. 히브리어 ‘네페쉬’는 목구멍을 지칭하는 해부학적 용어이자 ‘갈증’이란 의미를 지닌 정동적 용어이다. ‘네페쉬’는 살기 위해 마시고 먹고 호흡하는 통로인 목구멍이자, 자신의 갈급함을 표현하는 말을 전달하는 통로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최초 이름(명사)은 ‘네페쉬’였다. 그 ‘네페쉬’가 곧 ‘프시케’다. 살려 주는 마지막 아담인 예수로만 부활을 맞이하는 자가 ‘산 영’이다.

 


인문학의 역사는 ‘프시케’에 관계된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인문철학자들에 의해 ‘프시케’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다. 이런 세계관은 산업혁명의 배경이자 후경이 된다. 산업혁명은 인간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지만 그에 따른 역효과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프시케’는 이전보다 더, 새로운 형태의 고뇌를 하게 되었고, 고뇌하는 인간의 ‘프시케’에 관한 연구가 데카르트, 칸트, 헤겔에 의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인간 고뇌에 대한 탐구와 산업혁명의 진전 시기는 서로 겹친다. 프로이트(1856~1939)는 이 둘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접점 시기에 활동했다. 그는 ps(psi, 프사이)-system을 구상하면서 몸 밖과 몸 안의 관계를 정립하고자 그 과정과 진행을 도면으로 그렸다. 물론 프로이트의 도면은, 여러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 중,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도면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제2차 산업혁명이 한창 여물어 가던 시기에, 곳곳에서 나타난 폐단의 인과관계를 연구했던 신경학자였다. 그는 그 문제를 진단하고자 몸 밖과 몸 안을 대조시키면서 ‘감각-기억-무의식-의식’이라는 가교 장치를 마련한다. ‘무의식’은 몸 밖과 몸 안을 잇는 하나의 장치다. 프로이트는 이걸 ‘비계’(飛階)라고 불렀다. 건물을 짓기 위해 세우는 장치에 비유한 것이다. 비계를 통해 작업하다 보면, 도면에 그려진 것이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하나님이 흙으로 빚고, 그것에 생기를 불어 넣어 아담이라는 생령이 되었듯이.


하나님의 이런 일하심은 네페쉬, 프시케로서의 인간을 만들었다. 창세기 3장은 이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자연과 사귀는지를 보여 준다. 에덴에서의 삶 기록은 기록 이전의 역사를 잘 나타낸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릴 자(1장 26절)로서 네페쉬인 아담을 만들었다. 그 일을 할 공간인 에덴에 아담을 데려다가 다스리는 일을 수행하게 했고, 그 일을 도울 하와도 주었다. 다스리는 일은 각 실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스리는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무엇이며, 염두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담에게 규율을 주었고, 아담은 그것을 준수하는 가운데 실재와 소통하면서 다스림을 수행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제시한 규율은 아담과 하와에 의해 파괴되었다.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인 네페쉬로서의 아담과 하와, 이 둘은 하나님의 규율을 이뤄내지 못했다. 왜일까? 뱀이 등장하여 소통을 방해했기 때문이고, 뱀의 제안을 듣고 방황이 부족했던 탓이다. 하나님의 제안을 염두에 두었다면 더 방황했어야 했다. 속는 자는 방황하지 않지만, 속지 않는 자는 방황한다.


왜 방황이 어려운가? 하나님이 그렇게 지어서인가? 인간이 속임수를 피할 능력을 개발하지 못해서인가? 다시 말해, 속임 구조로 만들어져서인가, 인간이 속임에 안주해서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은 수렴되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양날의 주장처럼 이어져 왔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전자는 방황 없는 ‘믿음의 시대’를 대변하고, 후자는 방황하는 ‘이성의 시대’를 대변한다. 의심은 근대를 출범하게 했다. 의심은 속지 않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에서 비롯되었다. 속지 않으려는 인간의 무기는 의심이다. 그것은 곧 이성에 대한 신뢰였다. 


그런데 이 신뢰 역시 속임임을 밝힌 연구가 제시되었다. ps(psi, 프사이)-system을 정립한 프로이트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뒤엎었다. 믿음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이어져 온 서양사회는 또 다른 형태의 속임 구조를 밝힌 프로이트로 인해 적잖이 불편해했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주장이 무신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대한 교리에서 비롯된다. 정말 속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누구의 의심이 믿음에 근거한 것인지를 깊이 상고해 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하나님이 지은 인간의 원래 모습이 어떠했는지? 기록 문자가 없던 시기의 일을 기록 문자로 남긴 창세기 도입부로 돌아가 논의를 다시 시작하면 프로이트의 작업이 의미 있지 않을까? 


과학 기술 발전에 따른 인간에 관한 견해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지금까지 주장되던 이론은 새로운 질문을 받게 된다. 이런 질문을 통해 이전에 내렸던 주장을 새롭게 생각해 보는 기회가 주어졌다. 과학이나 기술이 발전한다는 것은, 새로운 과학 이론이나 기술이 제기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심, 하나님이 갖고 있던 도면을 밝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 환경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속고 있는가’, 이 질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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