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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과거가 현재를 구원한다.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10. 6.

 

과거가 현재를 구원한다. 

 

글_ 백우인 (bwooin@naver.com)

 


손에 잘 들고 있던 지갑이 없어져서 당황했던 일이 있다. 어디에서부터 지갑이 손에 없었는지 기억도 안 나고 당장 집에 갈 차비도 없는 처지라 눈앞이 캄캄했다. 두렵고 불안에 휩싸여 잠시 멍하게 있다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생각해 봤다.  지갑을 찾고자 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다녀왔던 길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거쳐 온 길을 되짚어 가는 것, 즉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로 찬찬히 돌아가 보는 것이다. 과거를 향해 뚜벅뚜벅 가다 보면 ' 아! 이곳이었구나. 여기에  두고 온 것이구나'라고 사건의 시작점을 만나게 된다. 결국 단추를 잘 못 끼운 지점까지 가야 다시 바로잡을 수가 있다는 얘기다. 정신적 외상이라 부르는 트라우마 치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연애할 때 매번 사랑하는 사람과 삐그덕 거리면서 갈라지게 되었다면 갈라지게 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그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구와도 삐그덕거림을 극복할 수 없다. 

 

과거가 현재를 구원한다는 말이 있다. 현재에 나타나는 증상을 제대로 알고 해결하려면 시선이 현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지나 온 과거로 시선을 돌리고 그곳에서의 시간을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증상은 과거가 만들어낸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 그 지점,  말하자면 단추를 잘 못 끼운 그곳으로 가야 한다. 문화와 문명의 구원은 자연에 있다고 말한 발터 벤야민의 목소리가 수긍이 되는 지점이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심각하게 피부로 느껴진다. 기독교가 사회의 악이 되어버렸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초기 기독교인들이 내부적으로는 이단의 문제로 외부적으로는 이교도들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격고 있었지만 변증가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종교와 신앙생활의 내용이 매우 바르고 합리적이며 합당한 것이라고 알리는 노력을 했다. 결국 소종파였던 그리스도교는 국교가 되었고 서구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와 동일시될 정도다. 오늘날 우리는 기독교를 변증 할 수 있을까?

지금 기독교의 실정은 외부적으로는 사회의 공공질서를 무너뜨리고 공동체의 안위에 위협을 가하는 단체가 되었고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꺼려하고 이기적이고 몰상식한 집단이라고 손가락질 한다. 내부적으로 기독교는 관료주의와 자본주의와 깊은 연결고리를 갖고 있으면서 정치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선포되는 복음이 어느 일각에서는 검증되지도 않고 신학적이지도 않은 개인의 사사로운 해석으로 변질된 지 오래고 그 내용을 필터링할 수도 없는 맹목적이고 맹신하는 성도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현재 기독교와 교회는 위기를 알리는 비상경보기에 불이 켜져 있고  요란하게 경고음을 내고 있다. 이러한 현재는 과거 어디쯤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주장을 해왔다. 그중에는 제법 큰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이를테면, '예배는 반드시 대면 예배여야 한다. 동성애를 반대해야 한다. 원죄교리를 지켜야 한다. 아담의 역사성을 인정해야 한다. 전통적 기독교 교리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창조를 했다' 등 고집스러울 만큼 굳건하고 강경한 목소리와 함께 그들의 주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에 '왜?'라는 질문을 한다 해도 논리 정연한 대답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들의 주장은  의심할 수 없는, 어쩌면 의심하지 않는 신화적 믿음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에 대해  전통적인 교리이고 성서적이고 신학적이라고 일갈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디에서도 그들의 주장을 탄탄하게 지지해 줄 내용을 찾아보긴 어렵다. 

 

20세기 이후의 사상들의 주류는 하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을 갖을 것과 끊임없이 의심하고 새롭게 해석해 보는 것이다. 이분법을 넘어 제3의 길을 추구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으며 동일성과 확실성은 불확정성과 경향성. 그리고 과정과  ㅡ되기로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념은 성좌이며 개념은 리좀적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직도 계몽주의 조차도 건너오지 못한 채 중세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쯤에서 단추를 잘 못 끼운 것일까? 

 


기독교 사상사를 처음부터 다시 읽으며서 초기 그리스도교가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단들과 맞서 시행했던 성경의 정경화 과정까지 가면 될까? 조직신학 책을 다시 읽어서 교리의 내용이 체계화되는 과정으로 돌아가 보면 될까? 성경을 다시 읽어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내용이 들려지는  자리로 나아가야 할까? 성경의 어디를 펼쳐봐도 신앙의 모습과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들이 개념화된 곳을 찾을 수가 없으니 어찌 된 일일까?

잠시 다른 질문으로 우회해 보자. 사랑하는 사람 K가 있는데 K가 이러저러해서 그를 사랑한다고 할 때, K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를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 것일까? 그를 향해 생겨난 감정들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모른채  남들처럼 그냥 사랑이라고 믿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때부터 대상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호명한 그 감정들을 사랑이라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는  그 대상을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린 너무  우리의 감정과 마음을 의심하지 않고 순진하게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 대신 믿음을 넣어보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믿음은 믿을 만한 것일까? 우리가 믿는 것들의 내용은 언제부터 믿게 된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은 확실하다고 검증된 것일까? 검증되었다면 검증하는 주체는 누구여야 할까? 우린 너무 쉽게 믿음을 고백하고 유지하려 애써온 것은 아닐까?  믿음의 꾸러미들 중에 무로부터의 창조는 어떤가? 아담을 통한 유전죄는 어떤가?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은 어떤가? 하나님의 전능함은 어떤가? 위에 나열한 것들이 부정된다면, 다시 말해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면, 아담을 통한 유전죄란 없는 것이라면 아담과 하와가 인류 최초의 조상이 아니라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전능이 제한적이라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2000년 이상을 이어 온 기독교 전통이 위태로워지고 급기야는  와해되고 마는 것일까?
 


전통은  규화목에 갇힌 화석이 되어서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 발전하는 가운데 계승되어지는 것이다. 역사가 진행되어 오면서  전통으로 자리매김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특정한 어느 시기의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공통적인 것이나 반복된 것들, 동의된 것들, 합의된 것들을 서로 승인하고 지킴으로써  유지되어 오고 후대에 전해져 온 것들이다. 이 과정을 돋보기로 확대해서 들여다본다면 여러 가지 다양한 요소가 작용했을 것이다. 이것을 푸코식으로 말하면 미시 정치학이나 미시 물리학적 접근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힘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욕망과 그 욕망하는 강도의 크기와 방향에 의해서 선택되고 강요되고 주입된 채 전통이라는 이름과 권위를 획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인가?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지되고 보존되고 보호 되어야 하는가? 전통은 수정되어서는 안 되는가?  만일 '그렇다'라고 한다면  현대 과학이 설명해 내고 있는 인류의 진화와 물질의 연속성 그리고 공동 조상 등을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축에 서 있는 전통적인 개념들은 어디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또 과학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을 때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에  온갖 유익과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는 분열된 주체는  어디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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