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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Homo sensibilisㅡ"스푸마토Sfumato"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7. 1.

 

모호한 경계에서 경건한 생각을 보았다.(60)

 


안개 낀 날엔 세상의 표정을 붙잡을 수가 없다. 옅은 안개가 만드는 광경은 오랜 공백 끝에 나타난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지 시큰둥해하는지  알 수 없던 그대 얼굴 표정이고 시야가 흐릿해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새벽시간이다. 

먹구름이 짙은 하늘은 장마 때 널어 놓은 빨래의 감촉이다. 첼로의 낮은 선율이 스며들어 있는 공기가 스쳐 지나가면  세상은 마법에 걸려, 또렷했던 사물들의 경계와 경계가 서서히 섞이고 합쳐지면서 뭉개져  흐릿하고 자욱해져서는 결국엔 사라진다. 

앞산과 뒷산이, 건물과 건물이, 도로와 자동차가, 하늘과 지평선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모호해진다. 서로 이질스럽다거나 혹은 생경하진 않더라도 머쓱하고 떠듬거리느라 서로의 곁을 내어주지 못하던 사물들이 서로의 전부를 쥐어준다. 페라스peras, 즉 나와 너,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라는 선을 그어 경계 짓던 것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곳엔 공존만이 머문다. 

수묵화 같은 세상이 펼쳐지는 비 오는 날의 풍경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묵화 속의 세상은  모호해진  사물들이  다양한 색채로만 있으면서  보는 이를 점점 가까이 잡아당겨  그 앞에 세우고 낮은 목소리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 오는 날 세상은 신비의 베일을 두르고서 사물들을  전혀 새롭게 보도록 상상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그곳에서는 딱딱하고 날카로운 것들은 견디지 못하며 분명하고 선명한 것들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습기 머문 날은  쨍쨍하고 선명하고 똑바른 빛들을 대기 중의 수분이나 먼지 입자들이 가차 없이 마구 사방으로 흩어버려서 사물들은 자연스럽게 연기가 공기 중으로 사라지거나 안개에 싸인 듯이 부드러워진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사물에게 있던 색채들의 명료함은 낮아지고 대신에 섬세하고 부드럽게 그러데이션 된다. 그리하여 앞에 있는 것에서 뒤로 갈수록 밝은 톤에서 어두운 톤으로 보이면서 사물들은 경계가 희미해져  아스라한 여운으로 밀려나 보인다.

사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회화에 응용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의미로 스푸마토sfumato기법이라고 불렀다. 레오나르도는 사물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기법을 사용했는데, 흐릿한 윤곽과 그윽한 색상을 통해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와 합쳐지게 하면서 보는 이의  상상력을 꿈틀거리게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자와 빛은 공기중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선이나 경계가 없이 부드럽게 섞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반투명한 유약을 겹겹이 겹쳐 올리는 방식으로 스푸마토 기법을 표현하여 입가와 눈가 같은 특정부위에 서른 차례의 붓질을 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얼굴의 표정은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있다는 것을 관찰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기에  눈과 입의 가장자리를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표현해 놓았다. 

그래서인지 모나리자는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고 꼭 나를 쳐다보고 있는것있는 것 같아 섬뜩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물화에서는 영혼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화가들에게  강조했던 대로  모나리자는 영혼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며  볼 때마다 매번 다르게 보인다.  어느 때는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미소가 슬프게 스며들고 또 그런가 하면 평온하고 신비한 매력이 전해져 온다.

이것일까 저것일까 모호한 것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면서 확실한 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누구라도 이것이 진실이야 혹은 이것만이 진리야. 이것은 확고부동해. 이것은 정확해라고 선포해주기를, 그래서 애매한 것으로부터 놓여나길 바란다. 우리는 O, X 로 선택하는 데에 익숙하고,  맞다 틀리다의 이분법적이고 흑백처럼 선명한 판결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유전형질인가 싶을 정도다.

내가 옳기 때문에 너는 틀려야 하고, 하나가 진실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것이 선이면 저것은 악이다.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를 돌아볼 때에 대립되는 것이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을 초과해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불확정적이고 불확실한 것이 세계 본연의 모습이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다만 확률적으로만 입자들의 상태를 말할 수 있을 뿐 처음부터 사물을 이루는 기본물질을  우린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물질이 어디에 어떤 빠르기로 어떻게 위치하고 있었는지 설명할 수도 없다. 선긋기 식의  '확실함'은 사라져야 할 유령이다. 그 유령은 그대와 나를 가파른 비탈길 위에 세워둔다.  

우리들의 이분법은 스푸마토로 희미해지고 사라져야 할 때이다. 사물들의 경계가 사라지듯이, 다양한 주장들의 경계와 입장들의 윤곽선이 확고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은 메마르고 딱딱하지 않을 수 있다. 나와 너의 경계가 없어지는 지점이 두카Dukha 에서 벗어나는 지점이라 했다.

그대와 내가, 너와 내가 뒤섞여들어가듯 흐릿한 경계는 무한한 상상력의 지대가 열리며  마주 보는 시선과 시선이 부드러워진다. 그곳은 비무장지대, 즉 대화의 장이다. 관념의 모험이 시작되는 곳, 'and'가 있는 곳, 우리들의 사유가 중첩되는 곳이다. 우리의 사고에도 스푸마토가 필요하다. 날 선 경계인 변경 말고 뭉개져서 부드럽게 이어지는 섞임과 내어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독선과 편협은 야만의 칼날이 되어 사람과 사람을, 공동체와 공동체를 난도질하며 상처를 입힌다. 그 상태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과도 같아서 내가 이기면 무엇이라도 빼앗을 수 있고 함부로 할 수 있으며 전유할 수 있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확실한'과 '확실함'이  주는 속임수는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우리는 확실함 대신에 모호함 속에서 무언가 추측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고 그리하여 스스로 사물과 사태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고민할 수 있는 것,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 확실함을 얻어 교만에 빠지고 융통성 없는 편협함의 독에 빠지는 것보다 복되고 경건하다고 할 수 있겠다.

모나리자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부드럽게 섞이면서 모호해진 경계선에 있음을 기억에 새겨본다. 나는 모호한 경계에서 경건한 생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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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밤의 끝에서는 

박준

까닭 없이 손끝이
상하는 날이 이어졌다

책장을 넘기다 
손에 베인 미인은
아픈데 가렵다고 말했고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고 말했다

여름빛에 소홀했으므로 
우리들의 얼굴이 검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새벽이 오면
내어주지 않던  서로의 곁을 비집고 들어가
쪽잠에 들기도 했다.

 

 

글_ 백우인 (bwoo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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