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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 Q

[과신Q] 8. 증명되지 않는데 어떻게 믿나요?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11. 4.

 

[과신Q] 8. 증명되지 않는데 어떻게 믿나요?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현대인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데 어떻게 신을 믿을 수 있나요?

기독교인 중에도 신이 존재하고 우주를 창조했다는 진리를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증명과 믿음에 관한 질문들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믿음1: 지적 동의 혹은 수용


‘믿음’이라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과학이나 어떤 명제 혹은 주장에 동의한다 혹은 수용한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믿는다면 그에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과학적 증거가 충분하고 입증되었기 때문에 상대성이론을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재판에서 ‘살인죄 선고’를 받은 사람을 살인범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충분한 증거가 나왔고 범죄 사실관계가 입증되었으니 법원이 유죄 선고를 내렸을 것이라는, 다시 말해 법원의 판단을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어떤 명제나 주장에 관해 지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또한 그 명제나 주장의 내용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완벽하게 증명된 명제나 주장이라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100퍼센트 완벽하게 증명되지는 않기 때문에 믿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전히 틀릴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사실도 가변적이고 법적 증거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살인 도구와 지문을 비롯한 증거들이 확보되었지만, 다른 알리바이가 있거나 살인 동기가 불충분한데도 유죄 판결이 나왔다면 어떨까요? 법적인 증거들이 살인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심지어 살인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 증언을 했다 해도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이 판결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살인을 입증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법원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믿음2: 인격적 신뢰


반면에 전혀 다른 의미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가 살인범이라고 믿을 수 없어. 살인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야.” 법원 판결에 대해 살인범과 가까운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증거가 충분한지 혹은 법리적 판단이 합리적이고 동의할 만한지 따져보고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격적 신뢰를 뜻합니다. 평소의 인품이나 성품을 고려할 때 그는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며 착한 사람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과학적 주장이나 명제적 진리에 관해 작동하기보다는 주로 인격적 관계에서 표출됩니다. 가령, ‘나만 믿고 따라와’ ‘이번 한 번만 믿어 줘’ 같은 말들은 과학적 증거나 명제적 증명보다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가리킵니다. 가족이 함께 재난을 당했거나 난관에 부딪혔을 때 자녀는 부모를 믿고 따릅니다. 부모가 이 어려움을 극복해낼 능력이 있다고 증명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


지적 동의와 인격적 신뢰, 이 두 가지 종류의 믿음 중에서 기독교 신앙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흔히 우리는 신앙을 과학적 증명의 영역으로 오해합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학적 증거들이 충분하다면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상대성이론에 동의하듯이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면 그만입니다. 복음이 진리라고 증명된다면, 입증된 과학지식과 마찬가지로 그저 동의하고 수용하면 됩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신앙은 이런 명제적 동의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고 성경은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과학적 증명이나 증거를 따져서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령,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을 때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킬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신용등급 점수를 따져가며 과학적 증거와 판단을 거쳐서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이 약속을 성취하시겠다는 건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건지, 의구심이 들고 이해되지 않아 답답했을 겁니다. 약속이 성취되리라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쉽게 동의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약속을 이루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과학적 증거나 증명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뢰에 기초한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과학적 증거에 기초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일입니다.

‘믿음’은 헌신을 요구한다


지적 동의와 인격적 신뢰, 이 두 가지 믿음은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다릅니다. 어떤 명제를 믿는 믿음은 지적인 동의 수준으로 끝나겠지만, 인격적 신뢰는 삶의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상대성이론을 믿거나 믿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일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과학지식을 비롯한 어떤 명제에 지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큰 비용을 치르지는 않습니다. 물론 중력 법칙을 믿지 않는다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불상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을 포함한 모든 명제에 대한 동의는 일정 수준의 헌신을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비말로 감염된다고 믿으면, 즉 지적으로 동의하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지적인 동의에는 인생을 걸거나 삶의 방향을 바꿀 만큼의 커다란 헌신이 요구되지는 않습니다.

무신론을 믿는다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이 과연 어떤 헌신을 요구할까요? 이런 지적 동의는 삶의 비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단지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에 그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신앙일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신약시대에는 귀신들도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고 동의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동의는 신앙의 출발점일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로 신앙은 아닙니다.

반면에 인격적 신뢰는 커다란 헌신이 요구되며 때로 위험이 따르기도 합니다. 빚을 내 주식투자를 하는 배우자를 신뢰했다가 가정이 파탄 날 수도 있습니다. 평소 신뢰했던 직장 상사가 어느 날 성추행을 한다면 배신감으로 인한 충격과 상처는 더욱 깊고 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절친’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결정적인 배신을 경험하게 된다면 과연 무엇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신뢰하는 일은 그만큼 위험하며 헌신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이런 믿음은 명제적 동의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사람을 신뢰하는 일은 바보 같은 짓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부모나 친구 혹은 재력가나 정치인을 신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며 신의 지위를 버리고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에 맞는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의 약속과 가르침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종종 손해를 봐야 하고 덜 누려야 하고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려면 많은 비용이 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던져야 합니다. 믿음은 공짜가 아닙니다. 믿음은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헌신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증명·증거 아닌 신비의 영역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이 과학으로 증명되었거나 성경의 진리가 입증되었기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신뢰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신앙은 증명이나 증거의 차원이 아니라 신비의 영역입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와 비슷한 종류의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심리 분석, 성격과 취향 비교 등 어느 정도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사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그를 위해 희생하는 일은 사실관계에 기초한 과학적 설명으로는 불충분한, 인격적이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다양한 인격적 관계들의 정점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과학으로 증명되거나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헌신할 때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분인지 배우게 됩니다. 신뢰는 헌신을 요구하며, 헌신을 통해 이해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며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 더 읽기

대화 - 철학자와 과학자, 존재와 진리를 말하다         

강영안·우종학 지음 / 복있는사람 펴냄


과학과 철학의 관점에서 진리와 존재를 탐구한다. 자연과학이 답할 수 있는 질문과 그 너머를 향하는 질문을 신중하게 분리하고, 그 경계를 인정할 때 하나님의 창조를 더욱 풍성하게 살필 수 있음을 설명한다.

 


출처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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