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신대 이야기/과신대 사람들

[강태영 박사 인터뷰] 2. 하나님의 자기제한과 창조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19. 10. 23.

 

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에서 "과학이 본 자연, 신학이 말하는 자연"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시는 강태영 박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강태영 박사님과의 인터뷰를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일시: 2019.9.28 토요일 오후

인터뷰이: 강태영 박사

인터뷰어: 최경환 실장

 

 

Q: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창조를 하나님의 필연성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훨씬 더 창조 세계의 보존과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몸으로 생각하니깐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필연으로서의 창조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창조의 가치를 높일 수는 있겠지만, 사랑은 필연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깐요. 사랑은 자발성이지 않습니까. 여성신학이나 과정신학의 한계는 그 지점인 것 같습니다. 환경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창조 이야기가 끌려들어 올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카오스든 무로부터의 창조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평행하는 영원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말하니깐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은 상대화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는 대부분 다신론적인 국가들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Q: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부가 세상이다"라는 말은 어떨까요? 범재신론이라든가 몰트만은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지 않나요? 

 

A: 네, 그런 설명은 유대인 사상가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침춤'(Zimzum)이라는 사상에서 나온 겁니다. 원래는 이 사상이 성전신학에서 나왔습니다. 신학의 이론만이 아니라 신학의 생성과정을 알아야 하는데요. 모든 신학에는 이력이 있습니다. 성전신학에서는 '무한하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 지은 공간에 들어와 계실까?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다면, 밖에는 안 계실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이죠. 어찌 보면 장난스러운 질문일 텐데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죠. 솔로몬 성전은 하나님께서 다윗 시대에 허락하지 않고 솔로몬 시대에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이 이 성전에 정말 임재해 계셔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가 거기서 기도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만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여기 어떻게 들어와 계신다는 말이냐?'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옷자락을 성전에 걸쳐 놓은 것이 아니고, 즉 성전은 하나님의 부분 집합이 아니고, 하나님이 여기에 임재해 주셔야 하는데, 그 방법은 하나님이 자신을 제한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본 것이죠. 자신을 수축하셔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셔서 이곳에서 우리는 만나주시는 방법 밖에 없다고 봤습니다. 우리가 보통 왕을 알현하다고 하잖아요. 성전에 들어가면 지성소 안에 법궤가 있지 않습니까. 그 법궤는 원래 왕이 앉는 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법궤 모퉁이에 스랍들이 시중드는 모양이 있습니다. 스랍이 내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거죠. 하나님이 법궤라는 의자에 앉아계시고, 제사장을 통해서 재물을 받으시고, 백성을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재단은 사실 식탁이었습니다. 번제나 속죄제 빼고는 재물을 다 나눠 먹었죠. 그래서 여기에서의 희생 개념은 죽음이 아니고 식탁의 개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이 작은 공간에서 임재함으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스스로 자기를 제한해서 여기 임재해 계시는 거죠. 하나님의 무소부재와 하나님의 임재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스라엘이 이동하면 회막도 같이 이동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임재하셔야 하기 때문에 백성이 이동하면 하나님도 이동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이미지이지만 분명한 것은 신이라고 하는 관념적인 이미지가 있고 우리가 그분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죠.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방식이 바로 자기제한인 것이죠. 여기서 '케노시스'도 나오는 거죠. 

 

'그렇다면 바벨론 포로기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 성전이 없어져 버렸는데.' 물을 수 있죠. 그런데 상관이 없는 게, 원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데,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주려고 성전에 임재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전이 있건 없건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시죠. 포로기 문서들을 보면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끌려가고 있다는 표현이 나와요.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죠. 

 

이삭 루리아는 이런 생각에 상상을 더해서 창조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실 때, 공간이 어디 있었겠느냐. 하나님이 무소부재하기 때문에 공간이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 안에 공간을 만들어 버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부가 되어버리죠. 그러면 세계도 신성을 지녀야 하죠. 그래서 루리아는 어떤 상상을 하냐면, 하나님이 자신을 수축하셔서 공간을 빈 공간을 만드셨다는 거죠. 하나님 없는 공간을. 즉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없는 공간이죠. 왜냐하면 이 공간이 하나님 밖에 있으면, 그 자체가 또 하나님처럼 영원해야 하기 때문이죠. 하나님 안에 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거두어들인 거죠. 상당히 변증법적인 논리죠. 거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거죠. 그래서 영원하신 분이었는데 하나님 없는 이 공간에서는 창조와 더불어 시간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영원한 시간이죠. 종말은 반대입니다. 종말은 자기를 제한했던 하나님이 그것을 풀어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지니깐 피조물이 신성에 참여하게 되는 거죠. 시간은 영원으로 바뀌죠. 이것이 이삭 루리아의 생각이고 이것을 몰트만이 받아들입니다. 

 

 

몰트만 신학의 큰 장점은 교리에 대한 새로운 통찰입니다. 몰트만은 유대인 사상가와 대화를 하면서 이런 신화적 틀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깐 신약에 오기 전부터 케노시스가 있었다는 거죠.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는데,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는 거죠.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 하나님은 자유롭기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할 수 있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신 거죠. 

 

그래서 카오스로부터의 창조든 무로부터의 창조든 성서가 이 둘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둘 다 중요합니다. 이것을 양자택일 하라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겁니다. 이 둘을 모두 이야기해야 균형 잡힌 창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저는 에코 페미니즘에 대해서 다른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지혜 문학에 보면,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연이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심어주신 지혜이기 때문이죠. 그게 발전해서 로고스가 만물의 씨앗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고, 하나님은 이 만물 안에 로고스를 심어놓으셨죠. 지혜들이 천지 만물에 숨어 있어서 자기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탐구할 수 있도록 자연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 지혜를 하나님이 숨겨 놓으셨는데, 이 지혜에 완전하게 이르는 길을 인간은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거죠. 그냥 탐구만 하면 과학이지만, 성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죠. 이 세상의 작은 미물이라도 그 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가 숨겨져 있는 거죠. 과학은 그것을 탐구하는 거죠. 

 

천지만물을 다스리라고 할 때, 베스터만은 그것을 제한적인 지배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가갈 수 있지만, 그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알기 때문이죠. 우리가 탐구해서 그것을 파악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 숨겨져 있는 지혜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거기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죠. 그래서 저는 과학을 통해 놀라운 발견을 하고 통찰을 얻는 것은 지혜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표현이 방정식으로 되었든 신앙의 언어로 되었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일어난 진실은 하나입니다. 

 

 

Q: 선생님, 진짜 책을 한 권 쓰셔야 할 거 같아요. 너무 많이 배웠습니다. 이런 내용을 글로 읽고 싶은데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종말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 기후위기에 대한 논의가 많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뭐, 저희가 답을 알고 있으면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건데, 우리는 늘 모색해 보는 거죠.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죠.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한 것을 많이 오해했는데, 베이컨 식으로 자연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이 명령을 잘못 이해한 것이죠. 반대로 이것을 비판하면서 과대하고 비판한 것도 있습니다.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성서적 전통은 아닙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모든 피조물이 공동 피조물이라면, 내가 이웃에서 행한 것은 곧 나에게 행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상대화시킬 수 있으니깐요.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중요하죠.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보통 관계를 늘 인격적인 관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생물과의 관계도 중요하죠. 인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계명이 철저한 이유는 이웃에게 행한 것은 곧 나에게 행한 것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런 것은 관계 자체를 붕괴시키는 거죠. 이건 공동체 전체를 붕괴시키는 행위죠. 파멸이죠. 이것이 혼돈의 힘이죠. 그래서 정의가 중요하죠. 지금 이웃과의 관계라고 할 때, 윤리적으로는 내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지라도, 생태 문제로 들어가면 그것을 넘어서는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동안 자연이라는 이웃에게 테러를 행한 거죠. 욕망추구라는 이유 때문에 말이죠. 인간은 그동안 좀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고, 좀 더 많은 소비를 해야 했죠. 그 결과 자연을 마구 쓸 수 있는 재료로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사람에게 이렇게 했다면 상대방이 저항을 했겠죠. 그러면 어느 선에서는 멈출 수 있었겠죠. 그런데 말 못 하는 자연이니깐, 자연은 침묵하고 있으니깐, 자연을 재료로 삼은 것이죠. 그런데 입을 갖지 못한 이웃에 대해서도 우리가 존중해줘야죠. 더불어 살아가려면 공간을 내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아기가 태어나면 물리적으로도 공간이 필요하고, 가족 속에서도 특별한 배려의 공간이 필요하죠.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 인간이 아닌 다른 이웃에게도 공간을 내어주어야죠. 그런데 우리는 계속 공간을 점령하기만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가해를 했고 이웃의 공간을 박탈했기 때문에 이제는 회복해야죠.

 

이제는 이웃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자기를 제한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죠. 우리가 행동을 달리 하면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지구 온난화 문제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대신 살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이죠. 지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죠. 

 

이런 문제는 이론 몇 개 내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실천을 달리 할수 밖에 없습니다. 삶의 태도,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욕망의 문제라 할 수 있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죠. 이 문제는 누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