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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관성과 위반의 위험 - '오이디푸스 - 되기'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 3. 11.

사유는 언어 안에서 이루어진다. 언어는 사유의 매개자다. 그렇다면 이것을 좀 더 밀어붙여서 언어는 사유의 집이므로 사유하는 자는 곧 언어 안에서 태어나며 인간이 사유함으로써 존재하는 한, 사유가 곧 존재이며 사유가 행동을 낳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는 푸코의 사유를 따라가 본 것이다. 나는 오늘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을 잡고 미노타우로스가 사는 미로궁 속으로 들어간 테세우스다. 미노타우로스는 내게 관성과 위반이며 붉은 실은 물리학과 진화 발생학이며 이것으로 들여다본 사물의 본성이다. 미로궁 아비린토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이 정지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갈릴레이는 일정한 빠르기로 물체가 운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둘은 모두 사물의 운동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며 여기서 언급되는 사물의 속성은 관성이다. 관성이란 물체가 처음의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성질로, 정지한 물체는 그대로 계속 정지하려 하고 일정한 빠르기로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그 빠르기로 운동하려 한다는 의미다. 관성이라는 속성에서 둘의 관점의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애초부터 정지가 자연스러운 것이며 후자는 일정한 빠르기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관성에는 힘이 외부성으로 작동한다. 외부에서 가하는 힘이 없을 시에, 그리고 물체와 접촉면 사이 마찰로 인해 열이 발생하는데 이 열은 결국 물체의 운동을 멈추게 할 것이므로, 이러한 마찰력이 없다는 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유낙하하는 물체는 중력과 가속도에 의해 속도가 점점 증가하면서 지구 중심 쪽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자연스럽다. 루크레티우스는 창가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보다가 똑바로 직선으로 떨어지는 빗방울들 가운데는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이런 빗방울을 보고 편위라는 의미의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일률적인 흐름에 균열을 내는 클리나멘은 기존의 것들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그것으로 인해 다른 흐름이 발생하게 됨으로써 다양성이 생긴다는 것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클리나멘은 자연스러운 것, 즉 관성에 대한 위반이며 이 위반은 균열과 충돌로 인한 혼란을 초래하지만 그럼에도 획기적인 것들의 출현이 등장한다. 

자연스러움이란 보편의 다른 문법으로, 자연스러움의 위반은 기형과 이형 등의 변형이다. 서구의 사상은 보편에 대한 위반을 악이라고 칭함으로써 정상적인 것의 대척점에 이것을 둔다. 그리하여 정상의 극에 속하지 않는 것들은 소위 전문가들을 대동하여 비정상의 범주에 넣어 격리시키고자 했다. 기형과 이형, 그들이 사회에서 모조리 밖으로 밀려나고 무화되거나 비존재가 됨으로써 그들은 린네가 구축해놓은 분류가지에 속하지 못하며 구성원의 분류서랍에서 제거되었다. 보편의 세상이 마치 원처럼 매끈한 진리의 얼굴이어야 한다는 법령 아래, 대조표를 두고서 잡초를 뽑듯이 기준에 어긋나는 것들을 솎아 내버리고 문질러놓은 것의 결과물이 바로 동일성의 철학이며 선을 그어 놓고 철저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다. 동일성은 어디에서나 재현되어야 했다. 

나는 여기서 사유의 관점을 사물의 내부 속성으로 향해 보려 한다. 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해 우린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에 관한 물음을 던져놓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일반화된 것은 그 일반화 속에 과연 위배나 위반이 없을까? 다시 말해 규칙이 먼저 존재하고 우연성이 존재하는 것인지 묻는 것이다. 자연은 우연성의 다발이다. 이 우발성들을 동일성과 규칙성의 자루 속에 넣은 것은 인간이며, 자루 속에 모이지 않은 것들은 인간에 의해 의미 없는 노이즈가 되어 휴지통 속으로 던져진다. 인간은 다음 순서로 자루 속에 들어있는 것만이 전부라고 선언하고 공표함으로써 엄중한 모델을 세워 그것을 지키느라 급급했다. 

전기를 띠는 입자는 양전하와 음전하 두 가지가 있다. (+)가 많이 모여 있는 쪽이 (+)극이라 할 때 여기에는 모조리 (+)만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도 있으나 상대적으로 (+)가 많을 뿐이다.

이번에는 성염색체를 가지고 말해보자. 남자와 여자는 정말 성염색체 XX와 XY로 구별되는 것일까? 올림픽 경기에서 마라톤에 출전한 선수 중에는 XY 염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외관상 여성인 경우가 종종 발견되었다. XX와 XY를 각각 여성 남성이라 일반화시킨 후에 과학자들이 한 일이란 그 조건표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돌연변이로 판결문을 내렸다. 그러면 의사들은 천형 같은 오류를 바로잡는 성직자가 되어서 그들이 남과 여라는 보편성에 맞게 질병을 고치는 수준에서 수술했다. 시술은 그들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기형과 이형의 인간은 실험대 위의 오류를 가진 사물이 되었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이라 칭할 수 있는 생물학적 성, 이것은 애초부터 이분법이 낳은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다. 

발생학이 발전하면서 성의 이분법이 만들어놓은 대척점 안에는 다양한 이형과 기형이 매 순간 수시로 등장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성의 출현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성이 결정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성을 바꾸기도 하는 등, 그 가능성은 인과론으로 예측도 할 수 없을 만큼 모호성으로 범람한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이 대목에서 생명은 모호성이라 말한 폴 틸리히는 그의 명언과 함께 여전히 빛난다. 

생명은 다양성이라는 자연의 무도회장에 서로 왈츠를 추며 탱고를 추며 공존한다. 이곳에서 질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다만, 그들은 그 모습으로 제각각의 방식을 가지고 생명활동을 이어 나간다. 적어도 힘을 가진 자가 장미 씨앗 속에서 바오밥나무 씨앗을 솎아내듯이, 조개 속에서 꺼낸 찌그러진 진주를 골라내듯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때에만. 

 


다시 관성으로 돌아가 보자. 


첫째, 자연스러움을 딛고 서 있는 관성은 사물의 속성 그 자체가 아니다. 사물은 이미 그 자체 안에서 비규정적이며 불확실성, 비결정성을 안고 있으며 관성이라는 라벨은 인간이 매달아 놓은 것이다. 사물은 우주의 별들보다도 더 많은 존재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위반이 아니라 존재의 본성이다. 


둘째, 클리나멘은 마치 발생학이 다양한 진화를 추동하는 것처럼 충돌을 통해 다양한 사건과 사태를 형성한다. 그럼으로써 보편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파도를 일으키는 에너지원이 된다. 이는 무엇인가 기존의 보편이 좋았다 라기보다 무엇인가 문제가 있음을 자각한 경우, 그리하여 새로운 개선책이 필요한 신선한 바람일 경우, 클리나멘은 섹시할 만큼 유용하다. 그러나 푸코가 바깥의 사유에 대해서 위험성을 말하고 있음을 짚어볼 때에, 또 생물의 우연성과 무작위성을 염두에 둘 때에 도로의 규칙을 어기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인 위험이 발생할 수도 있다. 

관성과 위반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커다란 강물의 줄기는 지류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쉽사리 그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과 위반은 마치 우주상수의 숫자와 그것의 오차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것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위력을 초래할 것 같으나 현실의 세계에서는 불도저로 울퉁불퉁한 아스팔트를 밀고 문질러서 평평하게 하는 것처럼 위반의 효과는 국소적,국지적이라는 것, 지렁이의 관성이 앞쪽을 향해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처럼 보편이라는 기성의 흐름은 방향을 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관성은 이미 시대의 거대 담론이며, 담론의 장인 에피스테메에서 사소성, 극소성, 주변의 사유, 바깥의 사유, 문지방, 다르게 생각하기 등등 다양한 크기의 조약돌들이 뒹군다고 해도 그것은 지질학적으로 커다란 기반암이 건재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의 시간이 모여야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다. 천동설이 뒤집어지는 데 2000년이나 걸린 것을 교훈 삼는다면 세계 내 존재로서의 현존재인 우리는 여전히 관성을 따라 흐르고 있고, 여기저기 퇴적된 지층 아래에서는 작은 모질물들이 생기는 중임을 기억해야 한다. 아주 느리게.

간혹 위반의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뼛속 DNA까지 그 동기와 의지가 새겨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유행에 따르고자 하는 치기 어린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N극에 이끌리는 나침반의 N극처럼 곧바로 관성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또한, 어설픈 위반은 오히려 일방통행에 역행함으로써 위험을 초래할 뿐 진정으로 변화의 주체의 대열에 설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오이디푸스처럼 끝까지 진리라는 위반을 향해 용기를 던지면서 밀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2000년 중의 하루가 되고 이 하루들이 모여 결국엔 관성의 2000년을 견디고 넘어서게 되는 것이므로.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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