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해롤드 쿠쉬너 |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 김하범 | 창

 

이신형 (과신대 실행위원)

 

 

내가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과신대에서 과정신학에 관한 콜로퀴움이 있었는데, 강사로 나오신 장왕식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이다. 절판되어서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ebook으로는 계속 판매가 되고 있었다. 그냥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박원순 시장의 사망으로 인해 마음이 많이 흔들렸고 그래서 읽고 있던 책을 놓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아들이 조로증에 걸려 15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깊이 묵상한다. 그리고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고 또한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우리의 잘못이거나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다른 이유로 허락하였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이는 고통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하나님의 뜻에 자꾸 끼워 맞추게 한다. 이는 욥기의 세 친구처럼 고통받은 이를 정죄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이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착한 사람에게 닥쳐온 고통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은 분, 또는 하나님 당신의 뜻을 위해 우리에게 고통을 야기시키는-심지어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잔인한 분으로 만든다. 위로하는 이는 좋은 목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슬픔과 고통 가운데 그 이야기를 듣는 이는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자책하고 원망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하나님에 대해 전능성을 내려놓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신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꺽고 우리를 인도하지 아니하신다. 다만 우리와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법칙을 깨뜨리지 아니하신다. 다만 그 자연법칙으로 인해 생기는 재앙이 가져오는 슬픔과 고통을 함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꺾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신다. 아니 거스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막을 능력이 있지만 막지 않으시는 잔인한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통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거둬달라는 기도가 의미 없음을 안다. 암 검사를 받고서 좋은 결과가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는 의미가 없다. 이미 검사 결과는 검사하는 순간 정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병을 기적으로 낫게 해 달라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 게 정상이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해서, 정성이 부족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기도한다. 우리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아픔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 고통에 우리도 참여한다. 그리고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준다. 기도가 그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그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다시 일어날 힘을 얻는다. 고통을 이기고 슬픔을 극복할 능력을 얻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신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박원순 시장의 사망은 나의 마음을 매우 크게 흔들어놓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허락하신 것은 아니라는 통찰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도록 한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막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막지 못하시는 것이 바로 케노시스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신비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보다 더 크게 아파하시고 고통을 더 크게 함께하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기도가 더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한국 기독교는 차별금지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교회가 탄압받는다고 걱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심으로써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신다. 교회는 그런 주님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가? 지금의 교회는 고통을 함께하시는, 고통을 온몸으로 짊어지신 예수님을 머리 삼고 있는가? 교회는 고통을 받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차별받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하시는데, 교회는 교회가 받을 고통을 두려워하며 외면하지 않는가? 아니 오히려 차별을 더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교회가 많다. 그리고 코로나 19 감염의 주된 경로로 지목되면서 사역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우리가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의 사역이 방해받는 모습을 불평하고 탄압받는다고 성토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코로나 19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어려움과 함께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 교회의 예배와 교육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보다 낫다.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실천하는 것이 예배보다 중요하다.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