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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다윈주의의 도전! 숙제인가, 선물인가?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 4. 6.

 

다윈주의의 도전! 숙제인가, 선물인가?

- 24회 과신대 콜로퀴움 리뷰 -

 

 

이번 24회 과신대 콜로퀴움은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장재호 교수의 강연을 통해 창조와 타락이라는 중심 주제가 현대 과학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참고로, 장재호 교수는 2015년 <The Future of Dialogue between Science and Religion>이란 제목으로 과학과 종교 포럼(Science and Religion Forum)에서 주관하는 피콕 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마크 해리스의 『창조의 본성: 성서와 과학 사이에 다리 놓기』를 번역하였습니다.

 

다윈주의 하면 신앙적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들까요? 한 때 문자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저로서는 일반 교인들이 다윈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답변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사 직분을 가지고 있는 성도 몇 분과 교회학교 고등학생 몇 명에게 다윈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답변은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 부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답변자 중 일부는 다윈주의가 신앙과 대립하는 것으로만 볼 수 없고 과학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답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과학과 다윈주의에 대해 그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왔던 분들이 이번 24회 콜로퀴움 강연을 들었더라면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고 그렇다고 무조건 믿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은데 이번 콜로퀴움 강연에서 다윈주의가 던진 질문들 즉, 아담의 역사성은 확언할 수 있는 것인지, 확언할 수 없다면 아담의 타락으로 시작된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경쟁과 고통, 죽음이 태초부터 존재했다면 이것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새롭게 인식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강연의 전반부 : 성경의 원역사를 이해하는 방법과 창세기를 이해하는 방법

 

옛말에 일 못하는 목수가 연장 탓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원목 DIY를 어느 정도 해보니 목수가 연장 탓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일을 해오셨던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일은 연장이 한다는 것입니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어떤 도구나 방법을 쓰느냐도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방법이 있습니다. E.H.카는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 사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사건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해석, 평가하여 재구성할 때 확립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어떤 방법을 가지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기울어진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들춰내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원역사를 이해하는 위해 2가지의 중요한 질문을 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 기자는 독자들이 성경을 역사적 사실로 읽히도록 의도하였을까이고, 둘째, 성경 기자는 자신들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 또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함을 믿었을까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의 기준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진리를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말씀 안에 담긴 진리를 보지 않고 문자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실이냐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창세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3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역사적이고 신학적 문헌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이는 보수적 입장으로서 창세기를 시공간적으로 실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고대 역사를 편찬한 문헌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즉, 창세기를 다른 고대 문헌들처럼 하나의 고대 기록이며 실제 그것이 있었던 것과는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성경 기록의 본래 의도는 하나님 한 분이 온 우주의 창조주라는 것을 밝히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세 번째 방법은 창세기를 원형적인 역사로 보는 방법입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창세기 역사성의 존재는 인정하되 그것의 모티브가 되는 사건이 있을 것이고 그것에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고든 웬함은 “창세기 1-11장은 처음에 있었던 일들, 즉 우주와 세상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차원에서 원형적인 역사다. 또 창세기 1-11장은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그 방식에 대한 설명을 펼쳐 나가기 시작한다는 차원에서도 원형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원형적이라는 말은 하나의 모형이라는 뜻으로 우리 삶에서 충분히 있었을 법한 일이지만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해 하나의 모델로 가져왔고 결코 허구가 아니며 근거가 되는 사건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강연의 중반부 : 창세기 1장의 의의와 아담의 타락

 

창세기 1장이 쓰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정말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어떻게(How) 창조하셨는지 그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왜(Why) 창조하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일까요? 창세기 1장이 정말로 창조의 방법이나 절차를 설명하려는 의도였다면 그 한 장으로 기록했어야 했는지 개인적으로 의문이 생기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부 오리게네스의 솔직하고 진솔한 자세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나도 묻고 싶다. 해도 없고 달도 없고 별도 없이, 심지어 첫째 날의 경우에는 하늘도 없이, ‘저녁’과 ‘아침’까지 언급되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이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어떤 총명한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보일까?”

 

아담의 타락, 즉 원죄의 문제는 창조의 이해만큼이나 어렵고 무거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원죄를 신학적으로 정리한 어거스틴이 로마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면 원죄의 문제를 올바르게 보는 관점이 생길 것입니다. 우선 어거스틴은 헬라어 성경을 본 것이 아니라 라틴어 성경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에서 어거스틴은 밑줄 친 ‘~으므로’를 in whom으로 해석, 즉 ‘아담 안에서’ 모두가 범죄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는 원죄 교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담을 대표적인 성격으로 보았습니다. 즉, 아담을 죄를 지은 모형으로서 우리도 죄를 지으면 그와 같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이라면 그렇게 역사성을 강하게 주장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죄를 물려받는다고 믿는 사람은 바울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르는 것입니다.

 

 

강연의 후반부 :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사건

 

노아의 홍수나 바벨탑 사건은 성경에서도 매우 흥미 있는 내용이고 교회에 다니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도 무척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에 대한 접근 또한 역사적이냐 아니냐 보다는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홍수가 전 지구적 사건이냐, 노아의 방주에 정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을 실었느냐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또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면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판단이 된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 사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놓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그러한 사건이 왜 일어났으며 어떠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대홍수가 났던 것은 역사성을 담고 있고 구전되어 오고 있으며 누구나 아는 사실로 공유되는 사건입니다. 이는 아트라하시스나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고대 문헌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기자는 그러한 대홍수 사건을 인간의 타락 측면에서 해석하였고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셨으며 심판하셨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바벨탑은 지구라트를 의미합니다. 지구라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거대 탑으로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성경 기자가 이 바벨탑 사건을 기록한 것은 당시 가장 화려했던 바벨론 도시의 지구라트라 신전이 제아무리 높고 거대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느 것도 높아질 게 없다는 신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려 했던 바벨탑 시도를 무력화하고 성경에서 바벨탑 사건 다음에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창세기는 원역사를 정확히 기록하거나 또는 과학적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왜 그 일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 원역사에 대한 문자적 고찰보다 신학적 고찰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창세기에 나타난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옳은 이해 방법이 아니며, 창세기를 허구이고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단정하는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창세기 이해 방법은 창세기의 토대가 되는 원역사는 반드시 존재했고 이것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성경 기자가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아서 기술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초점은 이 부분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는지 신학적 메시지를 더욱 분별하려고 노력하면 더욱 의미 있게 창세기 원역사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과학의 증명 대상이 아니라 신앙고백의 대상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과학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과학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은 과학의 성과를 반영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타협이라고 말을 합니다. 과학의 성과를 반영하는 것이 신학을 고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완벽한 신학이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과거의 전통에 가두어 두려고 하면 안 되고 과학의 새로운 성과를 반영하여 성경을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학을 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다윈주의의 도전은 분명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간과해서도 안 되고 회피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 직면한 과제를 과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풀어낸다면 이는 분명 과학이 기독교에 주는 훌륭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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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과 천문학에서 말하는 우주탄생의 역사,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이론, 화학에서 말하는 물질의 성질 및 변화 등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역사하시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고대인들의 한계로 잘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현대 과학의 도움에 힘입어 감동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글 | 김완식 기자 (comebyher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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