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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SF영화와 기독교] 6. 아웃사이드 더 와이어: 다시 개별성 앞에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 6. 22.

아웃사이드 더 와이어 Outside the Wire, 2021

액션, SF / 미국 / 114분 / 2021.01.15. 개봉
감독 : 미카엘 하프스트롬 
주연 : 안소니 마키(리오 대위), 댐슨 이드리스(하프 중위)

 

코비드 19로 인해 우리는 비대면이라는 단어를 생활화했다. 비대면 강의, 비대면 회의, 비대면 예배가 일상화되었다. 접촉하지 않은 삶, 온라인으로 가능한 삶이 우리에게 실제로 다가왔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를 대면하는 일이 어색해졌다.

 


 

만약 전쟁을 비대면으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 미카엘 하프스트롬 감독은 그런 의문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탄생시킨 캐릭터 하프 중위는 실제로 비대면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이다. 하프는 드론 폭격기를 조종한다. 그가 조종하는 폭격기는 전장에 떠 있지만, 조종수인 하프는 텍사스에 있는 조종간 안에 있다. 그는 컴퓨터 게임처럼 단지 화면만 보고 전쟁을 수행한다.

 

하프 중위는 실제 전투를 수행 중인 병사들을 엄호하고 공중에서 폭격으로 지원한다. 전투 현장에 있던 중대장은 치열하게 적과 대치중이다. 그러다 부하 병사 두 명이 적 가까이 인질로 잡혀 있고, 적은 로켓포를 발사하려 한다. 지상에서 중대장은 부하를 구하기 위해 폭격을 허락하지 않지만, 조종간 앞의 하프는 적의 로켓포를 향해 드론 전투기의 미사일을 발사한다. 미사일은 적의 로켓포 병사뿐 아니라 아군 병사 두 명의 생명도 앗아갔다. 현장의 중대장은 흥분하나, 하프는 차분하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 중대장은 실제 전투 현장에 있고, 하프는 화면 앞에 앉아 있다. 하프 중위는 현장의 병사들과 대면한 적이 없다. 하프 중위에게 현장은 프로그램처럼 다가올 뿐이다.

 

 

이 전투를 복기하면서 사령부는 하프 중위를 전투 현장으로 파견한다. 사령부는 그에게 필요한 것이 현장에서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판단하였다. 화면에서 펼쳐지는 전투와 실제의 전투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 있다. 30여 년 전 우리는 걸프전의 현장을 텔레비전 앞에서 생생하게 경험했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잠수함에서 크루즈 미사일이 발사되고 정확히 바그다드의 군사시설을 초토화하는 것을 CNN은 생중계했고 우리는 생생하게 보게 되었다. 텔레비전에서 펼쳐지는 전쟁은 별것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게임처럼, 영화처럼 우리에게 담담하게 다가왔다. 바그다드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건물이 무너지고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일상을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전투는 점점 비대면으로 진행된다. 현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은 점차 무인 드론으로 대체되고, 조종사들은 전투 현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본부의 모니터 앞에서 전쟁을 수행한다. 당연히 윤리적 망설임이나 판단이 줄어든다. 그들은 단지 게임을 했을 뿐이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고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칼을 버리고 저 병신년 이후의 곽재우처럼 안개 내린 산속으로 숨어들어 가 개울물을 퍼먹는 신선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로잡혀 온 적군을 참수하기 전 이순신은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새파란 20대 초반의 적군은 죽이기에 너무 앳되었다. 이순신은 그를 보는 순간 아들이 생각났고, 조선의 군인들이 생각났다. 그에게도 부모가 있다는 것이 떠올랐고,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의 칼이 번득이는 순간 그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끝이 날 것이다. 그의 부모도 자신처럼 불면의 밤들을 보낼 것이다. 이순신은 이 개별성, 한 인격으로서의 적을 죽이지 못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개별성을 죽여야 했고, 애써 무시해야 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실제 전투 현장에서 군인들은 이러한 개별성 앞에서 망설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적군을 마주 대한 채 총탄을 쉽게 발사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미 해병대의 교관으로 근무했던 데이브 그로스먼은 말한다. “우리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적을 마주할 때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것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냥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훈련을 무한 반복해야 했다. 생각하면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하프 중위는 파견되어 간 전장에서 리오 대위에게 배속된다. 리오 대위와 적군이 소유하고 있는 핵무기 미사일 발사 장치를 수거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리오 대위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던 중 하프 중위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리오는 인간이 아니라 정밀하게 제작된 로봇이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합쳐진 특수 전투 병사였고 그가 실제로 현장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작전 수행 중 리오와 하프는 적군들이 장악한 은행 건물로 들어선다. 물론 십여 명의 은행직원들이 적군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 하프 중위는 인질을 앞세운 적들에게 총탄을 발사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러나 리오 대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총탄을 발사하며 작전을 수행한다. 그에게는 민간인 한두 명의 생명보다 핵미사일 발사 장치를 고수하는 것이 더 중요한 미션으로 프로그램화 되었기 때문이다. 하프 중위는 인격이 배제된 전쟁의 참혹함, 프로그램화된 작전 수행 앞에 희생되는 민간인의 죽음 앞에 회의와 윤리적 책임감으로 고뇌한다.

 


 

오래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후투족과 투치족이 내전을 벌였다. 그들은 10대의 소년들에게 총을 쥐여주고 전쟁을 수행했다. 소년병들에게 그들은 끊임없이 소리쳤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라 벌레들이다.” 세뇌된 소년병들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총탄을 휘둘렀고 끔찍한 살생이 일어났다.

 

비대면 전쟁은 위험하다. 인격이 배제된 전쟁, 사람을 마주하지 않는 전투는 위험하다. 화면으로 수행하는 전쟁은 망설임이 없다. 윤리적 판단도, 사람에 대한 존중도 사라진다.

 

오늘날 기술이 발달할수록 이러한 현상은 사회 전반에 나타난다. 특히 금융자본주의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된다. 제조업이 주요 산업일 때, 작은 규모의 마을 은행들이 활성화되었을 때 그들은 직원 한 사람 한 사람과 대면하였기에 쉽게 해고하지 못했다. 내가 누군가를 해고하여 실직자가 되면 그의 가정이 무너지고 그의 가족은 치명적 고통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직원 한 사람은 누군가의 아들/딸이고 누군가의 남편/아내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어머니였다.

 

지금은 다르다. 대부분 결정이 화면에서 빠르게 이뤄진다. 그들은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화면을 보고 일한다. 그들이 대면하는 것은 그저 숫자일 뿐이며, 통계일 뿐이다. 그들은 사람을 대하지 않고 통계만 본다. 통계는 인격이 아니다. 그러니 결정하기가 쉽다. 한 사람의 결정으로 수백 명, 수천 명이 해고되어도 그것은 화면 상의 숫자일 뿐이다. 더욱이 나와 직접 관련도 없다. 몇 차례의 과정을 거쳐 복잡하게 얽힌 숫자일 뿐이다. 나는 그 사람들을 대면할 일이 전혀 없다. 누군지도 모르고 나의 결정으로 누가 거리로 나앉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양심의 가책도 적다. 결정하기가 쉽다.

 

이순신의 개별성을 확보해야 한다. 숫자가 아닌 각 사람의 인격을 생각해야 한다. 익명이 아닌 접촉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안전한 사회가 될 것이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개별성을 생각해야 한다. 치열한 삶의 현장이 있어야 한다. 인격적 접촉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1차 대전에 참가한 이후로 전투 현장에는 나와 보지도 않은 채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이래라저래라 하는 자들을 대단히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 C. S. 루이스

 

 

 

 


 

 

글 | 김양현

하울의 움직이는 아빠로 방송과 잡지에 영화 칼럼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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