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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현대 기술 산업 사회가 품고 있는 ‘근본악’과 ‘전체주의’에 대하여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 12. 9.

 

1.   이상 기후 때문에 지구 곳곳에서 전대미문의 재난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하늘이 뚫린 듯이 쏟아지는 집중폭우로 인한 홍수, 이상고온과 가뭄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대규 모 산불, 한 도시를 다 날릴 것 같은 초대형 허리케인, 북극의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사라지고 있는 작은 섬나라들 …. 이게 다 이산화탄소 과다 배출로 인한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이상 기상 현상은 지역적이라고 한다면 전세계가 2년째 고통을 겪고 있는 코로나 19 팬데믹은 전 지구적이다. 지금도 계속 변종이 나와서 언제 종식될지 모른다. 팬데믹은 코로나가 처음이 아니다. 에이즈, 메르스, 에볼라, 사스, 신종플루 등 예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인수공통감염병이 최근에 자주 발생하면서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2.    전문가들은 코로나 19가 종식되더라도 인류의 생활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 유사한 팬데믹은 계속 발생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현재 너무나 많은 가축이 사육되고 있고, 야생동물의 서식지 파괴로 사람과 야생동물의 접촉이 늘어나 인수공통 감염병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 데다, 전 세계가 일일생활권처럼 엮여져 있어 어느 한 지역에서 전염병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전세계로 펴지기 때문이다.

뒤늦게 지구 온난화에 따른 위기를 인식한 각 나라가 탄소중립을 위해 국제 공조를 추진하고 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쉽게 해결될 거 같지 않다. 또 탄소중립을 이룬다 한들 그것만으로 이미 병들고 있는 지구를 회복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3.   인류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동식물 중 맨 마지막에 나타났다고 한다.

46억 년 지구 나이를 하루 24시간으로 본다면 23시 59분 56초에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가 불과 4초 만에 지구를 아작(?)냈다고 한다. 지질학적으로 지구는 다섯 번의 대멸종을 겪는데, 대부분 대규모 화산 폭발, 소행성 충돌 등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물과 관계없는 원인에 의한 멸종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앞으로 한 번 더 대멸종을 겪는다면 이는 인류에 의한 멸종이 될 거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지금 지질시대를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 하면서 그 시작은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에 의하면 오늘날 지구 상에 사는 70억 사피엔스의 무게는 3억 톤, 가 축의 무게는 7억 톤, 나머지 야생동물의 무게는 다 합해도 1억 톤이 채 안 된다고 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동물의 90% 이상이 사람 또는 사람에 의해 사육되는 가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세’ 라는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앞으로 일어날 대멸종은 46억 년 지구 역사상 최초로 지구 환경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생물이 스스로 자기가 살아가야 할 환경을 파괴하고 자멸하는 대멸종이 될 것이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추세 대로 간다면 그 남은 시간은 24시간 지구 나이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최대 100초 정도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4.    인류는 지구를 완전히 파괴하고도 남을만한 양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지금도 경쟁적으로 개발하며 힘의 균형에 의한 평화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각국의 개발경쟁은 점점 더 심각한 과잉생산, 과잉소비를 유발하고 있고, 그로 인한 과다 탄 소 배출과 다른 문제들은 핵무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지구를 황폐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이러한 문제를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목적도 끝도 없는 생산 경쟁에 몰두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철학적 성찰을 주는 책이 있다. 바로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쓴 책 [인간의 조건 Human Condition]이다.


5.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악의 평범성(또는 악의 진부함, Banality of Evil)’이라는 말로 유명해진 철학자이다.

그는 히틀러의 앞잡이로 600만 명 유태인 학살을 총지휘했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받는 과정을 취재하여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이 용어를 처음 소개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개인적으로 가까이에서 보면 우리가 흔히 이웃에서 자주 만나 인사 하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한다.

누구나 자기 일을 별생각 없이 열심히 하다 보면 자신이 엄청나게 악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악을 자행한다고 한다. 즉 ‘생각 없음(thoughtlessness)’이 결과적으로 악의 진부함(banality)를 낳는 것이다. 아렌트는 누구나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사유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악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6.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현대 기술산업사회에 숨겨져 있는 근본악과 전체주의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활동적인 삶을 위한 인간의 조건을 노동(labou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다. 여기서 노동이란 생명으로서 인간의 삶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활동을 말한다. 작업은 무언가 인공물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말한다. 도구를 만들거나 예술활동도 여기에 속한다. 행위는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대표적인 활동이 정치활동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 정의한다.

 

르네 마그리트, 인간의 조건(1935)


7.    생명이 있는 인간의 활동은 탄생성과 사멸성의 지배를 받는다. 이 활동은 지구라는 환경의 제약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일어나는 공간은 크게 ‘사적 영역’과 ‘공론 영역’으로 구분된다.

사적영역은 가정으로 중심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그리고 공론영역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교류하는 영역이다. 노동과 작업은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행위는 공론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공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에 비중이 많아지는 것을 말한다.

아렌트는 사적 영역에만 머무르며 노동하는 삶은 인간적인 요소를 박탈당한 노예적 삶이라 규정했다(여기서 우리는 아렌트가 ‘노동’을 상당히 좁은 의미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동에는 아렌트의 분류에 의한 ‘작업’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8.   그런데 근대에 들어오면서 사회적 영역이 출현했다고 한다.

사회적 영역이란 사적 영역이 집단화되고 외부로 확대되면서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 작업이 공론 영적으로 이전된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회에서 하는 활동 대부분은 마치 생존을 위해 돈 버는 일에 소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는 이 사회적 영역이 공론 영역처럼 작동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대중문화라 한다.

오늘날 공론 영역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와 토론의 장으로서의 기능이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다. 이는 극히 개인화된 SNS의 역할이 크다. 더 이상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기호에 맞는 SNS를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9.    오늘날 사회는 일종의 익명의 지배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이 익명의 지배, 즉 추정된 하나의 경제적 사회이익, 마찬가지로 추정된 상류사회의 일치된 의견은 인격성을 상실했다고 지배하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가장 잔인하고 독재적인 지배가 될 수 있다.

 

이는 산업사회의 특징이다. 산업사회에서 기업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산물을 사람들이 소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유행 또는 대중문화라는 이름으로 그 유혹에 생각 없이 끌려가고 있다.
 

10.    사회적 영역에서 사람의 인격성은 사라지고 시장에서의 교환가치로 평가된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영웅인 시대이다.

모든 나라가 끝없는 경제성장 경쟁을 하면서 지구의 자원은 고갈되고 환경 파괴와 기후위기가 가 속화되고 있다. 그리고 미래 세대의 생존을 위한 대안으로 지구로부터 탈출을 모색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정의했던 익명의 지배에 순응하는 사회라 했다. 근대 경제학 기초가 바로 이 순응주의에 기인한다고 한다. 경제학에서는 사람을 사회적 존재가 되어 ‘합리적’이라는 이름으로 일정한 행동유형을 따르는 것으로 가정하고 그 규칙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비정상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11.    경제에서는 목적도 없고 끝도 없는 생산의 과정을 절대화하려고 한다.

이는 끊임없이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인간의 태도에서 볼 수 있다. 각국의 GNP 경제성장 시도는 목적도 없고 끝도 없다. 오직 나라 사이의 비교와 경쟁만 있을 뿐이다. 이는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도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하며, 필요 이상의 생산을 하고, 인간을 ‘소비자’로 규정짓고 끊임없이 과잉소비를 부추기는 마케팅 활동을 하고 있다.


12.    근대사회에서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고,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계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위해 도구를 이용하기보다 도구의 요구에 ‘적응’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이 만든 도구의 지배를 받으며 목적도 끝도 없는 생산 추구를 위한 노동과 작업에 매몰되고 그 결과 자연파괴가 일어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완전히 사적 영역에 지배되며, 인간 사이에 필수적인 관계의 박탈이 일어나고 자기 소외, 곧 반인간적인 고독에 빠진다고 했다.
 

13.    한나 아렌트는 기술 산업사회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인간의 믿음은 ‘전체주의적 믿음’이라고 한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으며, 인간의 본질마저도 파괴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바로 ‘근본악 (the radical evil)’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악은 인간들이 벌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 이러한 근본악은 우리가 보통 악으로 생각하는 이기주의, 탐욕, 시기심, 권력욕, 원한, 비겁함 또는 그 밖에 있을 수 있는 악한 동기들과 다르기 때문에 이 악에 대하여 인간의 모든 반응은 무력하다. 따라서 이 악에 대하여는 어떤 분노도 복수할 수 없으며, 어떤 사람도 이를 견뎌낼 수 없으며, 어떤 우애도 이를 용서할 수 없으며, 어떤 법도 이를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14.    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전체주의적 믿음이 되고 근본악을 탄생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을 위해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인간을 배제하고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태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라 했다.

 

경제학에서는 생산의 3요소로 노동, 자본, 지대를 꼽는다. 이 3요소는 생산원가로 환원된다. 그 중 가장 원가가 높고 통제하기 어려운 비용이 인건비이다. 기업은 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하여 사람의 개입이 필요 없는 자동화된 생산 유통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다. 결국, 사람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인데, 사람을 쓸모없게 만들고 있다.

근본악은 이러한 인간을 쓸모없게 만들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의 체계 속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기술적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현대의 각종 시스템은 그 자체로 이미 전체주의적 요인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15.    근대와 근대적 인간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기호를 달고 탄생했다.

그것은 사람들 생각의 중심이 신과 형이상학에서 인간과 지구의 현실세계로 옮겨졌음을 뜻한다고 했다. 이는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작위성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하는 인간중심주의라 한다. 이러한 근대의 이데올로기의 명제는 ‘가능한 것은 만들고, 가능하지 않은 것은 가능하게 만들어라.’ 즉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은 자신과 이 지구를 하나의 실험장으로, 즉 작위성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전체주의적 실험을 통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본질이라고 한다. 전체주의의 심각한 위험은 바로 인간이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끊임없는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16.    “지구는 인간의 조건의 핵심이다.”

지구는 생명을 가진 인간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곳이다. 지구에는 인간 이전부터 자연적 생명세계가 존재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지구에 스스로 만든 인공세계를 건설했다. 인간이 이러한 인공세계를 건설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연환경과는 멀어진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공세계에서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자연과 신진대사를 통해서만 자신의 생명의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과 기술은 인간실존의 자연적 조건을 파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인공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가능한 한 인간을 자연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인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될 수 있는 인공세계를 구축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오늘날 기술문명은 이제 자연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의 실존조건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기술주의 산업 시대에 내재된 전체주의적 경향이며, 끝없는 생산 추구로 더 이상 인간을 지탱할 수 없는 지구를 빠져나가려는 과학과 기술적 시도가 근본악이라 했다.

지구의 역사의 맨 마지막에 태어난 인간이 인식의 혁명으로 지구의 지배자가 되어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그런데 지구가 과연 인간의 파괴를 지켜보고만 있다가 일방적으로 당할 것인가? 지구는 경고하고 보복한다. 이것이 코로나 19 팬데믹이다.


17.    오늘날 사회의 전제군주는 더 이상 한 국가의 정치지도자가 아니다.

오늘날 산업사회를 지배하는 전제군주는 전 세계를 네트워크로 엮어 국경이 없는 시장을 만들고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지배하는 구글, 아마존 애플 같은 테크 기업들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이 내놓는 상품과 서비스에 순응하며 지배당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아렌트의 말대로 ‘사유하지 않음’에 있다. 현대인들은 온종일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고 살면서 사유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즉 스마트폰을 손에 쥔 신인류를 ‘포노 사피엔스’라 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렌트는 이렇게 묻는다. “하늘에 계신 인간의 아버지인 신의 거부로 시작했던 근대의 인간해방과 세속화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인 지구를 거부하는 매우 치명적인 결과로 끝이 나야만 하는가?”

 

 


 

글 | 송윤강

과신대 기자단으로 활동하면서 과학강연, 영화, 도서 등 과학 관련 리뷰를 기고하고 있다. 현재 아름다운서당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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