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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역사적·문헌적 관점으로 창세기 1~3장 읽기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 9. 8.

『구약읽기 역사와 문헌』중에서

『구약읽기: 역사와 문헌』|크리스틴 헤이스 지음|김성웅 옮김|문학동네|656쪽


크리스틴 헤이스(Christine Elizabeth Hayes)은 미국 예일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고대 유대 문헌 연구의 권위자다. 헤이스 교수는 학부에서 ‘구약성경 개요(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Hebrew Bible)’를 강의하면서 문헌적, 역사적 관점으로 구약성경을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 신자로서 기독론의 신앙적 관점의 구약 성경 해석에 익숙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똑같은 구약 성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구약 성경에 대하여 어떻게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지 단서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문명권에 속한 민족이었지만 중심적인 민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변 민족들과 달리 새로운 사상을 가진 민족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정복과 유배는 한 국가를 이루는 인종 집단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보통이다. 정복당한 민족은 패배한 자기들의 신을 버리고 승리한 정복자들의 신을 받아들였고, 그 나라의 정체성조차도 점령한 나라와 문화적 종교적 동화과정을 거쳐 사라졌다. 이스라엘 북왕국도 그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남유다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남유다를 뿌리로 한 유대 민족은 이미 주전 6세기경 나라의 멸망으로 민족적, 정치적 기반이 다 없어졌음에도, 근동 역사에 존재했던 많은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다시 일어났고, 여러 변화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그 자취를 현대에도 찾을 수 있는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스라엘의 신개념은 고대 사람들의 신개념과 달랐다. 고대 사람들에게 신은 자연의 힘과 동일하거나 자연의 힘에 내재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주에 단 하나의 신성한 힘, 단 하나의 신이 있다는 독특한 개념을 주장했다. 이 신은 자연 밖에, 자연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즉 자연을 초월하는 신이다. 이 신은 자연이나 자연 현상을 통해 알 수 있는 신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인간과의 특수한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는 신이다.


이러한 신개념은 이스라엘 민족이 인종적, 집단적으로 살아남는 데 영향을 미쳤다. 역사를 지배하는 완전히 초월적인 신의 개념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비극적이고 참혹한 사건, 즉 나라가 멸망하거나 유배당하는 사건까지도 그들이 신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아니고 신이 그들을 위해 더 큰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이해하게 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서들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멸망이 아니고 남은 자에 의해 다시 구원받는 예언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신 개념은 다른 나라의 신과 달리 인간을 도덕적 행위자로 보는 혁명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헤이스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 사이에는 개념적 차이가 있다고 한다. 모세 오경의 기록자들이 ‘엘’이나 ‘엘로힘’ 그리고 ‘여호와’로 기록한 것으로 오늘날 번역 성경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신약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으로 혼동하게 한다. 그러나 구약의 ‘하나님’은 후대 서구 신학에서 정립한 ‘하나님’이 가진 신적 속성을 다 갖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모세 오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여호와)은 전지적 능력과 불변성이란 속성이 없다. 그래서 성경의 원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구약의 하나님과 후대 서구 신학에서 규정한 하나님의 개념을 구분하는 것이 좋다.  구약의 여호와는 종종 인간의 행동에 놀라고, 인간의 본성과 행위에 대해 알아가는 대로 자기 마음을 바꾸고 계획을 조정하기도 한다.


헤이스는 ‘원시 역사’라고 하는 창세기 1~11장를 일반적인 의미의 역사로 읽거나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 
창세기의 많은 내용은 고대 근동의 신화를 빌려 온 것이라고 한다. 1장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에누마 엘리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바벨론 창조 서사시와 주제와 소재가 똑같다. 2~3장의 에덴동산의 한 쌍의 남녀 이야기는 주인공이 영생을 얻기 위해 고단한 여정에 나서는 내용으로 된 ‘길가메쉬 서사시’와 유사하다. 6~9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인 ‘아트라하시스의 서사시’와 ‘길가메쉬 서사시’ 속의 홍수 이야기의 이스라엘 버전이다. 특히 수메르의 ‘지우수드라 신화’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그렇다고 유사성만 보면 안 된다. 상이성을 봐야 한다. 엄청난 사상적 차이가 있다. 구약의 저자들은 근동 지방의 공통 유산인 신, 창조된 우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새롭고 급진적인 개념에 맞게 바꾸었다. 즉 구약의 저자들은 새로운 가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이들의 신화를 빌려 와 변형시켰다.


헤이스는 지금까지 언급한 관점을 바탕으로 창세기 1~3장에 나타난 하나님, 인간, 우주 그리고 악의 기원에 대하여 해설한다.

 



하나님

창세기 1장에는 신화에 상응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화를 억제한다. 이게 메소포타미아나 다른 중근동 신화와 다른 점이다. 그러나 창세기에 ‘신화’가 없는 것을 ‘신화적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신화와 달리 ‘신화적 이야기’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들과 연결된 전승되는 이야기이다. 진리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화 또는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화가 없다는 것은 신이 자연이나 자연의 물질, 또는 자연 현상에 내재한다는 개념이 없음을 의미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자연계의 그 어떤 강력한 힘이나 물질의 존재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존재다. 창세기 1장의 서술은 우주의 창조자이자 주권자인 하나의 최고의 신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반영한다. 그는 그저 존재한다. 이 신은 그저 자신의 뜻을 말함으로써 창조한다.


인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독특하고 신성하며 특별한 돌봄과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다른 고대 개념들과 분명한 단절이다. 창세기의 인간은 신의 하수인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피조물을 돌보는 존재가 바로 창조주다. 그렇다고 인간이 신이거나 동류는 아니다. 인간은 더 높은 힘에 의존하는 피조물이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의 호흡으로 생명을 얻은 존재다. 인간은 땅의 특징과 신의 특징을 함께 갖는 역설적인 혼합체이다.


창세기 1장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앞에서 불평등한 관계에 있다는 암시는 없다.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가 ‘아담’이다. ‘아담’은 ‘아다마(흙)’로 된 사람을 통칭하는 용어다. 이 구절은 아담이라는 개인적인 이름을 가진 특정한 사람의 창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과 여자들로 이루어진 흙으로 된 아담(사람)이라는 종이 한 번에 동시에 창조되었다는 말로 보인다.


아담의 갈빗대에서 여자를 창조한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 대하여 유대교 주석학자들은 여자가 남자를 다스리지 못하게 남자의 머리에서 만들어지지 않았고,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도록 남자의 발에서 만들어지 지지 않았으며, 오직 남자의 옆구리로부터 만들어진 것은 남자의 동반자가 되기 위함이라고 재미있게 말한다.


우주

창세기 창조 이야기는 창조된 우주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태초의 악을 거부한다. 각각의 창조 행위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이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다른 다신교 체계에서는 악은 우주의 질서 속에 짜 넣어진 불변의 필연으로 보고 있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대부분의 번역성경에서 창세기가 “태초에”라는 시간 표현으로 시작하는 것은 앞으로 언급될 것이 우주의 기원에 관한 내용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는 좋은 번역이 아니다. 정확한 번역은 ‘엘로힘(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했을 때’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근동 지방 신화에서 우주론이 나오는 시작 구절과 유사해진다. ‘에누마 엘리쉬’의 첫 문장인 “에누마 엘리쉬”라는 말은 ‘그때 그 위에’라는 의미다. 이와 같은 시작은 창세기 1장의 관심이 만물의 궁극적 기원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우주는 왜, 그리고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데 있음을 암시한다.


1~3절을 원 뜻을 살려 정확히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엘로힘이 하늘과 땅(땅은 형상이 없고 공허하며 흑암의 깊음 위에 있고, 엘로힘의 바람이 수면 위에 운행한다)을 창조하시기 시작했을 때, 엘로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는 창세기가 시작될 때 이미 물리적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들에 모양이나 형태는 없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혼돈에 질서를 도입하면서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물질들을 조직화하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요약자 주: 이 부분은 정통 신학의 무에서의 창조 creatio ex nihilo와 배치되는 부분이다. 존 월튼이 주장하는 ‘기능적 창조’의 개념과 유사하다. 월튼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있었고, 그것이 제 기능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게 만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라고 했다.)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영’은 ‘루아흐 엘로힘’의 번역이다. ‘영’이란 번역은 성령을 연상케 하여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혼동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루아흐’는 ‘바람’ 또는 ‘숨’이 더 나은 번역이다. 이는 ‘에누마 엘리쉬’에서 폭풍우의 신인 ‘마르두크’가 혼돈의 세력을 대표하는 태초의 바다 또는 ‘깊음’의 괴물 신 ‘티아마트’를 향해 자기의 바람을 불었던 것을 연상하게 한다.  ‘깊음’에 해당하는 원어 ‘테홈’은 여신 ‘티아마트’에 상응하는 단어이다.


이와 같이 창세기의 저자는 1장에서 고대 근동 지방 사람들에게 친근하고 소중했던 우주 전쟁 이야기를 재구성하기 위해 무대를 만들고 있다. 이 무대에는 다른 신화에 있는 요소들 ? 바람, 태초의 혼동스러운 물 덩어리 또는 깊음 ? 이 다 등장하지만, 신들의 싸움 이야기는 없다. 이는 뭔가 새롭고 다른 것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저자는 자신의 말 또는 의도만으로 혼돈으로부터 질서 있는 우주를 창조하는, 도전받지 않는 유일한 신인 하나님의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싸움 이야기를 배제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궁창을 사이에 두고 물을 위 아래 둘로 나누는 이야기는 ‘에누마 엘리쉬’와 비슷하다. ‘에누마 엘리쉬’에서 ‘마르두크’가 그의 바람으로 여신 ‘티아마트’를 무너뜨린 다음, 그녀의 시신을 조개와 같이 갈라 그녀의 물을 위와 아래로 나누고, 그것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자를 세운다. 

 


6일 동안의 창조 활동은 논리적이고 평행적인 구조로 묘사된다. 1~3일의 신의 활동은 뒤에 필요한 조건들이나 물리적인 공간 서식지를 창조하고, 4~6일에 자연 현상과 피조물이 창조된다.

 

제1일에 빛과 어둠이 나뉘는데, 이는 제4일에 빛을 내는 천체들의 창조에 필요한 조건이다. 제2일에는 물이 그것에 걸맞은 장소로 배치되고 하늘에 공간이 열리면서 궁창이 만들어진다. 이는 제5일에 하늘과 물에 서식하는 것들(새와 물고기)이 만들어지기 위한 조건이다. 제3일에는 땅이 바다로부터 나뉘는데, 이는 제6일에 땅에 서식하는 동물들의 창조를 위한 조건이다. 그리고 제3일과 제6일에 추가되는 요소가 있다. 제3일에는 식물이 창조되고 제6일에는 인간이 창조된다. 이는 식물이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식물은 인간과 모든 짐승의 먹거리로 제공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1:30). 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에 서로 잡아먹기 위하여 피 흘리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이야기는 없다. 성경이 창조이야기는 고대 근동지방의 우주 생성론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러한 문화 유산을 비신화화했다. 그리고 태초의 악의 존재를 거부하는 식으로 변형하여 유일신 신앙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성경에서 악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악과 고통은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서 삶의 현실로서 경험된다. 에덴동산 이야기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악은 독립된 악마적인 세력의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주에 반항하여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창조된 우주는 선하지만 도덕적 자율을 행사하는 인간은 그 선을 타락시킬 수 있다. 악은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도덕적 실체이다. 결국, 악에 불가피성은 없다는 것이다. 악은 인간의 책임과 통제의 영역 안에 있다.


생명나무는 ‘길가메쉬 서사시’ 등 고대 근동 지방의 문헌, 신화, 제사의식에 많이 등장하지만 선악과 나무는 다른 근동 지방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고대 근동 문화의 신화에서 중요시하는 생명나무는 무시하고 선악과 나무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고대 사회의 불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저자의 의도를 보여준다. 저자는 삶의 중요한 관심사가 죽음이 아니라 도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구약의 창조 이야기는 신의 선한 창조 의도와 그 의도를 타락시킬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도덕적 충동과 갈등을 중심으로 한다. 태초의 인간은 금지된 열매를 먹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신에게 불순종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즉 신이 뜻에 따르거나 거부할 도덕적 자유가 있는 것이다.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과 닮은 것은 오직 도덕적 선택의 힘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진정으로 신과 같음은 단지 선과 악을 선택하는 힘이 아니다. 신을 닮음은 삶을 긍정하는 선한 방식으로 인간이 가진 힘과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자유로울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은 우주에 내재하는 어떤 신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결과물이다. 즉 인간이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불순종하기로 택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에는 책임이 수반된다. 그 책임 지우는 것이 생명나무에 대한 접근 금지명령이다.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 구절은 인간이 불멸과 악의 능력을 동시에 갖출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만일 악의 능력을 갖춘 인간이 불멸하게 된다면 진정한 창조주의 대적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자유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값을 치르고 얻어진 것이다.

 



위 내용은 『구약읽기 역사와 문헌』 ‘제3장 천지창조 이야기: 창세기 1~3장’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천지창조」,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 2015년 촬영.

 


 

글 | 송윤강 편집위원

과학강연, 영화, 도서 등 과학 관련 리뷰를 기고하고 있다. 현재 아름다운서당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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