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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북클럽 이야기

<역사적 아담 논쟁>을 읽었습니다.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4. 12.

[과신대 북클럽 이야기 | 파사데나 북클럽]

 

| 김영웅 (파사데나 북클럽 회원)

 

이번 달 파사데나 과신대 모임에서는 ‘아담의 역사성 논쟁’이란 책을 함께 읽고 나누었습니다. 많은 분량, 다양한 관점, 압축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 그리고 감정이 배제되지 않은 치열한 논쟁까지도 모두 담고 있는 흥미진진한 책이었습니다. 게다가 모임에 참석한 전원이 적극적으로, 그러면서도 건전하게, 토론에 참여해 주셨기 때문에 탁월한 발제를 담당해주셨던 이지형 목사님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계획했던 진도의 절반밖에 마치지 못한 채 나머지는 다음 달로 미뤄야 했습니다. 그만큼 모임은 훌륭한 발제에 이은 서로 간의 경청과 깊이 있는 토론으로 풍성하게 채워졌으며, 덕분에 다양한 생각과 입장을 수평적 관계에서 스스럼없이 접하며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토론 문화가 개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진다면 (목회자들과 함께 하는 성경공부 시간이나 소그룹 모임)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 짙은 생각도 잠시 혼자서 해보았습니다.

 

2시간 반이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발제는 책의 내용을 짧게 요약한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들려졌습니다. 신학을 전공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놓치고 말았을 (저도 포함됩니다) 관점까지 덧붙여서 보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신 이지형 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발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어떤 정석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다음 달이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모든 참석자들의 진지한 참여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특히 원죄사건과 죄의 전가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사뭇 다른 입장을 가진 메노나이트에 대한 소개는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고,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아담의 역사성과 죄의 기원, 그리고 창조-타락-구속 플롯에 의거하여 예수까지 이어지는 구속사건이 복음주의를 벗어나게 될 경우에는 그다지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과감한 생각도 덕분에 할 수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영향력 아래 장로교로 대표되는 한국 교회에서 신앙과 믿음을 훈련받아온 저와 같은 기독교인에게는 정말 또 다른 세상을 접하며 지경이 넓혀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전부라고 은연중에 믿고 있는 기독교의 경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과연 기독교의 핵심 교리라고 믿어왔던 것이 우리가 아직 접해보지 않은 다른 모습의 기독교에서도 핵심 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혹시 우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릴 적부터 보고 듣고 훈련받아온 신앙과 믿음을 하나의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 해석이 가능했던 진리 그 자체로 여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가 친숙한 그 장막 안에서만 참이라고 인정되면, 장막 밖에서도 참이어야만 한다는 폭력의 논리에 잠식당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 장막을 걷어낼 수는 없는 걸까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름을 틀림으로 만들고 있진 않았을까요. 과연 우리가 믿는 것만 진리일까요. 진리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런 자세가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의 방식일까요.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도, 과학과 신앙 간의 문제도 어쩌면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요.

 

고대 근동의 과학과 현대 과학 사이의 괴리, 그에 따라 수정되어지는 성경 해석. 과신대는 이러한 과정에서 고민과 갈등을 겪는 기독교인들에게 가이드가 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과 다른 입장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다른 입장을 틀린 입장으로 만들어 배척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배척함은 곧 다름을 틀림으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와 같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물론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내지 않는 분노를 하나님의 창조를 다른 방식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정말 우스운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에 대해 마침 어제 모임에서 나왔던 얘기 중에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면 그것들을 그저 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는 것입니다. 대신 서로의 입장을 비난하거나 논리적 결함을 찾아내거나 하는 방식으로 흠집 내고 적대시하는 행위를 자제하고서 말이지요. 즉 어떤 해결책이나 답을 찾는 방법이 아니라 다름이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존재하면서 존중 받는다면 그것 자체가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제안인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해독제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떤 한 입장의 우월성과 다른 입장의 열등성을 들춰내고 강조하여 어느 입장이 더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지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진 여러 다양한 해석과 입장 중 무엇을 택하든 전적인 개인의 자유로 열어두고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목적이진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궁극적인 문제는 과학과 신앙 간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그보다 더 크고 일반적인 나와 타자 간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더 완벽한 논리도, 더 발달된 과학도 아닌, 배려와 존중, 사랑이진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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