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카데미/기초과정

지난 5주간을 돌아보며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10. 18.

 

글_ 차정호 (대구대학교 과학교육부, 기초과정II 5기 수료자)

 

 

1. 지난 5주간을 돌아보며

 

달력을 열어 놓고 지난 일정을 돌아보니 과신대 기초과정 II를 시작한 게 8월의 마지막 주였다. 중간에 두 차례의 휴식을 포함하면 8주, 거의 두 달간의 긴 여정을 달려왔는데 어느덧 마무리할 시점에 와있다. 광고지를 보면서 등록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때로 돌아가 나의 상태를 생각해 본다.

 

남아공에 있을 때 온라인으로 기초과정 I을 수강했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창조론(설)에 대한 많은 책을 읽으면서 꾸준하게 공부해왔는데 아쉬움이 많았다. 영상을 보든 책을 읽든 정보를 습득하면서 지식은 많아지는데 뭔가 머릿속으로는 잘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랄까. 정리를 도와줄 촉매가 필요했다. 우리 지역에는 책모임이 없으므로 내 유일한 대안은 기초과정 세미나 참석뿐이었다. 마침 2학기에는 월요일에 강의가 없었고, 기차 시간을 잘 따져보니 세미나 마치고 돌아오는 것까지는 가능하겠다 싶어 등록을 단행했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참가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접했던 1주 차 시간을 통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각계각층에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특히 나보다 더 먼 경산에서 매주 이 세미나에 참석하는 분들로 인해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갈등, 독립, 대화, 통합으로 나누어 고찰했던 2주차 세미나는 내용이 다소 어렵게 다가오긴 하였으나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분석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3주 차 세미나에서는 성경에 창세기뿐 아니라 시편이나 예언서를 포함한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 언급이 다양하게 언급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그간 창조론에 관한 관심이 창세기 1, 2장에 편협되게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성경을 일관되게 해석할 때 젊은 지구론의 바탕이 되는 문자적 해석이 입지가 좁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무신론의 핵심 주장을 종교의 폭력성, 비합리성, 그리고 비과학성 측면에서 살펴봤던 4주 차 세미나에서는 무신론의 주장에 대한 나의 관점을 정립할 수 있어 특히 의미가 있었다. 한때 관심을 가지고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샀지만 괜한 두려움에 책장에 꽂아만 두었는데 이제는 담담하게 읽을 용기가 생겼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이 이런 상황을 빗대는 게 아닐까 싶다.

 

5주차 세미나에서는 기존의 창조론 논의의 판을 뒤엎고자 ‘창조설’과 ‘창조론’이란 용어를 새롭게 정의하고 창조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논의했다. 창조과학 지지자나 과신대나 모두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아니냐, 정작 중요한 것은 창조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가 아니냐는 관점이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비록 창조과학 지지자들의 정치적 선동에 가까운 전파 활동이 여전히 이 판의 물을 흐리고 있지만, 창조론의 중요한 본질을 짚고 가는 것은 나름의 의미는 있어 보인다.

 

 

2. 과학의 도전과 나와 교회의 대응

 

이렇게 5주 간의 지적인 여정을 통해 내가 정리할 수 있는 과학의 도전은 1)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며 오히려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무신론의 공격, 2) 성경과 과학의 관계를 오해해서 둘을 일치시키기 위해 문자적인 성경 해석을 교조적으로 전파하는 창조과학 지지자들의 열광적인 활동, 그리고 3) 생명 공학 및 인공지능으로 대표할 수 있는 첨단 과학기술의 도전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1) 무신론의 공격에 대한 대응

 

무신론의 교회에 대한 공격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전파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방법론적 무신론을 채택하는 과학 연구와 학교 과학교육을 통해 과대 포장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과학 연구가 가지는 한계나 과학적 연구 방법의 본질 등을 제대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과학’ 혹은 ‘통합과학’으로 배우는 교과서에는 과학의 본성(nature of science)에 대해 가르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들이 학교 수업을 통해 제대로 가르쳐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냥 한번 훑어보고 넘어가고 있다면, 이 부분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실태를 밝히면서 상황을 개선해가는 일은 내 전문성의 영역에서 해볼 만한 과제라 하겠다.

 

한편 공교육에서 과학의 한계에 대해 가르치는 부분은 아무래도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종종 관련 내용은 무시되기 때문이다. 또한 수업이 이뤄진다 해도 강조되는 내용이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과학의 한계와 무신론의 공격에 대한 논점을 주일학교나 특별 세미나 등을 통해서 이해시키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신 없는 사람들>의 내용을 주일학교 아이들의 눈높이 맞춰 설명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어쩌면 그 책 내용으로 만화책을 출판해도 좋겠다.

 

2) 창조과학에 대한 대응

 

한때 창조과학 지지자로서 대학에서 교양 강의도 개설했던 내게는 10여 년 전의 내 행동에 대해 빚진 심정을 가지고 있다. 창조과학으로부터 돌아 선 이후 지금까지 지적인 순례를 지속해 오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료도 차근차근 모으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대학교에서 15주 동안 3학점으로 가르칠 수 있는 강의를 만들고 싶다. 일방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수업이 아닌 같이 생각하고 토론하는 수업이 되었으면 한다. 60-70명이 수강하는 강의에서 어떻게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을지도 함께 고민할 지점이다.

 

교회 차원에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불과 며칠 전에도 시내 어떤 교회에서 열리는 창조과학 세미나 광고를 볼 정도로 창조과학 지지자들의 열심은 전방위적이다.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성도들과의 관계가 걱정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반대를 표하기보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표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그러나 만약 창조과학의 내용과 성경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성도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가려운 곳을 긁어줘야 한다. 특별 강연이나 독서모임을 통해 성도들의 지적인 수준을 높이는 일에 교회가 힘쓸 필요가 있다. 성경해석에 관한 것도 좋고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것도 좋다. 성도들이 성경 해석에 조금의 유연성만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문자적 해석에 대한 집착에서 한 발만 물러설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창조과학의 입지가 좁아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한편으로는 창조과학을 포용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동안 창조과학과 과신대 사이에 극명한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김정형 교수님의 주장처럼 둘 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아니던가. 창조과학도 하나님의 창조라는 큰 우산 아래 함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대립각을 세우기 보다는 그쪽 진영의 열정적인 에너지를 선한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창조과학과 과신대의 대결 구도를 무신론과 창조론의 대결 구도로 프레임을 전환하려는 노력을 통해 창조에 대한 풍성한 논의가 진행되면 좋겠다.

 

3) 첨단 과학기술의 도전

 

당장이라도 실험실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수 있을 수준으로 생명 과학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과학의 최전선에서 어떤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는 대중들은 어쩌면 곧 과학이 조물주의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자부심과 두려움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후로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크다. 심지어 설교조차 인공지능이 하게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이처럼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첨간 과학기술은 끊임없이 교회에 새로운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이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어쩌면 첨단기술의 발전을 교회와 신학이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 임파서블일 것이다. 그렇다고 대책없이 막연한 두려움만 키워갈 것인가. 무시 혹은 무관심은 교회를 우물 안 개구리 상태로 고립시킬 수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과신대가 기여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과학자와 신학자 사이의 대화를 통해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 내용이 가지는 신학적 함의를 논의하고, 이를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낼 사명이 과신대에 있다고 본다.

 

 

3. 마치며

 

지나간 세미나 자료들을 넘겨 보며 그새 공부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때로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입력조차 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매 시간마다 한두 가지 관점은 내 생각을 선명하게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처음 제출했던 과제에서 나의 목표로 설정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난 두 달간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나의 지적인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 가운데 대학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강의를 열어 오랜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