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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무덤 속 예수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 4. 6.

 

무덤 속 예수

 

 

눈 깜짝할 사이에 3월이 반절이나 지났습니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별문제 없이 평탄하게 일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일터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꼬박꼬박 8시간을 지냈고 남은 시간 동안에 책을 읽고 가족과 함께 지내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물론 시간의 내용을 펼쳐보면 맨질맨질 고르고 평탄한 시간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매 순간 갈등도 있고 대립도 있고 뚫고 나가야 할 어려움과 문제들도 있고 결정해야 할 사안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견디기 힘든 지루하고 골치 아픈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또 어찌어찌 살아내고 견디고 흘렀습니다.

 

'사느라고 애쓴다'는 말은 내 힘으로 살아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모양새가 떠오릅니다. 우리네 인생은 광야 사막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영혼이 피곤합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우리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지요. 이러한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만나고 체험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어 주셨고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는 이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으며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다'는 구속자의 고백이 오늘 저의 고백이 됩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묵상한 그림 중에 마음을 붙잡는 작품이 있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스 홀바인의 그림 <무덤에 계신예수>와 <헨리 8세의 초상화>입니다. 한스 홀바인(1497~1543)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입니다. 1533년경 영국 왕실의 궁정화가가 되어 헨리 8세의 초상화를 그립니다.

 

 

헨리 8세는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입니다. 1509년 열여덟에 왕위를 계승하지요. 복잡한 여성 편력과 여섯 번의 결혼으로 유명한데, 재위 기간 중 종교 개혁, 영국 국교회 수립, 정치적 중앙집권화 등의 성과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초상화 속 헨리 8세의 모습은 그가 이룬 성과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용이 드러나 있습니다. 180이 훌쩍 넘는 큰 키와 꽉 다문 견고한 입술,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 이마는 귀티가 흐르고 당당합니다. 그가 입고 있는 화려한 의상과 그가 몸에 걸고 있는 귀금속 장신구는 영원토록 빛이 바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거머쥔 두 주먹은 뭇사람들을 졸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이 그림은 <십자에서 죽음을 맞고 무덤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성금요일을 지나 성토요일, 그러니까 죽임 당한 후 부활하시기 전까지의 모습인 셈이지요.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어떤 모습을 상상하십니까? 다윗의 자손이며 승리의 나팔을 불면서 마치 나폴레옹이나 헨리 8세처럼 세상을 재패하고, 온 세상을 그의 발 앞에 엎드리게 하며 그의 위엄과 권능 앞에 엎드린 모든 이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헨리 8세의 모습 같은 구원자를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인간적인 합리성으로 보건대, 그래야 우리가 믿고 따르고 구원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홀바인의 무덤 속의 예수님의 모습은 믿음이 신실한 사람마저도 실족하게 할 만큼 처참한 모습입니다. 그의 그림은 고통 속에서도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예수의 몸, 그 몸을 보는 이들에게 종교적이고 경건함을 더욱 다지게 하는 그림이 아닙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2부에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열여덟 살의 소년 이폴리트는 이 그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구타를 당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고 지독한 피멍이 들어 퉁퉁 부어올랐으며 두 눈이 감기지 않은 채 동공은 하늘을 바라보고 커다랗고 허연 흰자위는 뿌연 유리 같은 광채를 내고 있었다. 고통에 찢긴 인간의 시체를 보고 있노라면 매우 특이하고 야릇한 의문이 생겨났다. 이 시체를 보면서 어떻게 순교자가 부활하리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저런 모습으로는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고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줄 능력이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작은 씨앗 하나도 촉촉하게 품어줄 물기도 안 보이고 푸근하게 품어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 같은 한겨울 들판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저 모습에 우리의 믿음이 있고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 사랑의 현사실성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저 동토와도 같은 모습 속에 생명수가 흐르고 우리의 생명이 움트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질고를 짊어지고 그의 모든 물과 피를 쏟아 세상을 씻기고 우리를 씻겨주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우리를 향한 처철하게 지독한 그 사랑, 우린 그 사랑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전 존재를 내맡기는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그 길을 꾸역꾸역 가는 것입니다.

 

 

죽음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 모세가 높게 들어 올린 놋뱀을 바라보는 자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헨리 8세와 같은 모습이 아닌 무덤 속의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는 자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죽음이 난무하는 혼돈과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부자도 가난한 이들도 귀족도 노예도 건강한 자도 병든 자도 어린아이도 노인도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그들 앞에 죽음이 춤을 청하면 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이들은 죽음(심판) 앞에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민수기의 장면은 모든 이들을 죽음이라는 심판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죽음으로부터 건져내 생명과 삶을 주려는 것입니다. 아비귀환의 모든 상황에서 죽음으로부터 건져내 구원에 이르도록 할 인도자를 바라보며 오직 모든 것을 내맡기는 우리의 자세만이 남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맡긴다는 것은 내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넘어서는 행위와 태도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해 보건대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 같으면 어떤 일이든 그 일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적인 합리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다는 말, 이 말은 한계적 합리성을 넘어서는 궁극의 합리성이 실현되는 말, 곧 전 존재를 맡길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사로잡히지 않으면 맡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압도당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에 압도당하고 사로잡혀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글 | 백우인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새물결플러스에서 과학 관련 신학책을 소개하는 튜터로 활동하고 있다. 과신VIEW에서는 과학과 예술과 신학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을 글로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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