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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신학 과잉과 과학 과잉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7. 2.

출처: http://m.dongascience.donga.com/

 

신학 과잉과 과학 과잉

 

강상훈 교수 (Biological Sciences Department, Eastern Illinois University, 과신대 자문위원)

 

 

우리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식의 얘기는 전혀 새롭지 않아서 누가 굳이 해 주지 않더라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는 사람들도 무척 많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현상이든 과학적인 설명을 요구하고, 실은 그 설명이 과학의 모양을 한 유사과학에 근거한 것임에도 과학이라는 단어의 힘에 기대어 온갖 것에 과학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돈벌이를 하려고 하는 현상이 어쩌면 과학의 시대에 대한 반증일 수 있겠다.

 

실제로 우리의 매일의 삶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과학과 기술 발전의 혜택에서 벗어나서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닥치고 있는 COVID-19 사태는 이 상황을 심화시켜 버렸다. 과학의 시대에서 최소한 대중들에게는 한걸음 정도 빗겨서 있던 생물학을 모든 대중의 관심에 모아들여서 지난 몇 개월간 우리는 바이러스학, 분자생물학, 역학 (epidemology) 등의 분야에 그동안의 모든 시도가 하지 못했던 대중 교육의 훌륭한 성과를 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시류에 편승하려는 세력들에 의한 잡다한 과학의 모양을 쓴 주장들이 난무하는 것도 현실이다. 예를 들어 A 혈액형이 더 잘 걸린다는 주장은 New England Journla of Medicine이라는 저명한 의학 저널에 기반하지만, 그 논문이 사실 2,000명 정도의 샘플 수로 분석하여 의구심이 있었고, 6월 29일 발표된 90만 명의 샘플에 대한 메타분석의 결과로는 혈액형과 관련한 유의미한 결론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https://www.covid19hg.org/results/)

 

출처: http://m.dongascience.donga.com/

 

실제로 이러한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과학 시대의 흐름을 고고히 거부하고 때로는 왜곡하는 대표적인 집단이 있으니,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물론 대부분의 상식적인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합리적인 사고와 실험과 분석의 과정을 통해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학문의 영역으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서 모든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 수혜를 당연히 누린다. 하지만 일부는 그 전제를 완강히 거부하여 수혜는 누리되 받아들이는 것은 선별적으로, 즉 자신의 이익이나 부족하고 왜곡된 이해에 기반하여 수용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부류의 행동 방식을 이미 교회 내에서 많이 보고 있는데, 문자주의자들의 성서에 대한 행태가 실은 ‘선별적 문자주의’라 부를 만하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교회는 그와 동시에 신학 과잉이라고 부를 만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신학적, 내지는 신앙적 해답을 요구하고 그것에 부합하려고 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분명 시대를 살아가는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실은 모든 성도들의 소임이라고 할 만한 일이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COVID-19 이후 기독교와 특히 교회라는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일상(new norm)에 대한 전망과 관련한 책이 거의 매일 발간되는 듯 하고, 관련한 기사나 유튜브의 논의들도 상당한데, 개인적으로 일일이 다 확인하지는 못하지만 대부분이 그냥 개인적인 단상이나 '거룩한 잡담' 수준의 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 세태는 사실 누구도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예측하기 어려운데 이 상황인데, 기독교인들은 그리고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이 사태를 주도권의 문제로 이해하는 듯하다. 과학의 시대에 과학의 힘으로 어찌하지 못해서 19세기에나 사용할 법한 방법으로 이 pandemic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마치 과학 시대의 약화의 단초라 여기고, 어떤 기회라고 여기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우려가 든다. 

 

이쯤 되면 해결책이라고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얘기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다. 신학 과잉과 과학 만능주의의 근원에는 어쩌면 신학 부재와 과학 몰이해가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서 과신대의 사역이 더욱 중요하고, 무엇보다 일종의 시민의 교양 내지는 성도의 교양에 과신대의 역할이 이 시대의 요구라는 생각이 든다. 과신대의 사역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참여하는 모든 관심이, 특별히 저변을 넓혀가는 데 복무하는 관심과 기대와 노력과 시간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겠다. 우리 모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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