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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신앙의 열정적인 아이러니스트(Ironist)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 8. 10.

 

7월이 바람같이 휘익 흘러가고 구름같이 부웅 떠간다. 천지 사방은 모조리 저마다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고 회전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시간의 속도와 길이와 두께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다양하다. 1시간이 60분이며 3,600초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선형적인 시간이 결코 아니다. 생명이 등장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100억 년의 시간보다, 인류가 등장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200만 년 전까지의 시간보다, 어느 때는 24시간인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의 의식에 경험 이전의 천문학적이고 지질학적인 거리와 연대기는 어쩌면 일상에서 무감각의 지대와 구간일 것이다. 또 우린 실재 객체에 대한 감각보다 몸과 정신과 사유를 통해 감각 객체(정서, 감정, 기분,심리적 상태)를  경험함으로써 지각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시간과 장소에서 만들어지는 생성물이다. 그러니 우주의 별만큼이나 다양한 '나'와 '너 '가 소통을 한다는 것은 기적 중에서도 기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대부분 자기 우주의 언어와 방식으로 너를 만난다는 것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소통의 딜레마는 필연적이며 이것을 풀어낼 알고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처드 로티가 아이러니스트를 노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게는 특수가 보편이 되는 세계에 우리가 있음을 깨닫는 자들이 모인 곳이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개별적인 특수가 저마다 상상력을 통해, 인간이란 영웅적인 모습도 있고 꼽추 난쟁이 같이 우스운 모습도 있는데 대부분 인간은 그  사이에 있다는 보편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면서 특수는 보편의 옷을 입고 자신에게 유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그려보는 것이다. 때로는 영웅인 척 때로는 우스운 곱사등이 난쟁이로. 이러할 때 인간은 연대를 창조해 낼 수 있고 그곳이 유토피아가 된다는 말일 것이다. 이는 감정이입을 통해 이해 가능한 후설의 상호주관성과 다르지 않으며 하이데거의 공동-현존재의 존재방식과도 만나진다. 

상상력은 너의 비루한 생에의 의지(존재의 본존 힘, 코나투스)와 힘에의 의지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네가 바로 나이고, 또 다른 너이며 우리라고 서술할 수 있게 된다. 아이러니스트는 너와 내가 사용해왔던 다양한 어휘와 언어의 문법 바깥으로 스스로 나가 그것들을 보듬는 상상력을 발휘하려는 자다. 동일한 상황을 놓고 정반대의 서술을 할 수 있으며, 연속적인 대답들 속에서 계속 물음을 변화시키면서 관점을 이동시켜보는 노력을 하는 자가 아이러니스트다. 우리의 존재방식은 특정상황의 필요에 따라 음영이 있어 주체에 대한 술어들은 극히 제한된 편린일 뿐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세계는 자욱하고 가려진 안개 나루터다. 안개를 걷어 낼 바람과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상상력이 구원한다. 창조적  자율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는 자가 바로 아이러니스트이며, 한발 더 나아가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관심을 두는 자는 자유주의자이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이 둘, 즉 개체성과 전체성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상상력의 경계선을 확장시켜 나가는 자들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가질 것이다. 

아이러니스트를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에 접목해 보면 어떨까? 성서 66권에는 시, 제사장 문서, 서간,역사서 등 다양한 장르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메타포적이며 예언적인 글도 있다. 이것은 하나의 관점으로 성서에 접근해서는 안되며 고정되고 결정된 해석적 관점은 편견과 독단을 양산하며 근본주의와 문자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이해할 때는 다양한 차원들의 연결망 안에서 동시대적인 안목으로 재서술 되어야 한다. 과학은 이 부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반면 신학은 외골수적이다. 설령 학계에서 재서술을 위한 학문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실제적인 삶의 현장으로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아카데미와 목회 현장 사이의 괴리는 양자역학과 고전역학의 간극만큼이나 멀다. 
 
과학은 물질의 특성 자체에 대해 모호성으로 규정하면서 언제라도 보편타당한 이론이 나오면 새 이론은 낡은 이론의 어깨 위에 올라앉을 수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과학적 사실은 과학의 내부적인 요소와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구성된다고 토머스 쿤은 일찍이 말한 바 있다. 이는 로고스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과학에도 절대적 객관성이 아니라 상상적인 요소가 틈입하고 스며있다는 것을 예측하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아이러니스트다. 왜 지구가 돌면 안 되지? 라는 질문과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기존의 과학은 전복되거나 한 단계 고양된다. 과학자들은 아이러니스트의 기질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신학은 더욱더 충만한 상상력으로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과 마리아의 수태고지를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메타포로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을 상상력 없이 이해하기란 역시나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성서를 역사책으로 또는 과학책으로 바라보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창조 섭리의 무한한 가능성과 아이러니를 그려보려고 해야 한다. 우리의 빈약한 인식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 하지 말고 만유의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도록 우리의 상상력을 힘껏 확장시킬 때, 우리는 신앙의 열정적인 아이러니스트가 될 것이다. 현대 과학이 설명하는 생명의 모습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내용과 상호보완적으로 어우러질 때 우리는 생명에 대해 보다 풍성하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럴 때에 창조자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감사와 사랑이 더 깊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열린 사고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면, 교회에서 주입받은 일방향의 성서해석에 질문을 던진다면, 바로 우리가 신앙의 열정적인 아이러니스트다.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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