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과신대 포럼 발표자료2] 한국 개신교는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졌는가 (김현준 연구원)

 

* 이 글은 2020년 과신대 포럼 "개신교 근본주의가 반진화론과 창조과학에 빠진 이유"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이 글은 필요시 인용을 하여도 무방하나, 초고(draft)이므로 추후 공식출간(published) 될 시, 해당 논문을 인용바랍니다.

 

 

한국 개신교는 왜/어떻게 창조과학에 빠졌는가?

: 문화사회학, 지식사회학, ANT의 통약가능한 접근법을 경유하여

 

김현준 (서교인문학연구실 연구원)

 

 

2009년 EBS 여론조사(다큐프라임 2010)에 따르면, 한국인의 62%가 진화론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63%의 사람 들이 진화론과 창조론을 모두 가르쳐야 한다고 응답했다. 넘버스(2017)도 창조론이 세계화되고 있으며, 한국이 “창조론의 수도”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한 기독교철학자에 따르면, 한국의 창조과학은,

 

기독교 평신도들을 대중적으로 설득하는데 성공했으며, 특히 물질주의와 과학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가 비합리적 종교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했다 ... 자연과학적 이성과 증명 앞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많은 신앙인들이 창조과학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기독교 신앙이 비합리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이경직 2006:126).

 

이러한 진술은 (의도치 않게) 창조과학의 핵심이 (과학적 성취가 아니라) 신앙적 동기임을 드러내어 준다. 창조과 학은 현대사회 속에서 겪는 신앙적 위기에 대한 변증적 성격을 지니는 종교적 담론인 것이다. 과학철학자 라카토 스 식으로 말하자면, 창조과학의 중핵은 과학이론이 아니라 신학이론이 아닐까. 다시 말해 창조과학이 ‘창조과학 적’(?) 연구활동을 통해 보존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독자적인 과학이론이라기보다는 창세기에 대한 문자주의 적 해석(신학)이나 특정한 개신교파의 신앙적 에토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창조과학자들의 ‘유사과학종교’ 활동은 과학 자체에 헌신되어 있다기보다는 신앙의 변증에 헌신되어 있다. 이러한 변증적 성격이 과학을 잘 알지 못해도 과학을 논하면서 신앙심을 고양시키는 신자들의 이해관심에 부합한다. 즉 이것이 창조과학의 행위자-연결 망의 확장을 이해하는 열쇠다.

 

창조과학은 어떻게 결과적으로 보수 개신교 내부에서 지적인 헤게모니를 얻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과학철학/사회학자 라투르가 말한 ‘이해관계의 번역(translation of interest)’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창조과학자들은 (신자들의) 신앙적 관심을 (창조과학자들의) 과학적 관심인양 치환하는데 (보수개신교 장 내에서 제한적으로) 성공했으며, 그럼으로써 보수 개신교의 신학적, 지적 행위자들(actants)과 동맹을 구축해왔다. 그리고 창조과학 담론은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가 말한 것처럼 그들 신앙공동체의 ‘정서적 에너지’와 ‘유대감(solidarity)’을 증진시키는 기능을 했다. 교회 내 과학교육이나 창조과학자들의 강연은 지식 자체의 전달보다는 종교적 집합흥분을 통해 보수신앙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의례’로서 그 기능이 예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창조과학자들의 이러한 ‘이해관계 번역’ 행위와 창조과학 정당화 작업은 종교적 감정서사를 통해서 두텁게 읽어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창조 과학이 확산될 수 있었던 요인들을 크게 네 가지로 제시하고자 한다.

 

 

1. 문화/종교적 환경

 

1-1. 세속화 및 과학발전(과학주의)에 대한 불안과 그에 대한 문화적 방어(문화전쟁)

 

극우주의적 정치이념들처럼 근본주의적 종교들과 창조과학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 추세에 대한민국(창 조과학회와 보수개신교)이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넘버스는 한국이 창조과학을 세계에 전파하는 “수도”가 되었다고 서술했다. 창조과학은 과학에 대한 불확실성(그에 따른 불안과 공포)과 신앙적 진리를 향한 진정성있는 열정을 자 양분 삼아 확산된다.

 

이러한 흐름은 기본적으로 세속화라는 본류를 거스르는 글로벌 차원의 탈세속화(재신비화)로 설명된다. 글로벌

차원에서 종교, 영적인 것, 성스러움의 귀환은 모더니티가 애초부터 품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던 유동성의 발현 이거나 모더니티의 부작용이다. 하버마스, 찰스 테일러와 같은 사회철학자들이나 또 호세 카사노바와 같은 종교사 회학자들은 이러한 현대사회를 “포스트세속사회”라고 개념화한 바 있다. 사람들은 점증하는 근대사회의 불안과 정체성의 위협을 경험하고 있다. 이 세속사회 속에서 지배적인 (행위의) 규칙과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게 되었으며 종교적인 규칙이나 정체성도 중요한 자원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극우주의적 정치이념이나 테러리즘도 지배적 ‘모더니티’나 ‘합리성’이라는 정치종교적 표상에 반대하는 진정한 진리를 향한 열광적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정치철학자이나 사회학자인 토스카노는 이렇게 진리를 향한 열광적 행동주의적 추구를 “광신”이라는 정치신학적 개념으로 포착했다. 하지만 사실상 탈개신교화에 대한 개신교 신앙의 저항이자 잃어버린 주도권에 대한 향수다. 창조과학도 근본주의적 신앙과 더불어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택적 친화성’(역사적 우연성들 간의 공명)을 가진 창조과학과 근본주의적 신앙은 종교적 가치나 세계관, 또는 정체성 위협에 대한 “수세적 반격”(류대영 2004)이나 “문화적 방어”라고 할 수 있다(김현준 2017). 과학사가 로널드 넘버스(2010:703)에 의하면 근본주의 적 개신교인들은  “문자적 창조를 포기한다면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같은 중심적 문제들’을 재고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즉 창조과학과 근본주의적 신앙의 확산은 (소위 ‘자유주의 신학’으로  통칭되는)  모더니티와 과학주의(실증주의), 역사비평학(고등비평)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이 신앙의 소유자들은 모더니티 전체를 이해하고 대응하기보다는 근본주의 - 더 정확히는 축자영감설에 기초한 세대주의 - 신학의 특정한 해석틀에 의존해서 과학을 비롯한 현대사상과 학문들을 이해했다. 선 : 악 = 유신론 : 유물론(무신론)의 명확한 이항대립 속에서 과학은 진화론에 포획되었고, 진화론은 유물론이며 유물론은 맑스주의 및 사회진화론과 동일시되었다. 이른바 ‘영적 전쟁’론이다. 이를 제임스 헌터(1991)는 ‘문화전쟁(culture war)’이라고 정의했다. 필자는 이것을 보수개신교인들의 ‘거대공포서사’라고 부른다. 보수개신교인들은 사랑이나 ‘창조-타락-구속’과 같은 개신교의 거대서사(만)를 만들었다기보다는 거대한 ‘공포서사’를 만들어냈다. 이 공포서사는 영적(문화)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제로 작용한다. 두려움 없이는 구원이 없다. 이러한 영적 전쟁, 문화 전쟁 프레임은 복음주의 지식인들의 기독교 세계관 학문담론에 의해서 ‘세계관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한국의 우익개신교세력은 이 프레임을 혐오선동과 극우정치 국면을 전개하며 영적 전쟁의 적을 동성애, 페미니즘, 젠더퀴어이론 등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인권이론들과 인권운동들을 네오맑시즘의 개신교 말살과 공산화 전략으로 호도하고 있다.

 

1-2. 과학의 문제점과 문화지체

 

그렇다면 창조과학의 발흥은 단지 근본주의 개신교인들만의 탓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과학주의에 대한 반발은 전반적으로 과학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과학자들의 과학 수행이 학문 내적 발전뿐만 아니 라, 과학 외적인 사회적 신뢰와 정당성을 확보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과학은 근대사회의 지배규칙, 합리성의 표상이 되었고, 과학자는 모더니티의 ‘히어로’나 ‘사제’가 되었기 때문이다(히어로는 항상 빌런을 부른다). 황우석 신화나 핵발전산업을 생각해보라. 물론 과학기술의 합리적 발전은 동시에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높이기 때문에 완벽한 통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자들 이 과학만능주의라는 신화와 부작용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과학실천에 대한 세심한 태도를 취했더라면 어땠을까. 과학의 성과는 과학 그 자체만의 성과가 아니다. 과학적 성과는 경제적 발전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발전들과 상호 교환(피드백)됨으로써 그 빛을 발한다. 이런 맥락에서 과학주의에 대한 반발은 과학기술과 과학문화(또는 윤리)의 불일치, 즉 과학기술의 발전에 부합(또는 적응)하는 과학문화 교육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국가의 과학기술정책 및 과학교육정치의 부실이 주요인이거나 적어도 그 물적 조건을 이루는 매개요인이다. 이렇게 문화적 요인들은 제도적, 정책적 요인들과 연결된다.

  

 

2. 국가적, 제도적, 교육정책적 환경

 

2-1. 과학기술자 양성 국가정책

 

한국의 경우, 과학(방법론)과 기술이 통합적으로 발전했다기 보다는, 기초과학과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무관심 속 에 70년대 국가 경제발전의 도구이자 기술로서의 과학에 대한 강조가 과학교양을 약화시키고 비과학적 태도 확산의 토대로 작용한 것일 수 있다. 김근배(2017)에 따르면 당시 권위주의 정권의 과학기술정책은 과학보다는 기술, 연구보다는 개발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즉 과학은 발전주의의 부속품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정책기조 하에서  당 시 미국 유학을 떠났던 김영길을 시작으로 이공계 학자들은 개신교로 회심했고 창조과학을 접하고 돌아와 서울대와 카이스트 등에 자리를 잡으며 한국에 창조과학운동을 시작했다(신재식 2010 참조). 창조과학회 회원의 다수가 미국 유학파 공학/기술자인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형욱(2018)은 창조과학이 “기술전문가들를  위한 새로운 종교”라고 평가했다.

 

2-2. 국가차원에서 과학정신의 상대적 결핍; 과학교육의 부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

 

넘버스(2016) 역시 창조과학의 전세계적 확산추세의 원인에 각국 과학교육에 대한 과학자들의 무관심이나 방심 을 지적한 바 있다. 생물교사가 개신교인인 경우, 대부분 근본주의적 창조론자이다. 이것은 유럽과는 매우 다른 한 국적 상황을 보여준다(Seo & Clément 2014). 이러한 상황은 창조과학회의 초중고 과학교사연수 프로그램을 통한 창조과학교사들을 재생산 기제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등학교 과학교사들은 생물학 교과과정과 교과서가 부실하고 그에 따라 교육현장에서 창조론을 비롯한 유사과학에 대한 대처의 난점, 학생 교육의 난점을 호소하고 있다(Lee & Lee 2008). 이런 의미에서 생물학 교사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다(Clément 2015).

 

과학에 대한 철학적, 사회적, 공공적 이해가 결여된 채로 (산업)기술로서의 과학이라는 도구주의적이고 실용주의 적인 유용성만을 강조하는 과학정책과 과학교육은 과학의 공적, 대중적 상식과 신뢰의 토대를 침식할 수 있다. 그 결과, 대중과 과학/기술/공학자들의 창조과학으로의 ‘회심’은 과학/기술이 그것의 (사회적이고 공적인) 가치와 의 미에 대한 충분한 해명을 제공하지 못할 때에 나타나는 합리적인(reasonable) 재조정의 과정으로서 그 행위의 의미를 이해해 볼 수 있다. 즉 근대성(과학)이 의미의 문제를 주변화(세속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오늘날 의미를 담는 그릇인 종교적인 것의 귀환(재주술화)을 불러왔듯이, 과학지식, 과학교육, 과학공동체의 부실은 과학지식으로부터 과학자 자신의 소외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종교/과학에 대한 아노미와 유사과학의 확산을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이해관계/인식관심 번역(translation of interest) 실천의 행위자-연결망, 동맹의 결성

 

3-1. 기독교세계관 학문운동의 창조과학 지지

 

창조과학은 칼뱅주의-복음주의 지성운동과 그것의 일환인 기독교세계관 네트워크를 통해서 확산되었다. 이는 반지성주의와는 다소간 결을 달리한다. 그 시작에 있어서는 반지성주의가 아니지만 유통과 확산에 있어서는 지역 교회/비전문가/평신도대중의 반지성주의를 필요로 한다. 창조과학-복음주의 지성운동 ANT를 통해서 창조과학 자들은 비전문가 신자들의 ‘신앙적 헌신’의 인식관심을 전문적 과학실천에 대한 가상적 참여로 번역해내었다. 즉 종교적 교의가 과학적 진리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 결과 독실한 개신교인들은 신앙의 실천 - ‘하나님의 영광’ - 을 위해서 창조과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담론(지식)의 힘은 연결망의 규모에 상응한다. 창조과학은 기독교 세계관 학문운동의 이론적 지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담론 및 운동은 개신교 학계와 교육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령 “기독교 세계관 입장 에서 본 진화론”,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창조과학교육”,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대안” 등의 연구들이 생산되고 있다.

 

창조과학은 “기독교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이경직, 2006:108). 즉 “참된 성경말씀에 기초해서 기존 과학계보다 더 정합적이고 훌륭한 이론을 만들어내”어야 한다(이경직, 2006:128). 그리고 “기존의 과학계가 공유하는 자연주의라는 전제를 그대로 인정하기보다 그 전제의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창조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여 기존 과학계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이경직, 2006:127). “기독교 세계관에서 나온 기본 믿음들에 비추어 과학의 각 분야들의 성과들을 평가하고 변혁시켜나가는 일이 바로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이 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이경직, 2006:130). 여기에서 기독교 또는 성경의 원리는 무신론적 세속과학을 기독교적 과학으로 바꾸는 이론적, 방법론적 원천인 것이다.

 

또한 기독교세계관은 과학지식에 대한 상대화 전략을 사용했다. 진화과학을 비롯한 과학지식이 상대화될 수 있 는 까닭은 모든 지식이 종교성을 가지며 과학의 본질도 신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지지하는 개신교 지식 인들은 과학지식 역시 개신교 신앙교리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선택과 결단의 문제로 환원했다. 정당화된 믿음이나 종교적 가치가 구성되는 역사적/사회적 조건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지 않고 모든 지식의 성격과 토대를 궁극적인 종교적 신앙의 문제로 환원하는 이러한 태도는 근대의 각 학문분야가 역사적/사회적으로 구축해 놓은 자율적인 합리적 기준과 절차에 관한 토론을 무화하고 종결시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작용한다. 즉 모든 지식에 대한 선택을 신앙적 결정과 결단의 문제로 단순화시킴으로써 정당화된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가 기반하는 ‘삶의 양식’과 사 회적 관계에 대한 질문을 차단하여 논쟁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즉 기독교세계관론과 창조과학은 자연주의를 적으로 삼는다는 점과 통속적 ‘신앙주의(fideism)’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공명한다.

 

결국 자연주의 세계관과의 투쟁을 통해 일반 세속학문 속에서 기독교적 - 반자연주의적 - 방법론의 특권을 구축

하고자 하는 점에서 창조과학 역시 기독교세계관 프로젝트의 일환, 즉 과학분야의 기독교세계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창조과학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방법론적 원리 - 반자연주의 - 에 입각한 ‘기독교적 과학’이 되었다.

 

3-2. 동맹의 역사적 근원

 

한국에서 근본주의와 창조과학 간의 역사적 우연(선택적 친화성)을 이론적-신앙적 필연성으로 만든 역사를 논하 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인물로 최소 세 명 정도를 꼽을 수 있을듯 싶다. 박형룡, 김준곤, 김영길이다. 그 중 박형 룡은 근본주의 중에서도 축자영감설에 입각한 세대주의 칼뱅주의 신학자였다. 세대주의는 안식교와 헨리 모리스 와 더불어 미국 원조(?) 창조과학 탄생의 초기 기원 중 하나이다. 옥성득(2019)에 따르면 박형룡은 반진화론자였 지만 창조과학자는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창세기를 현재 “과학적 진화적 방법에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옥성득은 현대 창조과학론자들이 박형룡이 비판했던 창세기 1-2장에 대한 과학적 읽기를 수용하면서 1930년대 근본주의적 장로회 신학보다 “후퇴”했다고 비판한다. 또 최태연(2004)에 따르면 박형룡을 포함하여1920-30년대 한국개신교는 유신진화론에 대해 포용적 태도가 주류였으나 70년대 이후 근본주의 신학과 창조과학회의 영향으로 개신교 주류 입장이 변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박형룡의 근본주의 신학과 반진화론이 예장 합동, 고신, 대신, 백석, 합신 등 보수 개혁주의 장로교파 대다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보수 칼뱅주의 신학은 신칼뱅주의 기독교세계관 학문운동으로 계승되었다.

 

3-3. 동맹 확장 전략 

 

창조과학(및 지적설계론)을 교육, 전파하는 여러 단체, 기관들의 존재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교진추, 창조과학회 지부가 있는 한동대, 카이스트, 명지대 등 대학 및 대학 내 동아리, 사랑의교회, 소망교회, 남서울은혜교회, 온누리교회 등 복음주의 대형교회들 및 지역교회들, CCC 등 선교단체, 두란노, 생명의 말씀사, IVP 등 출판사와 CGNTV 등 개신교 언론. 창조과학회는 답사 또는 여행 프로그램, 전시회 개최, 박물관 건립 등을 통해 대중적 저변 을 확장해 오고 있다.

 

또 교과서 개정 추진운동도 창조과학자들과 지적설계론자들의 공통된 실천전략이다. 1988-89년에 창조론을 삽 입한 생물교과서 검정에서 탈락한 이후, 2016년 8차 청원까지 했음에도 별다른 소득은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사)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2009년)는 노골적인 창조과학 대신 지적설계론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킴으로써 “논쟁을 가르치라”는 미국 창조론/지적설계론자들의 전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교진추의 전신인 한국진화론실상연구회 회장 김기환에 따르면 이들은 창조과학의 “종교적인 색깔을 전혀 배제”하고자 노력했다(김진수, 2016:38 재인용). 그리고 교과서를 분석하고 학교교육과 대중교육을 통해 진화론의 ‘폐해’를 알리는 데에도 집중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진화론은 “나쁜 인류 역사의 기초 사상”을 제공한다.

 

인간을 지능이 발달한 영혼 없는 동물의 하나로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아무 의미도 없는 우연의 결과로 바라보게 만드는 유물론적 세계관은 결국은 종교, 도덕, 윤리가 아닌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을 근본으로 일등 주의, 쾌락주의, 이기주의, 생명 경시 현상을 유발하여 마약, 동성애, 패륜 범죄, 학교폭력, 왕따, 성폭행, 자 살, 낙태, 인육 섭취 등에 대해 죄의식을 사라지게 만들어 사회를 점차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http:// www.str.or.kr).

 

“약자에 대한 폭력”, “일등주의”, “양육 강식, 적자 생존 논리를 통해 강대국의 약소국을 지배를 정당화한 제국주의 전쟁”, “공산주의”, “히틀러”, “마르크스”, “2천만명을 학살한 스탈린”, “우생학을 통한 인종차별”, 홀로코스트 등 사회의 모든 병폐를 “진화론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창조과학회원 허정윤(2014)은 ‘창조론오픈포럼’ 논문 에서 공산주의 유물사관과 진화론이 결합하여 과학적 무신론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윈주의, 유물론, 맑스주의, 무신론을 동일시하면서 이들의 사상은 “인간적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도덕성”과 “윤리를 부정” 한다는 보수신학의 전형적인 수사를 반복하면서, 맑스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을 “적자생존을 향한 생존경쟁만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역사에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온 공산주의가 정치적 실체로서는 비록 약화되었지만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아니 얼굴은 쇠약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몸체는 진화론과 하나로 결합되어 과학적 무신론이 라는 괴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몸체에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뉴스(Janus) 같은 괴물로 오히려 힘이 강화된 셈이다(2016:59).

 

진화론, 과학적 무신론은 공산주의가 얼굴을 바꾼 것뿐이다. 진화론에 대한 반대는 사실상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이며 창조과학은 반공주의 논리의 확장인 셈이다. “공산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달리 그 자체 이념이 매우 종 교적”이기 때문이다(김영길, 조덕영, https://bit.ly/3846Tbu). 기독교인으로서 ‘반공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자’라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창조론 뿐이다. 주장 자체의 논거 도 문제지만, 이러한 공포에 기반한 “창조과학” 운동은 대중의 공포에 영합함으로써 세력을 확장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퇴행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예컨대 동성애 권리 주장이 “진화론에 근거”한다며, ‘창조과학 세미나’, ‘청소년 을 위한 창조과학 비전캠프’에서 반동성애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등(이재만, https://bit.ly/2vcfHgE), 창조과학 지지자들이 기독교 세계관과 창조과학에 근거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극우정치와 보수신학(기독교세계관, 창조과학)의 결합 문제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의 사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필립 키처는 <과학적 사기: 창조론자들은 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서 제리 폴월의 ‘도덕적 다수’와 창조과학자들의 동맹을 설명했다. 키처에 따르면, 미국의 ‘과학적 창조론 자’들은 도덕적 다수 운동과 함께 미국 사회를 보수적으로 바꾸는 운동을 시작했다.

 

3-4. 동맹 확장 전략 2

 

창조과학의 기독대중 확산에는 창조론자들의 전략 수정도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지적설계론이 창조과학의 계승이냐 아니냐는 논쟁적이지만,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창조론자들이 지적설계론의 논변과 학문적/사회적 전략을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것이 창조과학의 논지 강화와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윌리엄 뎀스키의 <지적 설계>(IVP)를 번역한 집단은 ‘서울대 창조과학연구회’였으며, 필립 존슨의 <다윈주의 허물기>(IVP)는 ‘과기원 창조론 연구회’에서 번역했다. 또한 창조과학회의 홈페이지에서도 지적 설계론 관련 문건들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지적설계론은 유신론/무신론 프레임을 설계자/자연주의철학으로 바꾸었고, 이에 고무된 창조론자들이나 기독교인 지적설계론자들은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을 무신론에 대한 싸움이자 기독교에 대한 변증으로 인식하였다. 다시 말해 창조과학 지지자들에게 지적설계론은 자연주의라는 이름의 무신론을 공격하고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는 변증적 도구이다. “지적 설계는 자연주의에 대한 최신의 가장 명확한 논 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뎀스키 <지적설계>, 서울대 창조과학연구회 역자후기 422쪽). 지적설계론자 이승엽 교수도 필립 존슨의 <심판대의 다윈> 역자 후기(326쪽)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필립 존슨은 지적 설계 운동이 단 순한 과학 패러다임 논쟁에서 벗어나 사회 전반의 무신론적 자연주의 학문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으로 확대되기를 원했”다. 창조과학 지지자들의 지적설계론 학습과 옹호는 일반 세속학문 영역에서 다윈주의나 자연주의와 싸워서 이길 수 있고, 또 자신들의 신앙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서울대 창조과학연구회는 뎀스키의 <지적 설계> 역자 후기(421-422 쪽)에서 지적설계론에 대한 (사실여부를 떠나) 낙관적인 전망을 드러내었다.

 

 

4. 창조과학자들의 내적 동기와 자기 서사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의 논리에 스스로 설득되어 가는지, 그들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있을까. 그 들에게 과학과 신앙, 진화론 등은 어떤 의미로 표상되고 있을까.

 

사람들은 과학이 인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과학의 신 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 인간의 존재이유나 도덕적 문제 등엔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과학적으로 보려는 시각 자체가 큰 무리입니다 ... 그러므로 과학은 하나님의 질서와 법칙 속의 한 과목일 뿐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김영길 1998: 28- 29).

 

진화론에 대한 배척과 창조과학에 대한 이들의 확신은 과학의 예측 실패와 우주자연 질서의 경이에 대한 신비적 경험에 근거한다. 과학지식에 대한 한계의 인식은 곧바로 신앙적 논리의 무한한 긍정으로 비약한다. “바로 1초뒤의 일도 예측 못하는 것이 과학”(김영길 1998: 18)이다. 반면 성경을 읽으면서 이들은 “그 오래전에 오늘날 되어질 일을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까”(김영길 1998: 18)하며 경탄한다. 김영길은 창조론 서적을 읽으며 진화론의 “비 과학적인 요소”(28)를 깨닫는 동시에 성경의 무오에 감탄한다.

 

창조과학은 과학활동 자체보다는 성서무오설과 근본주의 신앙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진다. 성경의 “창조론을 연 구할수록 창조과학의 신비와 과학적인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1998:28). “과학의 힘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 는 벽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이다”(김정한 1998:175)

 

이들은 공통적으로 풀리지 않았던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경험을 통해 그 영감의 원천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심영기 1998:151). 그리고는 과학이 “우상”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깨닫는다. “과학을 우상으로 모셔 과학만이 진 리이고 과학이 인간의 모든 고민을 결국 해결해줄 것으로 맹신”하지만 “과학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알수가 없”(김정욱 1998:79)다. 과학의 한계를 경험하는 일은 과학에 대한 숭배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로서 이해된다.

 

과학의 한계와 창조세계(질서의 정교함)에 대한 경탄은 과학적 논리를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창조과학을 수 용하고 실천하는 동기로서 작용한다. “수백만종의 동식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한치의 오차없이 정확하게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창조의 세계’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김영길 1998:34). 가령 전자현미경을  보면서 “그 놀라운 질서와 정밀성에 감탄”(신현길 1998:43)하고 “재료 구조의 아름답고 질서정연함 속에서 남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 솜씨가 오묘함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상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셨고 창조된 모든 다른 생물들과 구별하셨음을 깊이 실감”(김철중 1998:242)하게 된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엄청나게 복잡한” “근육 수축의 기작과 자극의 전달 과정”(신현길 1998:43)이나 “미생물조차도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가를 안 후에는”(김준 1998:140) “우리가 무척이나 제한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이 모든 세계와 사물 그리고 그 운용법칙 들이 신비로우리만큼 규칙적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강신후 1998:233)는 것이다. 결국, 과학이라는 산에 올라가면 “더 넓고 무한한 질서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신현길 1998:44)이 있고, “논리의 범주도 뛰어넘는 것이었고 물질계의 자연 법칙과 연계되는 그러나 독립적인 원리들이 실존하는 것으로 조금씩 깨달아”(김해리 1998:135)짐으로써 창조과학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개신교로 회심 후“내 앞에 펼쳐진 모든 세계는 이전의 세계가 아니었다.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세계였다”(임번삼 1998:112)고 고백한다. “거창한 우주만물을 보고 감탄하면서 만드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요 태도”(김해리 1998:135)인 것이다. 종교적 신념이 있는 과학자들이 종종 자신들이 “밝혀낸 메커니즘의 아름다움과 우아함 속에서 믿음의 증거를 발견”(브루크 2010:244)하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지만, 창조과학자에게서 창조를 믿는 신앙(창조신앙)이 필연적으로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내적 증거로 활용되는 것은 보다 해석학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일이다. 창조과학자 자신들은 우주자연에 대한 낭만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로 재현되는 반면, 진화론자나  세속적 과학자 들은 “무미건조”한 사람들로 재현된다. 자연과학 세계는 “진화론으로 오염”되었고 “오늘날 진화론에 오염된 학문과 갖가지 인본주의 사상이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불행한 인생을 살게 하고 있다”(임번삼 1998:120). 창조과 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서사는 창조과학을 알기 전엔 “과학을 맹신”, “교만”(김정욱 1998:73)하고 “이성적”, “논리적”이며 “무미건조”한 사람이었던 것이 신앙을 갖고 창조과학을 알게되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고백이다.

 

[과신대 포럼 발표문] 한국 개신교는 왜 창조과학에 빠졌는가 (김현준).pdf
0.29MB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