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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 Q

[과신Q] 9. 우리가 믿는 신은 누구입니까?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12. 3.

 

[과신Q] 9. 우리가 믿는 신은 누구입니까?

 

우종학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지적 이해를 토대로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


기독교 신앙은 과학이 발전한 현대사회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구는 편평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상식이 일반적이었던 고대 근동지역 사람들이 믿었던 신에 대한 신앙이 오늘날 과연 어떤 적합성이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부족을 말살하는 잔인한 신이라며 폭력성을 비판하거나, 기독교는 가부장제에 기반이 된 구시대적 산물일 뿐이라고 냉소하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들을 접하면서 질문이 떠오릅니다. 신을 믿는다고 말할 때 과연 우리는 누구를 믿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신을 상정하고 비판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지성에 반대되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믿음은 지성을 넘어서지만 동시에 지성적 토대가 필요합니다. 무언가를 믿으려면 그 대상을 인지하고 그려내는 지적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고 인식되지 않으면 믿음을 갖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대상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하더라도 어렴풋하게나마 기술하고 그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대상이 없다면 믿음은 의미가 없으며, 그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은 결국 지적 작업입니다.

가령, 밤하늘의 별 중에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가진 별이 있고 그 행성에는 외계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믿음은, 별과 행성, 그리고 외계생명체에 대한 지적 이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고양이나 다람쥐가 그런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고아와 과부들을 돕는 사회사업을 하게 될 거라는 믿음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은 가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지적 활동, 즉 사물에 대한 인지, 세상과 나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지식이 종합된 하나의 그림을 바탕으로 세워집니다.

반대로 믿음은 그런 지적 토대를 넘어 자명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대상에 작용합니다. 그 과정에는 뚜렷한 직관이나 강한 의지나 감정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나와 세상을 그려내는 그 그림에서 뭔가 채워지지 않은 부분을 메꾸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적인 작업만으로는 완벽한 그림을 그려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물질의 존재는 자명하나 어떻게 처음 물질이 생겼는지 그 기원을 설명할 수 없는 과학의 한계 앞에서, 끝없이 답을 찾는 우리의 호기심도 믿음으로 지향하게 만드는 하나의 추동입니다. 물질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해 왔다는 믿음을 갖거나 혹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해 온 신이 물질을 창조했다는 믿음을 갖거나 간에 이런 믿음은 세상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넘어섭니다.




지적 이해에 따라 변하는 믿음의 대상


믿음이 지적인 작업을 토대로 그 한계를 넘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믿음의 대상에 대한 이해가 변한다는 사실에 쉽게 동의가 됩니다. 어린 아기에게 엄마는 모든 것이 가능한 전능한 존재로 인식되지만, 아기가 자라면 엄마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학교 선생님은 모르는 것이 없는 존재로 알고 있던 초등학생의 생각이 산산이 부서지기도 합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인지할수록 세상을 점점 더 복잡한 그림으로 인식하게 되면 그에 따라 믿음의 대상에 대한 이해도 함께 변합니다. 때로는 더 또렷해지고 때로는 점점 더 흐릿하게 변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믿음에도 지적인 작업과 그 한계를 초월하는 두 가지 특징이 모두 있습니다.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초등학교, 청소년기, 대학 시절과 중년기를 거치면서 바뀌어 가듯이 우리가 믿는 가치와 윤리, 신앙의 내용도 지적인 성장과 함께 그 그림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주일예배에 빠지거나 거짓말을 하면 벌을 내리는 엄하고 무서운 신의 모습이, 무엇을 선택해도 좋다는 온화한 표정으로 나에게 자유를 주고 나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모습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물론 신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성장 과정뿐 아니라, 역사를 통해 인류가 지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에서도 그 그림이 바뀌어 왔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신을 마술사처럼 이해했습니다. 아무 때나 무슨 일이든 만들어내는 그런 작위적인 모습은 자연과 초자연이 섞인 마술사적 신관을 보여줍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과관계에 따라 자연현상이 규칙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신은 자연세계 밖으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마치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었지만 째깍째깍 시계가 작동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듯이, 자연과 초자연은 둘로 나뉘고 신은 자연세계에 간섭할 수 없는 신이 되어버렸습니다.

20세기가 되어 현대물리학의 혁명이 일어나고 양자론과 상대론이 발전하면서 자연세계는 시계처럼 그리 정교하지 않다는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신은 가끔 시계 톱니바퀴가 맞지 않는 빈틈의 영역에서 활동한다는 식의 관점도 생겨났고, 이와는 다르게 자연과 초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신이 자연세계의 인과관계를 사용한다는 새로운 이해도 가능해졌습니다.

신에 대한 이해만이 아닙니다. 자연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지적인 작업을 토대로 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아직 과학으로 답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들의 경우, 앞으로 과학이 더 발전하면서 지성적 답변이 가능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런 희망조차도 믿음의 영역입니다. 현재 우리가 우주에 대해 그리는 그림에는 명백히 밝혀진 과학도 포함되지만 자명하지 않고 증명되지 않고 혼란스러운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영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


우리가 신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도대체 우리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아무 때나 번개를 일으키고 기적을 행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인간을 밀어주기 위해 작위적으로 자연세계 간섭하는 그런 신을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시계처럼 자연세계가 스스로 운행되도록 내버려 두고 안드로메다로 휴가를 간 그런 초월적인 신을 말하는 걸까요? 혹은 안드로메다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우리가 기도하면 기적을 베풀러 지구를 종종 방문하는 신을 말하는 걸까요? 그도 아니면 가이아로 불리는 생명체 같은 지구 자체가 신일까요? 혹은, 자연세계에 내재해 있으며 자연을 섭리하며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는 그런 신을 말하는 걸까요?

과거의 사람들이 신을 오해했음을 우리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적인 한계를 넘는 대상으로 신을 파악하려 했던 노력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찮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신에 관해 이해하고 있는 내용도 미래의 누군가에게는 하찮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신을 과학적으로 정의하거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이미 그 존재는 신이 아닙니다. 그런 존재는 그저 지적으로 탐구 가능한 자연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가 신을 완벽히 이해했다면 그는 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신을 완벽히 설명하라는 요구는 지나칩니다.

흔히 신을 초월적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그 초월성은 자연세계 밖의 어떤 초자연적인 세계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초월은 오히려 우리의 인지와 인식,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입니다. 지성으로 다 파악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초월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연세계에 대한 인류의 이해가 변해온 것처럼, 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변해왔습니다. 지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은 초월에 대한 믿음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성서시대 사람들이 이해했던 그 한계 안에서 신을 가두려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마술사적 신관이나 시계공의 신관의 한계 안에 남아있다면 오류입니다. 그것은 젖을 떼지 못하고 단단한 것을 먹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과학이 발전하여 창조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 21세기에, 그래서 우리의 지적 한계가 새롭게 경계 지워진 시대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그만큼 더 위대하게 재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총합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비인격적인 존재를 믿는다는 말은 아무런 헌신을 요구하지 않는 지적 유희에 불과합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신앙은 인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를 통해 계시되는 그분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 안으로 성육하신 존재입니다. 인간의 지성과 경험 밖 초월의 존재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말씀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그와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먹고 마신 사람들의 경험은,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신앙의 대상에 관해 놀랍게도 뚜렷하고 명확한 실마리들을 제공해 줍니다. 비록 내가 그리는 그림이 완벽하지 않고 계속 변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온 그분을 우리는 신앙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 출처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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