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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생명욕동과 죽음욕동의 순환 아래 있는 존재들의 공생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 3. 10.

'생명욕동과 죽음욕동의 순환 아래 있는 존재들의 공생' 

린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을 읽고

 

<공생자 행성 - 린 마굴리스가 들려주는 공생 진화의 비밀> / 린 마굴리스 지음 /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펴냄 / 239쪽 / 1만 5000원

 

생명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환경과 물질 그리고 다른 생명과 함께 공생하고 공존한다. 국어사전에서는 공생을 "종류가 다른 생물이 같은 곳에서 살며 서로에게 이익을 주며 함께 사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어떠한 집단이나 사람들이 상보 관계를 이룰 때 "공생하고 있다"고 으레 말하기도 한다. 예컨대 뿌리혹박테리아와 콩과 식물의 상리공생이나 고래와 따개비의 편리공생 등, 공생의 큰 갈래와 그 예시까지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공생자 행성>의 저자인 린 마굴리스는 모든 생명체의 기본 단위인 세포 또한 이 공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린 마굴리스가 위스콘신 대학원에서 생물학을 공부할 때, 당시에는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진 직후였기 때문에 학계의 관심이 염색체가 들어 있는 세포핵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배적인 학계의 여론에 회의를 가졌고, 핵 바깥의 세포 소기관의 유전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핵 유전에 대한 과거의 생물학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에드먼드 윌슨이 쓴 세포 소기관인 '색소체와 미토콘드리아와 자유 생활을 하는 미생물 간의 유사성'에 대한 문헌을 접하게 된다. 그것을 계기로 그녀는 공생 문헌들에 언급된 미생물들을 연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에 공생하는 생물이 많다는 것, 특히 생물의 세포 안이나 곁에서 살아가는 세균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윌슨이 언급한 초기 연구자들에게 주목한다. 

그들이 세웠던 “자체 유전되는 비핵 세포 부분은 한때 자유 생활을 했던 세균의 잔재” 라는 가설이 옳다고 느낀 그녀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유전학과에 입학하여 세포 소기관의 유전학 문헌들을 뒤지며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는 연구를 계속했다. 그녀의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에 대한 논문은 원고가 15번쯤 거부당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1966년, <체세포 분열하는 세포들의 기원(Serial Endosymbiosis Theory)>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다. 그리고 딸을 임신한 동안 집에 있으면서 SET를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풀어낸 원고를 완성한다. 이 원고 또한 처음에는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지만, 1년가량이 더 지난 뒤 많은 노력 끝에 마침내 예일대학교에서 출판되었고, 동료들의 비평과 서평 덕에 SET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의 이론은 처음에는 비주류로 취급받으며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의 SET는 조금 온건하게 수정된 뒤 고등학교와 대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사실 공생은 1873년 안톤 데바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 생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 이라고 정의하면서 처음 만들어진 단어다. 린 마굴리스는 진화적 새로움이 대부분 공생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고 믿었는데(공생발생), 이는 정통 견해인 진화는 생존경쟁으로써 촉발된다(적자생존)는 다윈주의와 반대된다. 주류를 벗어나 당당하게 비주류에 서서 목소리를 내는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생명은 화학적으로 보존성이 좋아서 세포의 각 기관에서 조상에 대한 단서들을 볼 수 있고 어떤 순서로 융합이 이루어졌는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가령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의 형태를 보면, 현재의 녹조류 세포는 과거 완전히 독립적이었던 네 세균이 일정한 순서로 융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발효성 고세균에 스피로헤타라는 나선상의 유영성 세균이 융합된 원생생물이 등장했다. 이 원생생물은 현대의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혐기성이었다. 유영하는 원생생물로부터 체세포 분열이 진화한 뒤 산소 호흡을 하는 세균이 융합되어 미토콘드리아가 됐고, 마지막으로 광합성을 하는 시아노박테리아가 융합되어 엽록체가 됐다. 이렇게 현대 식물 세포의 조상인 유영하는 녹조류가 탄생하였다.

린 마굴리스의 SET의 핵심 개념은 진핵세포의 세포질에 있는 유전자들에도 주목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이 유전자들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 세균들의 경쟁과 협상의 역사를 보여 주는 유물이다. 시아노박테리아들은 전 세계에 퍼져 살고 있으며, 일부는 엽록체가 되거나 식물 조직 내에서 살아간다. 산소 호흡 세균이었던 미토콘드리아는 인간의 몸속에서 모든 대사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생명은 늘 분투의 결과인가 보다.

1920년대에 같은 주장을 했던 아이번 월린은 학계에서 철저히 배척당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세균이란 위험한 병원체, 질병 매개체일 뿐이었다. 마굴리스는 월린의 주장이 무시당했던 이유 중의 하나로 당시의 분류학이 너무 경직되어 있었음을 한 가지 이유로 꼽는다. 모든 생물은 동물 혹은 식물로 분류되어야만 했고, 미생물 또한 그랬다. 

생물 분류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마굴리스는 미생물 공생자를 연구하며 생물 분류 체계를 비판하고 모순을 수정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본래의 체계는 진화사가 반영되지 않은 식물-동물 이분법적인 체계였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과 모순되며 진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한다. 이에 마굴리스와 동료들은 휘태커의 5계 분류 체계를 확장시켜 원핵생물과 진핵생물을 가장 상위에 놓은 2단 5계 분류 체계를 확립했다. 이 분류 체계를 통해 우리는 미생물들이 우리의 인식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임을 알게 한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아는가는 우리가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마굴리스의 말처럼, 우리들은 “고등 생물”, “우월한 영장류” 등의 자기의식을 내려놓고 동등한 위치에서 생물들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공생자 행성>에서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생식이다. 생식이 굶주림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유성 생식은 초기 공생과 비슷한 방식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성적/공생 융합에서 융합을 이끈 원동력을 굶주림으로 본다.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은 <성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감수 분열 성(性)이 세균의 성이 생긴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특정한 원생생물들에서 실패한 동족 살해의 형태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적/공생 융합이 서로 다른 유전자들을 재조합된 생물의 몸속에 불어넣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두 융합의 차이점은 성은 융합과 분리의 양상을 예측하기 용이하며, 일시적 공생보다는 덜 창조적이고 우연적이라는 데에 있다. 반면 공생은 융합하는 양측의 생물이 다른 모습을 갖고 있으며, 융합의 결과물 또한 양측 생물과 다르다. 그리고 진화적 새로움을 발생시킨다. 유성 생식은 다세포성과 복잡성을 통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쉬워 생존에 유리하지만, 어쩔 수 없는 계획된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  유성생식 덕분에 생물의 다양성이 등장했지만, 노화와 죽음도 옵션으로 얻게 되었다는 것은 안타깝다.

레뮤얼 로스코 클리블랜드는 감수 분열성은 위기 상황에서의 동족 섭식의 여파로 시작된 생존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포식자 원생생물들이 굶주려서 동족을 섭식할 때, 어떤 섭식자는 피식자의 핵과 염색체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간직하기도 했다. 이 합병된 세포들은 핵 두 개, 염색체 두 개의 비정상적인 단세포가 되었다(배수체). 원생생물들은 본래 염색체를 한 벌만 지닌 단수체이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배수체를 벗어나 다시 반수체로 돌아가고자 했다. 클리블랜드에 따르면 동족 섭식을 통해 획득한 여분의 염색체를 제거하는 것이 감수 분열의 첫걸음이다.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동족 섭식형 원시 짝짓기에서 시작된 감수 분열 성은 대를 거듭하며 부모의 유전자를 반씩 재조합하여 자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유전자를 전달하는 임무를 완수한 부모는 죽음을 맞게 된다. 

삶-사랑에 대한 충동은 곧 죽음에 대한 충동이다. 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삶욕동과 죽음욕동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죽음충동은 개체의 가장 오래된 충동으로 여겨진다. 생명 발생 이전의 원초(비유기체 상태)로의 회귀를 목적으로 한다. 또한 라캉은 모든 충동들은 죽음의 충동이라고 하였다.

성과 죽음, 인간의 욕망을 자아, 초자아, 이드의 측면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자아가 사라지지 않고 되도록 오래 존속하기를 원한다. 자아를 가진 하나의 개체로서는 죽음이 곧 종말을 의미한다.

유전자에 새겨진 생물적 본능은 짝짓기를 하고 자손을 남겨 계속하여 유전자가 후대로 이어지며 살아남게 한다. 그리고 이 성性은 필연적으로 생명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초자아의 측면에서는 인간의 영생에 대해 회의적이다. 인간이 지구 환경에 끼치는 악영향과 공생의 파괴를 생각하면 영생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이렇듯 정신분석학적, 생물학적으로 보면 생물-인간의 죽음은 자연의 섭리이다. 그렇다면 “공생자 행성”인 지구에서 섭리를 거슬러 영생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제임스 러블록의 가이아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기온과 대기를 항상 같은 상태로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지닌다고 한다. 그리고 가이아라는 계를 이루는 생명들은 항상성 유지를 위해 스스로 환경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과오를 청산하고 지구를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으로 되돌리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에서 살아남을 생물종들의 '노아의 방주'에는 인간이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글 | 노은서

감신대 예비 신입생. 과학과 신학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공부하고 서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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