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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그대와 나는 뼈다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 1. 12.

우연히 X-레이로 촬영한 뼈의 사진을 보면서 다소 경건한 숭고미를 떠올리는 중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한 그 정렬들이라니. 그것은 차라리 단호함, 무결함을 넘어 대칭성의 아름다움이다. 예술가들의 미와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미의 표현이 엄연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움은 칸트의 미학에서 숭고미라는 이름으로 만나진다.

엑스레이의 시작은 1895년 뢴트겐이다. 이마를 어딘가에 콩 찢거나 부딪히면 눈에서 번쩍 불이 나오는 경험을 해봤다면 그의 발견이 새삼스럽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 당시 X선의 발견은 엄청난 것이었다. 뢴트겐은 어두운 암실에서 음극선관을 두꺼운 검은 종이로 싸서 빛이 새어나올 수 없게 했는데 책상 위쪽이 밝은 것을 우연히 발견한다. 그는 아내 안나의 손을 음극선과 감광판 사이에 올리게 해놓고 검게 드러난 뼈와 좀 더 검게 보이는 금속반지 사진을 얻게 되었다. 그러니까 안나의 손가락뼈 사진은 최초의 엑스레이 사진이다. 알 수 없는 빛이라는 의미를 붙인 X선을 발견하고 뢴트겐은 그 공로로 1901년에 세계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처음'으로 인지된 X선과 그것의 기능, 그리고 그 기능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추측들은 나름의 심증이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억측과 개연성의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다. 가령 해부하지 않고서도 몸의 내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신기와 경이뿐만이 아니라 노출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뢴트겐이 아내의 반지낀 손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았을 때 그는 신기하고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빛이 드러낸 아내의 손가락뼈 사진을 보면서 어땠을까? 사랑하는 이의 살갗뿐만이 아니라 몸의 내면까지도 보게 되어 야릇한 흥분에 휩싸이지 않았을까? 직접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체를 이루고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뼈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니 무덤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 순간은 인류를 향한 문명의 진보가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우연한 발견이 음극의 성질을 띤 전자, 양극의 성질을 띤 양성자 등의 입자를 발견하게 되었고, 물질을 이루는 작은 입자들의 세계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오늘날 현대과학의 문을 활짝 열어주게 된 셈이다.

 

그러나 뢴트겐의 아내, 안나는 메멘토 모리의 목소리를 들었던 걸까? 헛되고 헛되다는 한스 홀바인의 그림 속 해골의 음산한 미소와 손짓을 보았던 걸까? 현대의 과학 문명이 시작되려는 그 찰나에 그녀는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했으니 말이다. E=mc2에 담긴 에너지의 효과가 보여주듯이 결국 인류가 어느 시점에서는 핵폭탄의 제물이 되었다.

엑스레이는 인체조직의 종류에 따라 방사선이 다르게 흡수되는 원리를 이용한다. 사진을 봤을 때 척추, 갈비뼈 등과 같은 뼈들이 하얗게 보이는 것은 방사선을 많이 흡수하기 때문이다. 공기로 차 있는 폐와 같은 부위는 대개 검게 보이고 살은 뿌연 회색 하늘빛이다. 척추동물이며 그중에서도 호모 사피엔스의 척추뼈. 인간에게 척추뼈는 인간을 나타내는 규준이다.

 

하나의 종을 구분 짓는 기준항목은 그 종의 대표성으로 환원된다. 예컨대 인간은 물질이고 인간은 동물이고, 인간은 유전정보이고 인간은 뇌이고 인간은 언어이고 인간은 이성이고 인간은 그 여타 등등의 무엇이다. 인류의 상징 중 하나는 바로 직립보행에 적합한 척추뼈의 구조이므로 인간은 '뼈다'로 환원될 수도 있겠다.

환원시킨 규정은 나름의 진실이 있다. 그러나 환원된 규정이 갖는 진실의 무게는 무한대 분의 1의 값을 가질 뿐이다. 전체성으로서의 인간의 계열화는 끝이 없다. 그럼에도 그 진실에는 나름의 의미가 매달려 있다. ‘인간은 뼈다’라고 할 때, 이 뼈는 위계구조다. 진골, 성골과 같은 계급제는 물론이거니와 기독교 집안, 불교 집안, 유교 집안, 김씨 집안 교육자 집안, 의사 집안, 변호사 집안, 기업가 집안 등등으로 하나의 뼈대를 이루는 그들의 존재론적 위치는 철저한 배타성을 기반으로 한 계급과 계층의 상징이다.

 


뼈는 가장 순도가 높은 진실이 거하는 곳이기도 하다. 어떠한 사상에 깊게 경도되어 있을 때 ‘골수분자’라고 하는 것이 그러하고 ‘뼈 때리는 말’처럼 아파서 피하고 싶은 진실이 와 닿는 곳도 뼈이다. 우리 몸 내부의 지극히 깊고 은밀한 곳인 뼈, 그곳은 사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내면적 존재 상태가 거주한다.

뼈는 가장 극진한 감각들의 집합소이다. 아픔, 고통, 슬픔, 진실, 기쁨. 이것들의 끝이 뼈까지 닿았을 때 우리의 존재는 진저리치는 소멸과 싹이 움트는 생성과 거듭남의 의식이 거행된다. 불온한 것들의 무덤. 손상된 원형질이 치유되는 곳. 연약한 것들이 담금질 되는 곳. 뼈는 지성소다. 뼈로서의 인간, 그 인간의 뼈는 매 순간 빵처럼 갈라지고 포도주로 적셔지는 지성소이다.

거리를 거닐고 있는 뼈들. 불순물이 끼인 뼈에 온갖 힘을 싣고 걷는다. 비활성 금속 같은 순도를 지니러 지성소로 향하는 걸음. 혼탁한 세상의 살 속에 있는 우리, 그대와 나는 뼈다.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튜터. 신학공부하면서 과학에세이와 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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