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인Homo sensibilis
ㅡ이곳에서 '튤립 머리'를 보았다.
백우인 기자
15세기의 그림과 마주 앉은 오후다.
세계가 지금보다 6세기나 어렸을 때 그려진 작품이 오늘 내 시야에 나타나 손끝으로 만져지고 있고 눈으로 읽히고 있지만 공백이 많아 허기진다. 시간의 번개가 쳐서 나의 발을 이끌어 그 당시 그림을 그리던 화가 옆으로 데리고 가줬으면 좋겠다. 살아 숨 쉬는 그림으로 읽고 싶은 오후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걸까?
살아있는 그대로 빈틈없이 밀착해서 바라보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알기를 원한다면, 그 당시의 사회라는 대기권 속에 작품과 나를 퐁당 던져 놓아야 한다. 대기권 속에서 파닥거리며 숨쉬도록 두고서 작품을 경험해 보자는 얘기다.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있던 그 당시의 대기권으로 한 발자국 들어가 보자.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는 기울어가는 '중세의 가을'을 잘 보여주는 위대한 화가다. 그의 작품 <돌 꺼내기>는 외과 이발사의 천공술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부제가 아주 재밌다. "주인이시여 돌을 꺼내 주세요, 나의 이름은 루배르트 다스입니다." 그러니까 루베르트 다스는 바보병에 걸린 환자의 이름이고 그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서 돌을 꺼내고 있는 장면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외과 이발사의 차림새와 분위기가 왠지 석연치 않아 보인다. 보스는 우리에게 뭔가 폭로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인데 내 감각은 그것을 쫓고 있다.
외과 이발사들이 누구인가? 의사라는 정식 명칭이 내과 의사에게만 해당되었던 당시에, 그들 대부분은 교육을 받아 학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생활 전선에서 밀접하게 외과적 치료를 필요로 하는 일은 했고, 낮은 신분 계급이었다. 그들은 1540년 영국의 헨리 8세의 종기 수술을 계기로 의사로서의 비슷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외과 이발사들이 주로 하는 일은 이발관에서 손님들의 충치나 사랑니를 뽑거나 고름을 짜내거나 살에 파고든 발톱을 처치하는 일, 간혹 티눈을 파내는 일을 했다. 또 소화가 안되는 사람에게서 사혈을 대략 600밀리 정도씩 뽑는 일을 했다. 그런가 하면 매독에 걸려 코가 문드러진 환자들의 코를 복원하는 수술도 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 구멍을 내는 천공술도 했다.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을 때 부서진 뼛조각을 빼내기 위해 시행했던 천공술은 수도사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병을 가진 환자들, 예컨대 간질 발작이나 편두통, 정신병 그리고 바보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도 시행되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외과 이발사가 의자에 앉아 있는 환자의 머리를 째고는 무언가를 꺼내고 있다. 돌멩이는 아닌것 같은데 좀 더 시선을 깊게 꼽아보자. 환자의 머리를 째고 돌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식물의 알뿌리를 꺼내고 있다. 테이블에 있는 꽃과 연결 지어 본다면 필시 그 알뿌리와 관계있는 꽃이다. 보스가 네덜란드 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꽃은 튤립이다.
'튤립 머리'는 네덜란드에서는 미친 사람을 뜻하는 은유다. 머리에 깔때기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있는 외과 이발사도 어색하다. 돌파리인가? 그림 오른쪽도 기류가 심상치 않다. 머리에 책을 올리고 있는 여인이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 여인이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은 해부 학계의 성서와도 같은 갈레노스의 책일 것인데 그것을 펼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올려놓고 있다. 그렇다면 테이블 한가운데의 튤립 머리가 단서다.
보스는 너나 할 것 없이 그 시대가 바보병에 걸린 이들이 사는 세상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이다. 돌을 꺼내야 한다고 데리고 온 수도사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돌을 꺼내겠다고 머리를 째는 외과 이발사나 방관하고 앉아서 들여다 보는 여인이나 모두 튤립 머리임을 폭로하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대기권은 어떠한가?
잘못된 신념과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이나 제대로 된 신앙을 가르친다고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이나, 세상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온갖 불의에 무감각하게 있는 우리나, 세상의 일에 방관하고 행동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타자와 연대를 말하고 공존을 말하는 이들이나, 법의 잣대에서 나는 예외 상태여야 한다고 특권의식과 교만에 사로 잡힌 이들이나 모두 튤립 머리 아닌가? 튤립 머리가 이곳에서도 넘쳐난다. 나는 온통 튤립 머리로 가득한 세상을 보았다.
백우인 (bwooin@naver.com)
과신대 실행위원이자 출판팀장으로 섬기고 있다. 과신뷰에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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