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가 본 창조 (feat. 신학자가 본 빅뱅)

 

2019 과신대 심포지움을 다녀와서

 

글_심기주

 

 

9월 30일 하루종일 과학신학 심포지움이 있었지만, 나는 일이 끝나고 특별강연인 세션4부터 참여할 수 있었다. 세션4의 강연자는 버클리연합 신학대학원(GTU & CTNS)의 로버트 러셀(Robert J. Russell) 교수님이셨다. 통역은 이형주 박사님이 담당해주셨다. 위트 넘치는 교수님의 강연과 또 통역도 잘 해주신 박사님 덕에 재밌게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원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견해들을 ppt로 잘 분류하여 소개해주셔서 정리가 쉬웠다. 흥미로웠던 건 자연에서의 신의 개입에 대한 보수적 견해인 "기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견해와 진보적 견해인 "신의 개입은 단지 자연 현상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잘 보완한 "NIODA"라는 교수님의 견해였다.

 

“Non-interventionist objective divine action”

 

즉, 비간섭적 객관적 신적 행위의 약어인 NIODA양자역학적 개념을 도입했다. 그래서 이 개념을 통해 신적 행위를 존재론적 비결정론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단지 이신론적인 신으로 보지도 않고(진보적 견해 보완), 그렇다고 하나님이 '기적'만을 통해서 이 세상에 개입한다고 보지도 않는 것이다(보수적 견해 보완).

 

 

우주론과 종말론의 주제에 대해서는, 과학의 예측과 신학에서의 종말론이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주목할 만했다. NIODA를 통해 유신 진화로 하나님의 개입을 설명할 수 있다면, 과연 자연 세계에서의 고통과 하나님은 어떻게 관계하실 것인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함께 고통받으신다는 것에는 과학과의 마찰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상 구속에서의 "새 창조"를 말할 때, 종말론은 과학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이제껏 나는 인간 생존을 기준으로 볼 때, 기술의 극대화로 인해 인간 스스로 새 창조에 이른다거나, 인간이 자멸하거나, 혹은 지구의 서식 수명이 다할 때를 종말로 보는 견해 등을 주로 들어봤다. 또 우주 전체를 기준으로 볼 때,  열린 우주, 평평한 우주, 닫힌 우주의 세 가지 모형으로 우주의 미래를 전망하는 것을 들어봤다.

 

이런 전망과는 달리 교수님은 '하나님은 과학의 예측을 깨고 새로운 방식과 질서로 하나님의 창조를 새창조로 변혁시킬 것을 말하신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 지점은 언제일 것인가? 과학이 전망하는 종말이 오기 직전인가? 그보다 훨씬 전인가? 그렇다면 과학의 전망에 대해 어디까지, 언제까지를 신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이때까지 과학적 규칙성을 계속 유지하시기로 선택하셨고, 그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 종말 때의 "새로운 질서"를 미리 보여주셨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새로운 질서를 우리가 "예측"할 수나 있을까? 논의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 힌트는 새 창조가 현 창조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있을 수도 있다. 

 

이 다음의 논의는 어떻게 해야할까? 교수님은 ctns 홈페이지를 알려주시며 그 여정에 함께 하기를 초청하시며 강연을 마무리하셨다. 

 


마지막 세션은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모여 오늘의 세션 전체를 종합하고 피드백하는 자리였다. 사회는 서울신대의 박영식 교수님이 맡아주셨다.

 

인상깊었던 것은 윤철호 교수님의 말씀이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개입을 말하려면 초자연적인 것을 가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양자역학적 우연으로도 하나님의 개입의 설명이 가능하다."

 

허견 교수님은 "뇌과학에서는 의식 부분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과 맞닿아 있으며 이 의식 부분은 모두 생물학적으로 환원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또 최승언 교수님의 말씀도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이 자꾸 과학하고 신학하는 교수들은 기도 안하는 줄 아는데 우리도 기도합니다."

 

오늘 심포지움 장소를 제공해주신 강남새사람교회의 전기철 목사님의 질문이 와닿았다. 과학신학적 주제를 교회 안에서 얘기하기에는 그 갭이 너무 커서 얘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고, 오히려 교인들은 삶에서 맞닿뜨리는 고통과 문제를 다루는 것을 거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역자라고 소개한 또다른 청중은 "요즘 아이들은 기성 세대의 '권위있는 하나님'보다 '소통하는 하나님'을 더 좋아한다"면서 "이런 과학신학적 얘기를 꺼내고 나누는 것이 생각보다 자연스럽고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 우종학 교수님은 "교회 차원에서의 젊은 세대의 교육이 이 신학과 목회의 갭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하셨다.

 

목회와 신학과의 갭, 그리고 현장에서의 고민, 과학신학의 현시대의 과제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 기회를 마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posted by 과신대 기자단

아담과 호모 사피엔스의 귓속말

인간의 타락과 진화 | 윌리엄 T. 카바노프, 제임스 K. A. 스미스 편집| 새물결플러스 | 2019

 

심기주 (과신대 기자단)

 

 

성령이 인도하는 신학적 상상력

 

이 책은 다양한 분야의 열 명의 학자들이 ‘인간이, 인간이 아닌 영장류로부터 출현했다면 이는 인간의 기원과 죄의 기원을 포함한 기독교 신학의 기원에 관한 전통적 설명과 관련해서 어떤 함의를 갖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모인 결과이다.

 

이 책이 단순히 기고문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이 학자들이 3년동안 같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또 우정을 나누며 공동체로서 토론해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웠다. 교회의 한 모습 같달까? 사실 요즘 들어 공동체의 필요성은 많이 느끼는데 비해 예배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이 책에서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신학적 작업은 신실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예배가 필요하다는 말이 마음에 꽂혔다. ‘우리의 상상력의 근육을 훈련시키고 늘리려면 시간, 즉 쟁점들과 기회들에 대해 심사숙고할 시간, 경청하고 묵상할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실한 상상력을 기르는 데는 성경 이야기의 운율로 상상력에 세례를 베푸는 일이 필요하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목표다.’ (20쪽)

 

즉, 예배에 녹아 있는 성경 이야기로부터 하나님의 영감을 얻고 신학적 상상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집필한 신학자들의 공동체인 ‘골로새 포럼’은 예전적인 예배를 신학적 상상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꼽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전통을 계승하며 신학적 상상력으로 균형을 잡는 모습이 가장 매력적이면서 좋은 부분이었다.

 

전통에 충실한 확장

 

여지껏 과신대에서 인터뷰하고 콜로퀴움에 오셨던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조언해주신 것은 “신학이 과학의 연구결과를 신학화하는 데만 신경 쓰느라 신학 본연의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신학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간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실 여러 글들을 보며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 과학에 맞춰 해석을 계속하는 것은 뭔가 끼워 맞추기 식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서론에서 말하는 매킨타이어의 전통에 대한 정의는 내 고민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전통은 특정한 근본적 동의가 정의되고 재정의되는 주장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되는 주장이다.”

 

이 다음에 나오는 전통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전통’은 성경에 의해 촉진되고 기독교 예배 의식 속에 담겨 있으며 초교파적 신조(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등)로 표현된 보편 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가리킨다. 이는 이미 전통 내부에 표현, 확장, 수정이라는 확대되고 있는 층위들을 지닌 살아 있는 전통(25쪽)’이라는 것이다.’ 전통은 정적이며 고정되어 있어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기독교 전통은 그 속에 역동적인 ‘역사’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 책에서는 전통의 방향성에 충실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확장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 점이 나는 흥미로웠다. 아!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창의적이면서도 깊은 고민과 대화가 가능하다니! 나의 신앙의 길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어떤 움직임이 “전통에 충실한 확장”인지 아니면 전통과는 무관한 것인지를 분별하면서 나아갈 때, 전통은 그저 역사 속에만 존재하는, 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숨 쉬고 나와 교감하는 유기체가 되는 것이다.

 

 

아담과 호모 사피엔스

 

그렇다. 내가 처음에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돌이켜 보면 원래 나는 성경을 접할 때, 말씀 묵상을 할 때, 그것들이 현실에 잘 와 닿지 않았다. 성경 속의 인물들은 그저 수 천년 전에 있었던 많이 들어봐서 친숙한 외국인들이고, 성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2D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스파이더맨 영화와 오히려 비슷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것은 단지 모든 인류의 책임과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답답하게 하는 요소일 뿐이었지 딱히 내게 와 닿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면서 창세기를 쓴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용의 각각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다각도로 알게 될 때, 창세기는 내게 4D 영화, 아니 ‘실재’로 다가왔다. 아담은 단지 모든 인류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용도가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아담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우리에게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는 아담의 아들 가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가인이 “선을 행할” 수 있고, “죄가 문에 도사리고 앉아” 있을지라도 그가 “죄를” 반드시 잘 다스려야만 한다(창 4:7)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셨던 말씀은 죄(창세기에서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예)는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인간은 (최소한 처음에는) 죄에 맞서 싸울 수 있다.(187쪽)’

 

특히 아담에서 가인, 라멕을 거쳐 죄가 불덩이처럼 늘어나는 것을 묘사하는 창세기 6장까지, 창세기는 죄가 점점 발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처드 미들턴은 창세기에서 진술한 것처럼 죄가 발달한다는 관점은 초기 호모 사피엔스 사이에서 도덕적인 악이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도덕적, 종교적 의식이 발달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간들은 자신의 양심이 '폭력적인 행동을 금하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충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충고를 무시했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치론적인 해석을 피하면서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것은 판넨베르크의 논리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넨베르크는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는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 중간지대로서의 철학을 매개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윌리엄 브라운은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 우선, 구약 본문을 '설명'하고, 해당 본문의 신학적 주제를 가지고 과학으로 온다. 그리고 이 주제를, 과학을 통해 세계를 볼 때 관련 있을 법한 측면들과 관련지어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에서 얻은 통찰을 가지고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온다.(147쪽)

 

즉, 어떤 면에서는 각각의 주제를 뽑아 과학과 신학을 넘나 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중간지대를 활용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담과 원죄’, 그리고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도덕적, 종교적 의식 발달’의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것도 이런 중간지대를 거치고서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는 원죄 뿐만 아니라, 타락, 죽음 등 다양한 전통과 관련된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신학과 과학의 대화 방식인 것 같다. 이를 활용할 때도, “전통에 충실한 확장”이 또 가능하지 않을까? 전통에 충실하면서, 즉, 기독교의 본질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 사회를 무시하지 않고 현실적인 대안과 조언을 제시해줄 수 있는 기독교의 역동성을 기대해본다.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 4:7b)”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죄의 유혹을 다스리라고 주님이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죄의 발달과정을 곱씹으며 죄에서 떠나라고 외치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posted by 과신대 기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