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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Homo sensibilisㅡ색채론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4. 28.


 남색 Indigo•blau  비 냄새가  나는 소년을 보았다. 



비가 내리는 것은 수 없이 많은  동그라미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세상에게 몸이 있다면 사선으로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비의 입구는  세상의 옆구리다. 간혹  세상의 천정인 하늘 문을 열고 쏟아지는 비도 있다. 며칠 전  달리는 자동차 표면에 우박처럼  빗방울이 직선으로  무겁게 떨어지는 모습을 봤다. 

그 비는  부딪히는 것마다 요란스러운 작은 방울들을 만들면서 튀어 올랐다. 비는 지표면에서 원들이 사방으로 번지게도 하지만 작고 동그란 물방울들을 튀어 오르게도 한다. 비는 재미난 공놀이를 하고 있다.  빗방울들의 공놀이는  진지하고 탄력이 넘친다. 

비가 내리는 틈과 틈을 베란다 창문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비가 문장이 되어 감각인의 시각을 연다.  비는 상식의 반란을 꿈꾸도록 감각인을 유혹하며 새롭게 번역되고  해석되어 지기를 욕망하고 있다.

비는 내 의식으로  쏟아지고  내 시선에 부딪힌다.  공기 속에 떠 있는 작은 액체나 고체 알갱이 같은 기억들이 에어로졸이 되어  냄새로 떠 다닌다.  비 냄새다!  페트리코 petrichor라고 부르는  비 냄새는 그 뜻을 살펴보면  돌에  묻은 신들의 피 냄새다. 신들은 피에서도 향기로운 향이 났던가 보다.

 


비가 오기 직전에 공기에 수분이 차오르고 토양이 습해지기 시작하면 흙 속에 있던 미생물들은 바빠진다. 가뭄동안 잠자고 있던 게으름뱅이 미생물도 일제히 깨워서  공기 중으로 튀어나올 준비를 한다. 

비 냄새는  빗방울과 지표면이 만드는 물 알갱이 때문이다. 비가 오려고 습도가 높아질  때  흙냄새를 품은 작은 물방울들인 에어로졸이 공기 중에 떠다니면서 사방으로 퍼져서 나는 냄새다. 

빗방울은 자세히 관찰해 보면, 땅 표면에 부딪히면 납작해 지고 부딪힘과 동시에 작은 거품들이 표면에서 위쪽으로 마구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이 거품들이 빗방울 표면에서 터지는 찰나에 흙냄새를 안고 있던 작은 물방울들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 우리는 비 냄새를 맡게 된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속도와 표면 성질에 따라서 느긋하게 혹은 재빨리 에어로졸의 구름이 퍼지면 그에게서 맡아졌던  비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사방에서 비 냄새로 있다가  산에서는  시원한 물향으로  난다.  

 


솟아오르는 거침없는  탄력과 오이 향내 나는 빗방울이  고독의 심연에까지 부딪혀 튀어 오르면 그는  차가운 냉정을 놓아버리고 허둥댔었지. 슬픔과 잇닿아 있는 비 냄새는 남색이다. 그에게서 나는  비 냄새는  빗방울이 쏟아지는 속도와 그의 마음이 닿는 부위에  따라 감정들이  맹렬한 에어로졸의 구름이 되어 남색으로 퍼지기 때문이다.

 타다닥 타다닥 떨어지는 소리는 그의 두텁게 각질화된 마음 속에 남아있는 여린 살들의 비명이다. 그의 마음의 살은 온통 굳어 딱딱해져 있어서 뚫고 들어가기 어렵지만  꼭 감싸 안고 등을 토닥이듯 살짝살짝 긁어내고 걷어내면 아직 여린 도화의 살결이 말갛게 있다. 

소망이라는 것,꿈이라는 것, 욕망이라는 것이 쌓아 놓으면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일지라도 쌓고 또 쌓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 결의를 다지는 자들의 용기는  남색이다. 

그에게는  삶이  더디 흐를수록 희망이 불의  혀처럼 격렬하듯이  꼭 사랑도 그러하지 싶다. 속절없이 황망하게 잃어버린 사랑의 색은 남색이다. 마음을 비우고 덜어내지 않으면 결코 채워지지 않는 마음만큼 대립과 모순이 있을까마는  살아온 여정 속에서 헛됨을 알아버린 자의 심장은 남색이다. 

헛되다는 것은 어디에나 안과 겉이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기쁨의 안감엔 슬픔이 있고 사랑의 다른 얼굴엔 미움이 있고 시작과 끝은 같이 있지 않은가. 떠남은 남겨짐이고 끝은 시작이듯이 두려움은 환희의 다른 얼굴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인생은 대위법으로 연주되고 헛됨을 말해주는  남색으로 물들이고 무위 無爲  속에 머문다. 

 


슬픔과 기쁨이 그의 마음에서 똑같이 나오는 광채라면 그것은 원처럼 순환할 것인 바,  남색은  순환하는 것들의 색이다. 반복되는 순환이 아니라 지양하는 순환, 그는 그렇게 남색으로 흥얼거리며 인생을 구른다. 

떠남의 자유를 잃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그에게 남색은 갈등과 우울함의 색깔이다. 남색은
 고요하게 춤을 추는 쪽빛 수평선같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그는 마티스의 춤판에 뛰어든다. 손에 손을 잡는 대신  가슴으로 뛰어드는 것은  남색 숨결을 끌어안은 그인지 푸른 풀잎을 껴안은 바람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는 공복감이 만성이 된 것처럼 가볍고 두려움이 커다란 바위가 된 것처럼 무겁다. 그는 안과 겉이 하나로 녹아들고  그의 세월은 납작하게 흘러 내리며 세상엔  온통 남색 비 냄새가 퍼진다. 

라일락 향기만 별같이 깨어  있는  어둠이 내린 거리,  그는 소년이 되어 낯설지만 원시적인 맞부딪힘 앞에 서 있다. 빗방울에서는 남색의 비냄새가 스며 나오고 있던 밤,  나는  비 냄새가  묻어있는 소년을  보았다.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이성복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山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글_ 백우인 (bwoo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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