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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그대와 나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에 있다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 11. 10.

 

우리의 미래는 1시간에 60분의 속도로 다가온다. 이 속도는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주어진 우리의 삶의 속도, 인생의 속도이다.

 

그러나 미래라는 속도는 엄밀히 말해 각자 사는 방식에 따라서 달라지며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양과 질이 다른 미래가 된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우리는 피할 수 없이 결정된 하나의 진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그대와 나는 모두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다.

 

토요일 오후에 불현듯 찾아온 사유는 죽음이다. 사유라는 것은 시를 짓는 것이라 했으니 나는 지금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있다. 시를 짓는다는 것은 언어가 비로소 언어가 되게 하는 것이기에,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에, 나는 존재를 받아쓰고 있다.

 

잘 움직이던 기계가 고장 나서 제 기능을 못하게 될 때 그것을 죽음이라 말한 이가 있다. 그에 따르면 펌프질을 잘하던 심장이 멈추어 버리는 순간이 죽음이며 그대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그대를 향한 열망으로 늘 부풀고 흘러넘치던 감정들이 멈추어 버렸을 때가 죽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죽음도 있다.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라고 그대를 내가 생각할 때 그대는 살아있는 현존재이겠으나 내가 만일 그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내게서 죽음을 맞는다. 죽음은 산자의 먹이가 되는 것, 즉 죽음의 관점은 내게 있거니와 나는 그대의 죽음을 삼키는 자이다.

 

현존재의 의식 안에서 맞는 허무한 죽음은 세계-내-존재 그 자체의 물러남이요 그대라는 세계 개방성의 소멸이자 무無 화다. 나와 그대가 서로에게 죽음을 향해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 존재이해에 야릇하고 짖궂은 균열을 낸다.

 

 

별들의 죽음은 어떠한가? 별은 초신성폭발의 죽음을 맞으면서 수없이 많은 원소를 낳는다. 별들의 죽음은 생성의 다른 이름이며 새 생명을 향한 자기 파괴, 자기 죽음, 곧 성육신이며 이는 온전한 섬김이자 낮아짐이요 자기희생의 죽음, 이러한 죽음도 있다.

 

나는 죽음을 시간성 안에서 좀 더 집중해 보려고 한다. 하늘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작가는 수많은 시간을 기다리고 선별하고 셔터를 누르며 순간을 담아낸다. 그가 담아낸 순간은 영원이며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생성의 시간이요 생명의 시간, 생명이 약동하는 시간이자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매 순간 반복되지만, 결코 한 번도 같지 않은 유일회성 안에서 현존재와 존재는 상응한다. 이를테면 던져진 자이면서 생을 이끌고 지속시키며 모험을 떠나는 기투하는 존재가 서로 힘의 유희를 펼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는 시간의 의미로 파악되어지는 것, 즉 현존재는 시간성에서 기인한다.

 

시간은 그대와 나, 우리라는 현존재의 이해가 일어나는 지평이다. 시간은 존재 일반의 이해를 위한 매개물인 것이다. 우리는 유한하게 존재하면서 시간을 살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존재가 드러나는 시간으로 시간화한다.

 

존재 가능의 가능성들 중 죽음은 불가피한 것으로 '어쩔 수 없음'이다. 다시 말해 현존재인 그대와 나는 자신의 죽음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린 모두 죽는다. 그럼에도 우린 일상 속에서는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이 모두에게 향하더라도 자신에게만은 피해 갈 소나기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러지 않고서는 권력과 지배욕과 물질 욕에 빠져, 호기심, 잡담, 모호성에 빠져 현재에 매몰되어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린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고 도피하는 이들이기에 죽음은 갑작스럽고 돌발적인 것, 재앙 같은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죽음은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고유한 가능성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평선 너머 어디에선가 이미 출발한 죽음은 밀물처럼 넘실거리며 다가온다.

 

 

때로는 죽음에 '미리 앞서 가보는 것'은 어떨까? 죽음을 생각해 보는 순간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불안에 떨지만, 종말은 재림과 함께 오듯이 끝은 시작이지 않은가! 온갖 욕망에 끌려다니고 왜곡된 욕망과 진실에 빠져 살던 분열된 주체였다면 내 삶의 주체자가 되어 분별하고 반성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결단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다시 말해 현재라는 일상성에 빠져 그것이 전부인 냥 살다가 내가 죽음을 맞는 순간을 떠올려 봤을 때 내가 살아온 삶이 과연 제대로 살아온 것이었는지를 묻게 될 것이며 사랑하는 이들을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았는지, 성실하게 살았는지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할 것은 없는지 등을 우리 인간은 살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사멸의 순간에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때가 세인의 모든 일상성들로부터 돌아설 수 있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그 순간은 존재와 존재자의 맞닥뜨림! 낯설고도 익숙한 랑데부다.

 

미래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다가오며 과거는 현재로 되돌아오는 것이며 현재는 우리 곁에 머무른다. 시간성은 늘 그렇게 우리에게서 빠져나가 다가오는 것, 되돌아 오는 것, 곁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성 안에서 존재의 의미가 드러난다.

 

죽음. 나는 토요일 오후부터 밤에 다다르도록 조금은 헐렁하고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시간에 죽음을 사유하고 있다. 아이러니일 수도 있겠고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고 뜬금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곰팡이가 껍질처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동그란 치즈를 갉아 먹으면서 집요하게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그대와 나는 죽음에의 존재다.

 

 


 

글 | 백우인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새물결플러스에서 튜터로 활동하고 있다. 과신VIEW에서는 과학과 예술과 신학이 교차하는 지점을 글로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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