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와 과학의 미래

출처: https://www.economist.com/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와 과학의 미래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올해 2월부터 지난 5개월간 코로나19는 이 시대의 유행어가 되었다. 이 바이러스가 그 어원의 뜻 그대로 ‘왕관’을 쓰고 지금도 기세 등등 정체를 숨긴 채 종횡무진하게 암약하고 있다. 6월 30일 현재 시각 보도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확진자 수는 1천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50만 8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며 세계 최강국을 자랑하던 미국에서 12만 8천여 명이 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어 세계 사망자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K방역이라고 자랑하며 잠시 우쭐했었는데 우리나라 상황도 2차 팬데믹을 예상할 정도로 작은 규모의 집단감염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지속되고 있고, 지금 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폭풍 가운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감염되지 않기 위해 다들 전전긍긍하고 있다. 과학의 일선에 선 전문가들은 국가의 절박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신속하게 백신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효용성에 대한 의심의 시선도 만만치 않다. 이 바이러스가 돌연변이에 능한 RNA 유형이고 이미 변이 된 코로나가 여기저기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게다가 그 백신의 구매비용이 엄청나서 일반 서민이 이것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불안한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20세기 이후 과학이 미세한 바이러스에 이토록 무기력한 적이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황망한 지경에 처해 있다.

 

 

그러면 종교는 어떠한가. 특히 모든 재난을 신적 섭리의 결과로 치부하는 기독교의 경우는 그 사정이 어떠한가. 맨 처음 중국 우한에서 이 바이러스 소식이 ‘우한폐렴’이란 말과 함께 퍼지기 시작할 때 국내의 한 유명 목사는 성급하게 중국 선교를 핍박하던 교회 철거 단장이 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1호 사망자라며 성급한 심판론을 확산시켰다. 이후에 대구 경북 중심으로 신천지 세력이 숙주가 되어 팬데믹의 확산을 주도할 즈음 그 심판의 대상은 신천지 이단종파로 옮겨가는 듯했다. 일부 극단적인 이념주의자들은 문재인 좌파정권에 대한 심판까지 읊조리며 SNS 공간을 달구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방역이 비교적 성공적인 결과로 드러나고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 감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어가면서부터 심판론이 쏙 들어갔다. 논리적으로 추론하면 이들이 지난 역사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적 침략의 오만한 행태에 대한 신적 심판을 얼마든지 떠들 만한 엄청난 사태였음에도 그저 잠잠했다. 일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내에 친일파 기독교인들이 꽤 많을 텐데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일본의 무기력한 대응을 두고 심판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후 신천지 감염 사태가 잦아들면서 일부 교회를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확산되니 신천지 이단종파나 기성 기독교 교회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즈음 수도권 집단감염 사태도 몇몇 교회들이 종종 그 현장으로 언급되면서 신천지 세력과의 비교 우위를 내세우기가 다소 멀쑥해졌다. 이처럼 코로나19의 위용은 과학과 종교의 텃밭을 휘저으며 이단과 정통을 가리지 않고 곳곳을 쑤셔대고 있다. 신실하고 경건한 자와 불경한 불신자의 경계도 의식하지 않고 마치 성령의 포즈를 흉내 내듯 불고 싶은 대로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이 바이러스는 인간의 모사와 모략을 비웃는 기세로 우리 삶의 일상을 집적거리며 침투하고 있다.

 

교회의 공예배가 위험한 감염 현장이 된 이래, 두어 달간 다수의 교회들이 예배를 온라인 화상 예배나 가정예배로 대체했다. 오프라인 예배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생존의 위기의식이 더욱 고조되었다. 뉴 노멀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각종 예언들이 난무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코로나19의 제왕적 패권 기간이 한없이 길어지면 앞으로 교회와 기독교의 미래, 종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한 논의와 대안이 자주 제기되곤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매일 감염자가 속출하면서 죽어가는 현실의 한 복판에서 별스런 위안과 평온을 담보하지 못한다. 맥 놓고 있으면 불안하니까 그냥 이런 얘기 저런 가능성을 떠벌이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부득이한 아우성이라고나 할까.

 

 

태초의 세계종교는 ‘교통 공간’에서 경계가 없었다. 마치 광야나 대양처럼 사위로 열려 있었고, 익명의 타자들이 서로 삼투하고 거래하면서, 또 번역하고 변용하면서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향한 담대한 모험과 참신한 탈주의 동력만이 그 에너지로 활기찼다. 그러나 교리의 틀을 갖춰 제도화되면서 종교는 이질적 타자들이 서로 끊어 붙이며 생동하는 존재론적 연금술의 활력을 잃고 자기동일성의 포로로 전락했다. 그 결과 오늘날 종교는 재난을 빌미로 불안을 주입하거나 그 불안을 역이용하여 사람들의 내면을 묶어두는 체제 보전의 메커니즘으로 쇄말화되어간 측면이 없지 않다.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무한과 영원의 세계로 열린 과학적 지성을 억압하고 협소한 교리 체계에 인간의 상상력을 가두려고 한 시도였다. 교회가 그 중세적 오류를 시정하고 회개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는데, 이 땅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그 고렷적 퇴물을 다시 끄집어내 동일한 패턴의 오류를 되풀이하려는 증상을 곧잘 드러낸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종교의 미래는 여전히 희미한 불확실성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인류 종말의 시점이 단축되어 도래할 수도 있고, 단기간에 상황이 타개되어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희미한 안개의 지구촌에 불확실성과 위험의 변수는 더 많아졌고 그 수위도 높아졌다. 코로나 사태로 가려진 지구촌의 더 극심한 재앙에도 눈떠야 한다. 최근 한 보도에 의하면 올해 5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사상 최고치에 도달했다. 동토 시베리아가 펄펄 끓고 있고, 인도양 주변 대륙에 살인적인 메뚜기떼가 창궐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으며, ‘고질라’ 먼지구름이 북중미를 강타하고 있고, 아마존 열대우림은 활활 타오르며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다. 모두 가속화되는 지구온난화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재난이다.

 

종교와 과학은 이러한 전 지구적 재난에 공동보조를 취하며 공동 대응해야 할 때다. 상생의 기치는 늘 옳고 공존의 목표는 늘 희망적이다. 우리는 수백만 년간 이 지구를 지배해온 공룡의 멸종 앞에 겸손해야 한다. 고작 수만 년 역사 속에 숱한 시행착오를 딛고 간신히 문명을 일구어온 것이 우발성에 따라 제공된 자연의 선물, 신적 은총의 선물임을 너무 자주 잊는 건 아닌지 발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코로나19는 그 전위대로 우리에게 경고하러 파견된 하늘의 전령일지 누가 아는가. 점쟁이 노릇하듯, 종교를 일천하게 이용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섣부르게 입에 담지 말자. 금세 망령된 일로 드러난다. 대신 미래로부터 오시는 미지의 하나님을 향해 허름한 가슴, 진지한 지성을 회복하는 쪽으로 가는 게 좋겠다. 애당초 우리는 하나님이 이 만물 가운데 하시는 일의 시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컴컴한 존재 아니었던가.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