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과신책] 학자의  읽기

 

침묵의 역설 : 침묵 속에서 침묵으로 말하다
엔도 슈사쿠 | 침묵의 소리 | 김승철 역 | 동연 | 2016

 

김영웅

 

 

‘침묵’에서 엔도 슈사쿠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신의 침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침묵 가운데서도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침묵’은 ‘침묵의 소리’로 다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침묵’을 오독했던 독자 중 하나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침묵’을 ‘침묵’으로만 읽었던 많은 독자들 덕분에 저자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침묵의 소리’는 ‘침묵’에 해제를 붙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침묵’에 대한 오독이 엔도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오독 덕분에 우리들은 엔도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좀 더 친밀하고 좀 더 친절하게 말이다. 나도 그랬다. ‘침묵의 소리’를 읽으며 ‘침묵’ 너머에 있는 엔도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침묵'을 읽을 때에는 못 느꼈던 것들이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엔도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사적이고 종교적인 배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침묵’을 집필하게 되었던 이유와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인생과 고뇌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소리’를 읽고 ‘침묵’에서 전해지지 않았던 (침묵했던) 엔도가 내겐 비로소 전해졌다 (소리로 들려졌다).

 

 

그는 토종 일본인이면서도 서양에서 전해져 온 기독교 (가톨릭)를 받아들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스스로도, ‘어릴 적부터의 기독교는 자신이 믿지도 않은 세계에 자신의 몸이 내던져진 사람이 겪는 이문화 체험’이라고 고백한다. 엔도에게 기독교는 그만큼 이질적인 문화였고, 그 속에서 그는 혼란스러웠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자인 김승철 교수 역시 서문에서, 엔도에게는 어릴 적 자신이 받았던 세례에서부터 ‘기독교가 일본에서 자란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 늘 그를 따라다니던 물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엔도는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일본인인 자신의 몸에 맞는 신앙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결심이 마침내 소설가 엔도를 탄생시켰다고 역자는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다. 실로 소설 ‘침묵’은 엔도의 삶 전체가 녹아 있는 책인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 책으로부터 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침묵’이 오독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침묵’의 주제가 숨겨진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가 독자들로부터 부록 정도로 여겨져 전혀 읽히지 않았거나, 한국 번역판 경우에는 아예 누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배교한 기리시단들을 한데 모여 살게 했던 기리시단 주거지에서 20년에 걸쳐 간수로 일했던 어느 하급 무사가 남긴 일기 형식의 문서이다. 엔도는 이 실제 문서를 약 10분의 1 정도로 줄이면서 발췌해서 고쳐 쓰는 방식으로 ‘관리인의 일기’를 작성하였고, 이를 ‘침묵’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게 해두었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 번역판을 읽은 나에게 ‘침묵’의 마지막은, 끝내 배교한 로드리고 신부와 이미 배교했던 페레이라 신부를 향하여, 그리고 끊임없이 간교함과 성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었던 기치지로를 향하여 결코 좋지 못한 시선을 줄 수밖에 없게 해 주었었다. 이는 반대급부로, 끝가지 후미에를 밟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낌없이 버린 순교자들을 향한 시선을, 마음 아프지만, 옹호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침묵이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마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도 나는 나도 모르게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샌가 배신이냐 죽음이냐의 문제가 신앙을 버리느냐 지키느냐의 문제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자 김승철 교수가 직접 해제 및 번역과 주해를 한, 이 책에 수록된 ‘기리시단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를 읽고 난 후, 난 비로소 의문이 해소될 수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던 강한 자들의 입장이 옹호되는 반면, 고문과 죽음이 두려워 후미에를 밟으며 배교하여 목숨을 건진 약한 자들의 입장이 멸시되는 듯한 분위기에서 나는 비로소 해방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기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실제 모델이었던 주제페 키아라는 배교한 이후에도 수용소 안에서 비밀리에 신앙을 견지하고 다른 이들에게 포교 행위를 계속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간교함을 얼굴에 써놓은 듯한 기치지로 역시 기리시단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예전과는 달리 로드리고를 보호하기 위해 관리에게 말을 둘러대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일기는 비굴하기까지 했던 배교자들의 회복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침묵의 소리'의 도입부에서 엔도는 나가사키에 있는 오우라 천주당 안에서 동판에 새겨진 후미에를 만나고 그 나무틀에 남아있던 수많은 검은 발자국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믿는 것을 발로 밟았을 때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약자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침묵'의 주인공으로서 담대하게 순교한 강자가 아닌 끝내 배교한 약자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침묵의 소리' 책 안에는 엔도의 다른 단편 소설들이 몇 개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아버지의 종교, 어머니의 종교'에서는 엔도는 가쿠레 기리시단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들의 시작은 순교가 아닌 배교였다. 그들의 신앙은 승리자의 신앙이 아니라 실패자의 신앙이었다. 그들 신앙의 출발점은 자신들이 배교자, 약자라는 자각이었으며, 그 어두운 출발점이 그들의 신앙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신앙이, '어머니 되시는 분'이란 단편 소설에서 말하듯이, 오랜 시간을 비밀리에 거쳐 오면서 불교나 다른 종교, 심지어는 토속적인 미신까지 뒤섞여 있는 종교로 변질되었지만, 그들의 아픔과 회한을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단번에 이교도나 이단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엔도가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침묵'을 썼다는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다. 때문에 '침묵'을 읽고 난 후 느꼈던 찝찝함은 말끔히 해소가 되었다. 예수의 예언대로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엔도의 표현대로라면, 가쿠레 기리시단의 조상들처럼 후미에를 밟았던 셈이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그 세 번의 부인함으로 인해 예수께 질책을 당하거나 정죄를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을 체험한 지도자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 페레이라나 로드리고, 그리고 간교한 기치지로라고 해서 그들의 배교 행위 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며 그 영향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퍼뜨리지 않았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엔도는 말한다. 자신 역시 페레이라이고 로드리고이며, 또 기치지로라고. 자신 속의 여러 인격을 각각 독립시켜 그것을 작중 인물로 그려나갔던 것이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의 차이로 인해 다행히(?) 나는 고문과 죽음이 문턱에 와 있는 상황을 맞이하지 않았을 뿐, 일상 속에서는 밥 먹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매일 배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이다. 가쿠레 기리시단은 일 년에 한 번씩 후미에를 밟는 행위를 지속해야 했지만, 그 행위 이외에는 비밀리에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머리와 입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말하고 가끔은 마음까지 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별 생각이 없이 관성에 의해 나만의 가치관에 의해 나를 움직인다. 마치 기계 돌리듯 말이다.

 

물론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겠지만,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통해, 약자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신앙 지키기는 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단지 신은 침묵한다는 메시지나, 침묵 속에서도 말한다는 메시지를 넘어서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종합해 볼 때, 아니 내가 만난 엔도를 느껴볼 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나 늘 잊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어 스스로 곱씹게 만들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도록 하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결국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 가운데 침묵하시든지 침묵하지 않으시든지,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게 된 것이다. 엔도를 통해 '침묵'과 '침묵의 소리'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약한 페레이라, 로드리고, 기치지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순간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분이 침묵하시든 침묵으로 말씀하시든 상관없이 말이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