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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이야기/과신대 사람들

[강태영 박사 인터뷰] 1. '무로부터의 창조'와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는 모순이 아닙니다.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10. 3.

 

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에서 "과학이 본 자연, 신학이 말하는 자연"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시는 강태영 박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강태영 박사님과의 인터뷰는 2회에 걸쳐서 연재할 계획입니다.

 

일시: 2019.9.28 토요일 오후

인터뷰이: 강태영 박사

인터뷰어: 최경환 실장

 

Q: 안녕하세요. 과신대에서 처음 인사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A: 저는 대구가 고향이고 경북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창조신학을 공부한 강태영이라고 합니다. 석사 과정에는 기독론을 주로 공부했고, 박사 과정에서는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신학과 과학은 서로 방법론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의 실재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신학과 과학의 대화는 창조의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Q: 창조신학은 구체적으로 신학의 어떤 분야에 속하나요?

 

A: 우선 저는 조직신학이 전공이고, 전통적인 분류로 따지자면, 창조론은 신론에 속하는 분야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묻기 때문에 창조론에 속하는 거죠. 그래서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으로 창조를 이야기하지만, 오늘날 창조신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 자연, 우주, 여러 용어로 부르더라도, 보편적인 하나의 실재를 창조라고 볼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됐다고 고백하고, 연구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행위야 말로 하나의 실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틀이 된다고 보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창조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다른 학문에서는 어떻게 연구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학문들과 대화를 하면서 창조세계를 연구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고백을 할 때, 사도신경의 첫 고백, 이것이 신앙의 영역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는데, 이 신앙고백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나는 믿음으로 고백하지만, 이것을 선포해야 하는데, 이 선포에서는 종교의 특수한 주장으로서는 의미가 없어지죠. 너무 주관적인 신앙의 고백이 되는 거죠. 그 점에서 끊임없이 다른 학문과 대화를 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는 거죠. 

 

신학사에서는 생태계의 위기가 창조신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소위 생태학적 창조론이라는 것이 일어났습니다. 이 창조세계는 그저 재료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는 물질세계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일 수도 없고, 인간의 삶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계는 인간과 함께 존재하는 공동의 피조물로서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이것 또한 하나님의 소중한 피조물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것이죠. 이런 인식을 통해 창조신학이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Q: 그렇다면 창조신학은 세속 사회에서의 학문의 결과를 수용하면서 신학을 적절하게 설명하려는 시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일반 학자들이 볼 때에는 창조, 창조주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학 쪽에서는 자신의 학문이 단순히 신앙고백의 차원이 아니라고 말하니 말이죠. 굉장히 어려운 작업인 것 같습니다. 

 

A: 각 시대 마다 신학은 늘 어려운 위기 혹은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푸스의 신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어떻게 다른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철학자들의 신과 대결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신이 단지 유대 종교의 신이 아니라 천지 만물의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 당시에도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어느 시대든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금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과학이 가장 어려운 대상이 된 것이죠. 

 

Q: 과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A: 저는 신을 논증하려는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과학이 경험적 학문이라고 한다면, 신학은 계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출발이 초월에서 시작하죠. 그래서 방향이 반대인 것 같지만, 신학도 종국적으로는 신자들의 경험에서 하나님을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로부터 신앙 교육을 받기도 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될 때는 신앙공동체에 속한 한 신자로서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의 경험이라는 것이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과학만 경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도 경험적 기초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은 수많은 실험과 검증의 과정이 있게 되지만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과학적인 검증은 아니지만 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공동적인 경험을 통해서 전승됩니다. 전승은 한 사람의 주관적인 망상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기능을 합니다. 

 

과학에서도 실증적으로만 그 성격을 규명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과학도 궁극적으로 사고실험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과학에서도 추론이 중요한 역할을 하죠. 직접적인 실험이 어려운 경우 모형을 통해서 하기도 합니다. 과학 안에서도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추상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학 역시 과학만큼이나 경험에 의존하고 있지만 계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죠. 또 계시라고 하는 것이 주관적인 것 같지만 종교 경험 전체에서 추론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이 시대에 창조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설계 논증'처럼 논증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이것은 논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합리적으로 선택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올 때, 합리성, 경험과의 조화, 이런 것들이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과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합성, 일관성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일단 자기 논리 안에서는 모순이 없어야 하죠. 이런 것들을 놓고 볼 때,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문학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연과학과 전혀 동 떨어진 특수한 지식은 아닙니다. 과학과 충분히 같이 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라고 부르고, 과학은 자연이라고 부르지만, 하나의 현실, 하나의 실재를 신학의 언어로 표현하고 진술할 때, 이 점에서 충분히 신학의 목소리를 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의 실재를 설명할 때, 자연과학의 설명만이 유일한 결론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의 실재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서로 보완할 여지가 있습니다.

 

 

Q: 예전에 제가 '혼돈으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글을 읽고 오히려 그것이 더 성서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러셀 교수님 같은 경우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어요? 

 

A: '무로부터의 창조'는 교리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성서에 직접 나오지는 않죠. 다만 성서 전체의 내용과 정합성의 관점에서 볼 때,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할 수 있죠. 교리라고 하는 것은 성서 해석의 결정체이지 않습니까. 교리는 성서의 어떤 특정 구절만을 가지고 만들면 안되죠. 적어도 4세기 이후에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나 자유를 해칠 수 있는 사상과 경쟁을 하는 상황이었죠. 전제 없는 우주.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걸 주장해야 했기 때문에 나온 교리입니다. 교리가 성서를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성서는 원천과 같습니다. 고갈되지 않는 원천이죠. 

 

무로부터의 창조, 혼돈으로부터의 창조,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서 해석상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고, 또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성서의 전승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두 개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모순을 일으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하나님을 진술하고 있는 부분에 있어서는 언어의 논리로 충돌하는 부분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순의 문제가 아니라 신성의 깊이를 우리가 온전히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이 세계의 우발성, 존재 자체의 우발성을 말해줍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유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창조, 세계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고, 하나님도 필연적으로 창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죠. 이 세계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피조물이라는 거죠.

 

또한 이 세계는 신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고대 우주 발생론에서는 신화 속의 신들이 투쟁해서 우주가 생겨납니다. 그럼 이 우주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고대 전쟁도 사람들이 싸우는 것 같지만, 신들의 전쟁의 그림자가 인간의 전쟁으로 생각했습니다. 신화적 세계상 속에서 이 세상은 두려움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무로부터의 창조는 이 세상에서 신성이라는 요소를 제거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 '모든 것을 다스리라.' 인간 이외의 모든 것들은 너희가 다스리라고 한 것이죠. 그 말은 인간은 그 무엇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지배되어서도 안 되는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것이죠. 

 

또 무로부터의 창조는 과학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세계가 신적인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이것을 관리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경험하고 관찰하고 연구하는 대상이 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은 '세계의 비악마화'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생태학적 신학에서는 그럼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정당화로 사용했다고 비판합니다. 이 비판은 정당합니다. 하지만 이 세계가 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겨주셨다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자연을 관리해야 합니다. 자연에 대한 책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중요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자연 탐구에 대한 해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점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는 신정론적인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폰 라트와 같은 신학자는 '보시기에 좋았다'를 합목적적으로 창조되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분에 보시기에 좋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이 세계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믿고 살아가는데, 우리의 경험 속에는 보기에 좋지 않는 악의 경험, 고난의 경험이 있습니다. 신정론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에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분의 백성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당신께서 보시기에는 좋은 세상인데,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악의 경험, 악인들이 잘 되는 경험들이라는 거죠. 마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경험이 많다는 거죠.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는 거죠. 

 

일단 성서는 질문을 하라고 합니다. 욥이 질문했던 것처럼 말이죠. 답 이전에 질문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혼돈으로부터의 창조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가톨릭 신학자 학 같은 경우, 창조는 하나님께서 첫 번째 창조, 즉 무에서 무엇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셨고 이 창조가 완성이 되기까지 하나의 과정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처음의 창조, 계속적인 창조, 새 창조, 전체로서의 창조가 하나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체를 보시고 좋았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한 순간을 살아가기 때문에 이 전체를 볼 수 없으니깐,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 세계를 이야기할 수 없는 거죠. 종국적으로 이 과정 전체를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이 전체를 보면서 종말에 이르러 비로소 전체의 모습이 완성되는 거죠. 그리고 그 종국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완성되는 거죠. 우리는 그 과정의 한 지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죠. 인식론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리고 종말의 그 과정을 앞 당겨서 볼 수 없는 거죠. 그 점에서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죠.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는 창세기 1:2에서 나오고, 그외에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빛만이 아니라 흑암도 창조하셨다고 나오죠. '너희들 가운데 재난을 보내겠다'라는 표현도 나오죠. 그래서 성서에는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라는 사상이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혜 문학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혼돈이라는 것의 개념과 해석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우선, 혼돈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태인가, 존재인가? 혼돈이 존재라고 한다면, 신들의 세계가 있는 거죠. 조로아스터교처럼 선과 악의 신이 있는 거죠. 그런데 성서는 혼돈을 상태로 묘사하지 어떤 신으로 묘사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존재와 싸워서 이겨야 창조가 완성된다고 보질 않습니다. 오히려 혼돈은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의 특성이나 속성 같은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혼돈으로부터 빛이 있으라 혹은 물과 땅이 나뉘어라, 이처럼 담수와 바닷물을 나누고, 분할시켜가는 과정, 이 과정이 창조하는 과정인데,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 행위는 나누는 행위입니다. 영역을 정하는 행위입니다. 젱어라는 구약학자는 이집트에서 이 혼돈이라는 개념은 나일강에 홍수가 일어나면, 나일강 하구에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민물이 갑자기 밀려와서 바닷물에 염도가 떨어져서 물고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반면 해일이 일어나면 반대로 염도가 높아져서 물고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염병은 죽음의 사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땅은 산 자들의 땅인데 죽음의 사신들이 엄습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진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적군이 쳐들어와 침략할 때, 이런 것들을 혼돈으로 본 것입니다. 창조는 이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본 겁니다.

 

고대 왕은 1년에 한 번씩 맹수 사녕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데, 이것은 백성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 왕의 책무였습니다. 이것이 고대 세계에서는 왕이 이런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고 이 세계를 생명의 세계로 만들어야 하는 책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인간 전체가 이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땅을 정복하게 다스려라. 하나님께서는 이 혼돈을 끊임없이 생명의 세력을 바꾸어 가십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혼돈의 홍수를 길들여서 물이 자기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혼돈의 물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길들이고 제압하시는 것으로 나옵니다. 혼돈을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길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혼돈의 물이 샘물이 되어 솟아나고, 냇물이 되어 사슴들이 목을 축이고, 밭에 밀이 자라게 됩니다. 창조주는 끊임없이 이 피조 세계 안에서 엄습해오는 혼돈의 힘을 지금도 제압하는 신으로 나옵니다. 혼돈의 힘을 생명을 위한 힘으로, 생명을 섬기는 힘으로 바꾸십니다. 악을 선용하는 능력의 창조주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이 신정론적인 대답이었습니다. 

 

혼돈은 우리가 살아가는 창조 세계의 하나의 속성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 행위를 통해서 이 혼돈을 생명을 위해 봉사하도록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것을 위임하셔서 정의를 수립하고, 샬롬의 평화를 추구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모두 혼돈을 극복해가는 과정입니다. 그점에서 보면, 혼돈을 극복하는 행위는 구원 행위하고 직결됩니다. 죄와 악의 행위는 관계를 훼손하는 겁니다. 이웃의 권리를 침해한다든가, 인권을 짓밟는다든가, 항상 관계의 손상, 왜곡이 죄악이니깐요. 그래서 정의를 세우는 일은 혼돈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구원이냐, 창조냐, 이런 논쟁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불순종하고 타락을 했고, 하나님이 복구를 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을 하셨다, 소위 실락원과 복락원의 모델이었습니다. 지금 창조신학에서는 완벽한 창조, 완벽한 태초의 상태, 손상, 회복, 이런 도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는 처음부터 하나의 과정이었다. 과정이기 때문에 완전이냐 불완전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창조 안에 혼돈의 속성이 있는 것은 단순히 그 자체가 악의 문제라든가 창조의 불완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혼돈이라는 것도 선을 위해 사용하시기 때문이죠. 욥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악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활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심지어 악도 선용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죠.  

 

따라서 창조신학은 창조의 과정 전체를 구원의 과정으로 봐야 하고, 구원의 역사 전체를 창조로 봐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종말을 구원의 완성이라고도 보지만 새창조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마지막은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순서상으로는 창조가 먼저이지만 구원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처럼 설명을 했는데, 창조신학은 창조가 오히려 구원 전체를 포괄하는 틀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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