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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한 시대를 넘어 새 시대 앞에서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5. 8.

 

글_ 김상기 교수 (감신대학교 구약학)

 

 

이스라엘은 기나긴 광야 여정을 마치고 이제 요단강 앞에 섰습니다. 그 세월을 버티게 했던 땅이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억제하기 힘든 감동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격하게 흘렀을 것입니다. 아프고 힘들었던 모든 기억들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희망만이 그들의 가슴을 채웁니다. 바로 그들 앞에 모세가 장로들과 함께 서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들의 부모세대부터 그들을 이끌어왔고 그들을 바로 여기까지 인도한 모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특별히 다르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꿈을 일깨우고 꿈을 일궈오며 100세를 훌쩍 넘긴 노인입니다. 자랑스럽고 그지없이 고마운 사람입니다.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숱한 고생을 했던 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심초사 애써왔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지금 그가 그들에게 하는 말은 특별히 더 묵직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좀 더 특별하고 좀 더 기분 좋은 이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모세는 평시 했던 말을 짤막하게 간추려서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라!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게 있다면 요단강을 건넌 후 큰 돌들을 쌓아 비석을 만들고 거기에 그 명령들을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 그들이 맨 처음에 할 일입니다. 그렇게 비석에 새기듯 그 명령들을 마음의 비석에 새기라는 의미가 그 명령에 함축되어 있을 것입니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새겨 오해하는 없도록 하라는 당부로 모세의 말은 끝납니다.

 

말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해석되어야 하는데, 본문이 분명하지 않으면 불필요한 갈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염두에 둔 것은 이런 상황보다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른 실천을 할 수 있도록 말씀이 그렇게 분명하고 정확하게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는 다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이전까지 바른 실천을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고 튼실하게 뿌리내리지 못한 탓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다짐은 이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그 실천에 대한 지속적인 반성과 성찰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이 새겨진 돌비석의 형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는 그렇게 다짐하기에 앞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또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는 말을 더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생각에 이미 그 효력을 잃은 제사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 내용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헌신을 상징합니다. 무엇을 드리는 것일까요? 제물일까요? 아닙니다. 다른 관심사들로 찢겨지지 않은 온전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우리의 삶을 그렇게 이끌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이 우리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게 생깁니다. 화목제는 바로 이때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누고 즐거워하는 축제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과 화해가 일어나고 다시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힘을 얻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과 병행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예배가 상호작용하며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우리 삶 가운데 기쁨과 평화가 들어서게 합니다.

 

모세의 이 당부는 짤막하지만 그들이 새로운 땅에 들어가서 실현시켜야 할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광야를 건너온 이스라엘에게 건네주는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코로나19의 강을 건너 아직은 잘 알 수 없는 미래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 시대를 전망하며 어떻게 맞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시대의 틀을 만들어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생각들과 교류하는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되새기고 마음에 새김으로 그 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길을 가시며 죽음 이후의 시대를 말씀하십니다. 그의 길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는 십자가 이후를 바라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요단강 앞에서 강 저편을 바라보았던 것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양자는 모두 생명의 땅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공통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사건 이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갈릴리는 어둠과 죽음의 땅으로 불리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속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 빛으로 오셨고 이제 그 땅을 생명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하십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빛을 보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는 그와 함께 ‘죽었던’ 제자들을 죽음의 자리인 예루살렘에서 빛 고을 갈릴리로 다시 불러내십니다. 그들은 쉽게 십자가 사건을 넘을 수 없었지만, 빈무덤에서 생명을 보고 갈릴리로 향할 것입니다. 그들은 빈무덤의 예루살렘을 생명으로 채울 것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그의 증인이 되는 운동을 세계로 확산시키고 세계를 바꾸어가게 됩니다. 예수와 함께 죽음의 강을 건너 생명의 땅에 이른 제자들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가 불러들인 죽음의 늪을 지나 새 시대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습니다. 막연히 새시대이지 어떤 모습이 될지는 매우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또 주님과 함께 제자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들어설 시대는 말씀과 생명으로 꽃 피울 시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요단강과 십자가를 지나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또 동행하실 것입니다.

 

짤막한 코로나19시대의 영향이 곳곳에 남아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장애가 될 수 있을지라도 그 장애가 우리를 포박할 수 없고 생명의 땅으로 향한 우리의 여정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명과 연대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그 사건 속에서 우리는 희망의 근거가 어디 있는지를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요단강 앞의 이스라엘에게 말했던 것처럼 말씀을 지키는 것에 있고 죽음을 건넌 주님을 빛의 땅에서 다시 뵙는 것에 있습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이 땅에서 계속되며 소망을 낳고 사랑을 키우고 믿음을 단단케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화해의 공동체가 자라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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