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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민중신학의 탐구>를 읽고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11. 5.

 

<민중신학의 탐구>를 읽고

 

 

서남동 교수의 <민중신학의 탐구>를 읽었습니다. 1983년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37년이나 된 오래된 책이고, 요즘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민중신학에 대한 책입니다. 하지만 촛불혁명과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로 인해서 우리 사회의 공론의 장에서 혹독하게 매를 맞고 있는 개신교 교회들과 그 지도자들을 볼 때, 답답한 마음에 다시금 찾게 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남동 교수의 호는 죽재(竹齋)로 스승인 김재준 선생께서 다음과 같은 뜻으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의 용모와 뜻이 맑고 깨끗하며, 그의 지조와 마음은 곧고 비어 있다. 그의 학문은 넓고 사귐은 공경할 만하다. 고난을 받되 태연하고, 안정하여 학문에 힘쓰니 널리 그의 풍문이 들리는구나. 이에 그의 덕을 기리며 84세의 장공이 호를 지어 들어내노니 ‘竹齋’라.”

 

서남동 교수는 일본 동지사 대학에서 기독교 신학을 배우고, 1941년 3월 24살의 청년으로 귀국 후, 10년 간 목회를 하다가 35세에 한신대 교수로 발탁됩니다. 그리고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캐나다 토론토 빅토리아대학교의 임마누엘 대학에서 대학원을 마쳤고, 1961년 9월부터는 연세대 신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15년간 가르쳤고 1975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해직이 됩니다. 해직된 이유는 1973년 5월 20일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주도하였고, 1974년 11월 27일 “민주회복국민선언” 참가, 1975년 3월 “기독교정의구현전국성직자단”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계속적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다가 1976년 3월 1일 “3.1 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에 서명함으로써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안병무, 문동환, 이우정 등과 함께 투옥되어 1977년 12월 31일까지 수형생활을 합니다.

 

 

이 책은 총 4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 민중의 한타령

2부: 새 시대를 갈망하여

3부: 계시의 하부구조

4부: 생은 비극인가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전통적인 보수적인 교회 환경에서 자랐고, 특히 신학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민중신학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인간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답답한 마음에 작금의 민폐를 끼치는 개신교회에 대한 대안을 찾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떼야르 드 샤르뎅에 대한 책을 읽다가 검색을 통해서 서남동 교수에 관해 알게 된 것이고요. 서남동 교수는 자신이 만약 캠퍼스로 돌아간다면, 과학신학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절절하게 느꼈으며, 이 마음을 가지고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계속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과신대에서 창조에 대해 공부하면서 구원 중심의 기독교 교리가 창조 중심의 기독교 교리로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창조 중심의 기독교 신앙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매우 소중한 존재이며, 더 나아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생명의 잔치를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명의 잔치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 그래서 하나님의 눈길이 항상 집중되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심판의 기준도 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현실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느냐, 병을 고쳐 주었느냐, 억울함을 풀어주고 위로하였느냐임을 생각해볼 때 창조 신앙은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신앙으로 21세기에 강조되어야 하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의 내용은 개인적으로 울림이 있었던 구절들을 인용하였고, 간혹 개인적 생각을 짧게 제목으로 적어봤습니다. 

 

 

서남동 교수의 신학의 핵심 성경구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누가복음 4장 18~21절)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

 

"예수는 일찌기 가난한 자, 눌린 자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바 있다. 가난한 자의 내일 먹을 것을 주시라고, 또 눌린 자에게 불의한 자를 그 눌린 자가 용서할 테니 눌린 자의 죄를 하느님이 용서해주시라는 기도다. 그런데 항상 먹을 것이 풍부한 부자가 이런 기도를 흉내내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짓이다. 권력자, 누르는 자가 다른 사람을 누르고 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종교의식은 하느님을 우롱하는 짓이다. 부자와 권력자는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이 없게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다. 크리스찬 부자들이 권력자, 장관들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베풀고 또 그들로부터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국민에게 듣게 하는 것은 기독교도 아니고, 그 하느님은 하느님도 아니다. 아니 그 하느님은 부자와 권력자만을 위해서 있는 다른 하느님이다. 가나한 자, 눌린 자를 찾아온 하느님은 따로 있다. 그가 예수다. 마태복음서 25장의 병든 자가 전염병 환자라면, 옥에 갇힌 자가 정치범이라면, 거기 굶주리고 헐벗은 자가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여직공이라면, 그들의 해방의 전략은 어떠한 것일까? 그 해방은 사회적, 정치적 행동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12~13쪽)

 

마틴 루터 종교개혁의 아쉬운 점

 

"루터는 '법과 질서'를 표방하고 가난한 자, 눌린 자, '암하레쯔'의 권익을 관권으로 억압하도록 했고, 종교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을 분리시켜서 '종교의 개혁' 만을 시도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고작해서 군후의 종교로부터 부르조아의 종교가 되었고, '암하레쯔(유대의 가난한 서민 대중)'의 종교는 되지 못하고 말았다...그래서 후기 18세기, 19세기의 역사적 추세에서 민중을 위한 혁명은 번번이 바로 기독교회를 대적으로 맞서는 혁명운동이었다는 점은 오늘의 기독교가 제일로 크게 깊이 반성해야 할 점이 된다."(민중신학의 탐구, 17~18쪽)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편협한 교조주의가 아니고 실천의 굳은 의지를 말한 것이다."(민중신학의 탐구, 41쪽)

 

민중에 대한 창세기적 개념

 

"민중은 태초부터 하느님의 계약의 상대자이며 (지배자가 계약 상대자가 아니라), 그렇기에 땅을 정복하고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온 실질적 주체이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 억압되어 천민, 죄인으로 전락했다. 이제 민중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리고 하나님의 공의 회복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서 그로써 구원을 성취하도록 되었다는 것이다."(46쪽)

 

왜 교리 중심, 피안 중심의 비정치적 기독교가 되었는가

 

"성경의 역사적 핵과 후속된 교단의 거리는 '비정치화' 과정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이 비정치화 과정을 가능하게 한 두 가지 문화적, 역사적 계기를 지적할 수 있다. ...  하나는 일반적으로 논의해 온 히브리 문화의 역사적, 종말론적 지평으로부터 헬라 문화의 우주적, 형이상학적 지평으로 사고의 환경이 바뀐 사실이다. 종말론적 지평에서는 지금의 부정의가 없어지는 미래의 그날 '야훼의 날'을 기다리는데, 형이상학적 지평에서는 감각적 현상계의 그릇된 인식을 청산하고 순수한 본질을 찾고 있다. 원래의 '오실 메시아' 영상(고난받는 민중을 구원할 메시아)이 비정치화되어서 천상의 그리스도 영상(지상의 지배질서를 보장하는 자)으로 바뀌었다. 메시아가 그리스도로 비정치화되면서 정치적 차원의 십자가형은 종교적 차원의 십자가 상징으로 비정치화되었다. ...  둘째 계기는 AD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하자 그때부터 기독교는 눌린 자들의 지하의 종교였던 지위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누르는 자, 지배자들의 종교, 왕권종교가 된 것이다. 이로써 눌리 자의 탄식이며 항거였던 신앙, 따라서 묵시문학적이고 혁명적인 잠세력을 가졌던 종교는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화하고, 그 종교가 가졌던 본래의 핵 곧 눌린 자의 해방과 정의의 질서에 대한 민중의 갈망은 역사의 미래와는 상관없는 천상의 세계, 초원의 차원에 투사되어 역사의 피안에 있는 무시간적인 영원한 천국이 되었다"(55~56쪽)

 

한풀이, 그리스도의 발견

 

"이런 대목(이청준의 서편제 마지막 부분)에서 오라비 자신의 한의 삶이 잘 묘사되었고 또 누이의 한과 한풀이가 처절하게 그려졌다. 나아가서 깊은 한을 품고 있는 그 오라비의 모습에서 소설 가운데 화자가 찾고 있었던 다도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발견이라고 하겠다."(93쪽)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한 자는 누구인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사제, 레위 사람, 사마리아인, 강도들, 강도 만난 사람, 여관주인 등인데 우리는 그중에 누가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했느냐고 묻는다. 전통적인 해석대로 하자면 그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해서 사경에 빠진 인간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한 자는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강도를 만나서 얻어맞고, 빼앗기고, 사경에 처해서 도움을 부르짖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신음소리(한)가 바로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름인 것이다. 그 사람에게 대한 태도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다. 그 신음소리에 대한 각자의 응답과 행동에서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인간성이 실현되기도 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질식되어버리기도 한다. 거기에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있다."(107쪽)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의하면, 메시아는 고난받는 이웃으로 화신해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이 메시아입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이웃의 아픔을 내가 의식한다 할까요. 그렇게 해서 새 시대의 문이 열리도록 돼 있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고난받는 사람이 새 역사, 새 사회를 건설할 주역이 된다고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217쪽)

 

서남동 교수의 신학적 방법론

 

"나의 신학적 방법론은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우선 실존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학사논문을 쓸 때만 해도 방법론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 후로는 상당히 오랫동안 현대 과학사상을 가지고 성서 특히 신학을 재해석, 재구성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에 대해서나 세계에 대해서 더욱 그랬었지요. 과학적 관심은 처음부터 내게 대단했습니다.....내가 과학을 신학의 틀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신의 죽음의 신학, 희망의 신학, 세속화 신학 등을 거친 후였습니다. ...  이 시기가 지나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방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나는 나의 신학의 방법론을 넓게는 사회과학적으로 좁게는 사회경제사적으로 세우려 했습니다."(164쪽)

 

민중신학은 균형을 잡기위한 노력임

 

"그런데 나는 현 시대에서 체제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 시점에서 전통적 교회의 주장이 개인의 종교적 체험이 전부인 양 강조하니까, 실천적인 면에서 민중신학이 사회에서의 구조적 개혁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체제변화는 당연히 강조되어야 하겠지만 그것만이 절대라고 도그마화시킬 수는 없는 거죠. 민중의 신학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지금 시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에 관심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 적은 월급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들의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는 따위가 서민대중의 걱정인데,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까를 민중신학은 일차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회전체의 구조개혁에 뛰어드는 것만이 진정으로 민중을 위하는 것인가 하는 것도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 그것은 현실을 무시하고 이론만을 단순화한 것이지요.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체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체제를 바꾼다는 것으로 인류의 목표가 그대로 달성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는 실패의 역사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을 통해 개선된 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에 어떤 변화나 시정이 있었느냐고 한 번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적 억압은 오히려 전보다 더 심했던 경우도 있지 않았습니까? ... (체제 개혁을) 갑자기 한다는 것에는 몇 사람의 의견으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가 횡포화할 가능성이 있고, 점진적으로 한다는 것에는 다수의 교육과 계몽이 요청되고 어쨌든 우리 인류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꾸준히 밀고 나가는 노력만은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196~197쪽)

 

죽음과 죽임

 

"죽음이란 건 전진과 새로움을 위한 하느님의 축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이 있고 지배자의 논리가 또 그것을 자꾸 부채질하고 조장하기도 합니다. 해결이 가능한 '죽임'의 문제에는 눈을 딱 감고, '죽음'의 문제만 가지고 그거 해결하자고 머리 싸매고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이 인간들의 형편입니다."(247쪽)

 

"금관의 예수"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적적한 이 시멘트 감옥 속에, 나는 너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또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느니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감옥에서, 이 신전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날을, 해방되어 너희들 속에, 너희들의 불행 속에 내가 다시금 불꽃으로 살아 타오를 날을, 그런데, 네가 왔다. 네가 가까이 와 내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구원을 받았느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은 외로운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귀를 막고, 그리고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명예와 권세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스스로를 예수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은 나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 못하도록 자기만의 신전에 가두었느니라. ... 그런데 네가 내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하리라. ... 그런데 네가 지금 내 입을 열게 했듯이 이제는 내 몸을 자유롭게 해다오. 이 시멘트를 벗겨라.... 용기를 내라, 자 어서어서 이 시멘트를 벗겨줘. 답답하고 갑갑해서 못살겠구나. 어서 빨리 훌훌 벗어나 민중들 속으로 가고 싶다. 이제 어서 시멘트를 벗겨라, 어서!"(292쪽)

 

종교는 왜 아편이 되었나?

 

"인간구원이 사회적 해방으로 실현되지 아니하면 신체(실체)를 떠난 혼같이 유령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유령은 다시 신체를 마취, 마비시키는 보복을 한다. 그래서 사회적 차원을 상실한 종교는 아편의 역할을 하게 된다."(309쪽)

 

서남동 교수의 인간론

 

"사람은 무엇이냐? 사람은 하나의 관계요, 사람은 하나의 의지요, 사람은 하나의 질문이다." (434~435쪽)

 

인간생명의 파라독스

 

마태복음 16장 2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사람은 누구나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합니다. ... 사람은 단순히 생의 무의식적인 본능으로서만 아니고 나아가서 의식과 성찰로써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합니다. 죽음의 운명을 알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찾게 되고 죄악의 속박을 양심의 가책으로 느끼기 때문에 자유와 구원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이미 그 어떤 교리라고 할까, 철학이라고 할까 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한다는 데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겠다는 교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실인즉 생의 본능에서부터 시작해서 깊이 반성해서 된 철학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교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에는 이런 주장과는 다른 하나의 파라독스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참 생명 -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는 길이기 때문에 - 한 생명을 얻으려면 자기부정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잃게 되는 것이 인간생명의 파라독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근대의 휴머니즘, 그리고 신학사상에서 말하는 자유주의의 그리스도, 또 그러한 것들을 기조로 한 자본주의 내지 민주주의 식의 해석이 있습니다. ... 그리스도교는 공산주의의 반신론, 과학주의의 무신론, 실존철학의 사신론과도 싸워야하겠지만 자유주의 그리스도교에서 하는 복음의 그릇된 해석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는 말은 앞을 더 잘 내다본다는 영리한 사람들의 처세술이 아니라 아가페적 사랑입니다."(409~410쪽)

 

물 위를 걸어가야 하는 인간존재

 

마태복음 14장 28-29절 "도대체 인간존재란 물 위로 걸어가야 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지성의 판단과 의지의 결심이 물결치는 감성의 바다에 자주 빠지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감관의 파도치는 물결, 육체의 불타오르는 욕망, 본능과 무의식의 밑도 없고, 끝도 없는 바다와 같은 깊이, 그리로만 기울어지는 경향성 - 이것이 숨김없는 인간성이다. 인간존재는 이러한 바다 위에, 물 위에 걸어가는 존재다."(424)

 

비극적 인생에 대한 서남동 교수의 마지막 조언

 

"인생은 비극일까요? 생은 한갓 비극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삶은 '인격적인 결단'입니다. 이러한 힘이 부족할 경우에는 '생명의 경의'를 느껴보십시오. 만일 삶의 신비마저 상실되거든 '존재의 용기'를 가지고 버티는 것입니다. ...  백척간두에 진일보해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우리더러 각각 '이웃사람'(사회적인 삶)이 되라고 말씀하신 그이는 사실인 즉 비극에 처해 있는 인생에게 오신 '이웃 사람'입니다. 여리고 길에서 강도를 만나 사경에 빠져 있는 이웃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삶의 비극은 그의 십자가에 삼키웠습니다. 그리해서 우리의 삶은 그의 안에 믿음(faith in Christ)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을 넘어선 그리스도 신앙입니다."(465쪽)

 

 

최성일 과신대 기자 (ultracha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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