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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책

신 없음의 과학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12. 20.

 

적을 통해 배우는 신앙

리처드 도킨스 외 | 신 없음의 과학 | 김영사 | 2019

 

글_ 최경환

 

 

이런 책을 읽을 때에는 마음을 열고 읽을 필요가 있다. 메롤드 웨스트팔이라는 기독교 철학자는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를 기독교를 위한 예언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기독교를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기독교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부패하고 썩은 것을 도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성서 안에도 예언자적 전통은 기존 야훼 신앙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무신론의 수호자 4명에게서 우리는 기독교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을 경청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네 명의 학자들은 자신의 책이 출간된 이후 다양한 토론과 논쟁의 자리에 참여했고, 그 이후 어느 정도 자신의 입장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결과물이다. 책 내용을 요약하기보다는 읽으면서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간단하게 소개하려 한다.  

 

  1. 의미가 중요하다는 변명

    저자들은 흔히 신학자들은 사실에 관심이 없고, 그 의미에 관심을 둔다고 말한다. 즉, 성서해석이나 교리를 해석할 때, 그들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그저 상징이나 의미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신학자들의 변명이다. 그러면서 일반 성도들에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믿으라고 강요한다.

    예를 들어, 연옥 교리를 말할 때, <가톨릭 백과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죽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곧장 간다면 우리가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는 하늘나라로 곧장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연옥이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상으로 증명 끝” (46쪽)

    신학적 의미가 중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이 진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부활은 역사적/실증적/과학적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신학적 의미가 중요하다고 할 때, 그것은 기독교 교리나 진리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신학자들은 종종 기독교의 진리가 과학적 입증 방식에 따라 증명되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기독교는 원래 있지도 않은 사실 위에 온갖 화려한 건물은 지은 것인가? 

    하지만 일반적인 역사학에서도 근대의 실증주의적 역사관은 이미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고대인들에게 사실/역사/과학의 의미는 분명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만약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고대의 메시지를 사실/허구의 이분법으로 구분한다면 그 역시 시대착오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2. 무신론자도 믿음이 필요하다?

    도킨스는 무신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의 신념 역시 결단과 지적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창조주나 지적 설계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런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고 말한다. (57쪽)

    결국 무신론자도 결단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다. 

  3. 신앙의 이중장부

    저자들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이중적으로 사고한다. 스스로 믿음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늘 기도한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행동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한다. 상당히 모순적이다.

    그러면서 믿음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활 사건이 대표적이다. 기독교인들은 부활이 완전히 객관적인 사실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믿음이고 신념이라고 말한다. 마치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4. 비겁한 신학자들

    “여기 있는 모든 분이 제리 폴웰 같은 쉬운 표적을 겨냥하고, 학식 높은 신학 교수들은 못 본 체한다는 비난을 받아왔어요. 다른 분들은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느끼는 점은 학식 높은 신학 교수들이 자기들끼리나 지식인에게 하는 말과 신도들에게 하는 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신도들에게는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106쪽)

    “네. 그런데 학식 있는 신학자들이 목사나 전도사에게 말하면, 목사들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겁니다.” (107쪽).

    이건 그냥 뼈 아프게 듣자!!

  5. 종교의 해로움

    네 명의 학자들이 동일하게 지적한 것은 “종교의 해로움”이다. 예를 들어, 점성술은 종교와 비슷하게 미신적 사고를 조장 하지만, 적어도 종교처럼 해롭지는 않기 때문에 폐기시킬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156쪽) 하지만 종교는 세속적 기준으로 봐도 해롭다.

    종교인들이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해롭지 않을 수도 있다. 신앙을 온전히 사적 영역에 가두고, 공적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세속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세상에 해로운 것이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인들을 그렇지 못하다. 자살 폭탄 테러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사회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는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만약 종교가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서 해롭지 않으면 되는 걸까? 반대로 종교가 세속적인 기준으로도 이롭고 유익하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종교가 해롭다는 이들의 주장은 그동안 종교가 공공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로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공공신학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공공선과 인간의 번영에 기여하는 종교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미로슬라브 볼프의 <인간의 번영>을 참고

    하지만 또 다시, 이들의 주장이 정확한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말 이들의 말처럼 종교는 인류 역사에서 해롭기만 했는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 역시 종교가 서구 역사에서 얼마나 잔인한 전쟁을 많이 일으켰으며 해로웠는지를 지적한다. 이에 대해 월터스토프는 과연 종교가 해롭기만 했냐고 반문한다. 30년 전쟁을 통해 관용과 배려의 정신을 서구 역사에 심어 놓은 것이 바로 기독교였고, 미국의 인권운동과 해방운동에도 기독교는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이(심지어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인민을 학살하고 폭력적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어쩌면 종교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거나 과도한 정치적 열망이 타자에게 강요될 때,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1990년 이후 비판이론가였던 하버마스가 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세속 사회에 종교의 귀환을 요청한 이유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공론장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했던 하버마스는 왜 다시 종교를 소환한 것일까?

  6. 증거주의

    도킨스는 “자기가 어떤 것을 증거 없이 믿는다는 이유로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며 산다면 너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라고 말한다. (157쪽)

    증거주의(evidentialism)에 입각해서 지식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 같지만, 또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지식이 확보되지 않는다. 증거주의 인식론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비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개혁주의 인식론을 통해 증거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 나온 <그리스도인을 위한 서양 철학 이야기>를 참고하면 좋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대부분은 정확한 증거에 기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습관에 의해서, 누군가의 권위에 의해서, 혹은 막연히 ‘그냥’ 믿으며 살아간다. 물론 정확한 팩트 체크와 증거에 기반해서 신념 체계를 확립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신념이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7. 실용주의 진리관

    도킨스와 데닛은 모두 종교와 예술을 실용적인 가치 체계로 인정한다. 즉 그것이 실재 세계와 대응하는 진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관계나 어떤 기능을 수행하면 된다는 식이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환상적입니다.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이야기죠! 믿지 않아도 모든 대목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186쪽)

    이는 리처드 로티의 실용주의적 종교관과 유사해 보인다. 다만 로티와 다른 점은, 로티는 우리가 그동안 진리라고 여긴 모든 것들도 동일하게 실용적인 기능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과학이나 종교나 예술이나 모두 동일한 레벨이라고 말한다는 것이고, 도킨스와 데닛은 과학은 전통적인 진리대응론에 상응하지만, 종교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킨스와 데닛은 지독한 근대적 합리주의 체계 속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8. 결론

    궁극적으로 네 명의 학자가 종교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은 그것의 해악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똑 같이 나쁜 것이다. 종교의 해악성에 있어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사실의 차원에서는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정도의 차이는 없다. 모든 종교는 이성보다 믿음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성과 믿음이 늘 양립불가능한 것이지 물을 수 있다. 히친스도 인정하듯 모든 사람은 인지부조화 속에서 살아간다. 정부를 열렬히 비판하는 사람도 세금은 꼬박꼬박 내고, 자식은 공립학교에 보낸다. 말로는 자신이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따라 산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복잡하고 선명하지 못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헷갈려한다. 이것을 자아의 분열이라고 할 수도 있고, 복수적 자아라고 할 수도 있다. 이념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가 분열되고 다른 판단을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오랜 시간 인간은 신을 믿고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살아왔다. 어떤 철저한 근대인도 그 습속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우리의 몸속에는 종교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치 맹장을 떼낸 사람이라도 할지라도 그 상흔은 남아있는 것처럼. 서구 사회에서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근본주의 종교가 증가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저자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과학적 세계관이 증가하면 할수록 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자리를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게 자리를 지킬 것이다. 어떤 이는 종교가 최후의 발악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종교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다면, 어쩌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종교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신의 흔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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