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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Homo amans: 180만 년 전부터 준비된 사랑의 능력자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 2. 25.

 

Homo amans ㅡ  180만 년 전부터 준비된 사랑의 능력자 



터키 북동쪽,  조지아 드마니시에서 180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가 다 빠진 채로 살다 죽은 흔적이 보이고 머리뼈의 봉합 상태로 추정했을 때 노인이라고 한다.  빙하기였고 먹을 것이 부족했을 환경에서 노인이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보통의 젊은이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은데 노인이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의 흔적을 보는 것이다. 180만 년 전부터 우리 인류는 나 아닌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남을 위해 손해를 보거나 목숨을 거는사람들 이야기,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이야기를 간혹 접한다. 내가 아닌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이기심의 발로일까? 자발적인 이타심에 의한 것일까?  어떻게 가능하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개미와 벌과 같은 동물 사회에서 찾았는데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미는 하나의 여왕개미가 공동체의 생식을 책임진다. 개미와 벌은 모두 암컷인  여왕개미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유전자가 똑같은 클론 clone이기 때문에  개체들  사이에 구분이 없다. 수많은  '나' 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것이다. 

그 공동체들의 삶은  오로지  여왕 개미가 낳은 아기를 양육하기 위해 살신성인한다. 개체 하나가 죽어도 그 유전자는 계속 내동료들 안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유전자의 입장에서 나의 희생은 억울하지 않다.  

개체를 무시하고 오로지 유전자만 고려한다면 개미의  살신성인과 같은 협동 생활은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이다. 사회 생물학자인 윌슨이 말하려는 것은 이타심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윌리엄 해밀턴은 이타적인 행위가 사실은 자신에게 유익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해밀턴 법칙으로 설명해 냈다.


rB > C 
(B;수혜자가 받는이익/r; 수여자와  수혜자 간의 촌수/   이것을  곱한 값이,  C;수여자가 치르는 대가) 


수여자보다  수혜자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촌수의  곱이 더 클 때 이타적인  행위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식이다.

이 공식을 보면 확률적으로 형제는 나와 유전자가 50% 일치하고 사촌은 12.5% 일치한다. 그러므로  같은 값의 대가와 이익이 기대된다면 두 명의 형제와 여덟 명의 사촌이 맞먹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내가 죽는 대신 형제 두명 혹은 사촌 여덟 명을 살릴 수 있다면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같은 양의 유전자가 살아남으니까 결코 손해 보는  죽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공식을 보면서 도킨스와 같은 사람들은, 개인은 유전자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유전자 제일주의다.  성인 남자가 가족의 일원이 되고 가정을 보살피고 보호하고 돕는 것 등의 행동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의 복지, 즉  남자 자신의 유전자를 위해서일 뿐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면 모르는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 행위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유전자 제일주의만 말하는 그들은  단지  기나긴 세월동안 친족 사회에서 살아온 인류가 습관적으로 해 오던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협동이 그렇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인간 개인이 마치 개미처럼 클론도 아니고 혈연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인류가  다  유전자로만  맺어져 있는 관계인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관계들을 보면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가족처럼 여기고 남과 맺은 관계 속에서 누나, 형님, 동생,  이모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가족은 혈연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가지 각색의 사회관계,  즉 모두 가족의 틀 안에서 오랫동안 형성하고 만들어 온 사회관계이며  핏줄로 연결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거대하다. 

그러면  인류는  어떻게 해서 서로 돕게 됐을까? 남에게 이타성을 드러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류가  작고 약하다는 점을 이유로 꼽는다. 

그들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빙하기를 겪는 동안 빙하기가 똑같은 기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기도 하고 건조하기도 하고 비가 계속 쏟아지기도 했다. 따라서 변덕스러운 기후에 맞춰 동식물들과 환경도 변하고 지형들도  변했다. 

변덕스럽게 달라지는 환경에 적응하기위해 인류는 강해지는 대신 정보력에 의존해 살아남는  유연한 전략을 택했다. 예컨대 인류는  환경을 잘 살피며 과거의 경험에서 정보와 지혜를 얻어 그것에  의존해 살아남는 전략을 발전시켰고 진화시켰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노인들은 이런 정보력의 원천이었고 그들을 존중하고 도왔을 것이고 그러다가 좀 더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협력과 이타심을 갖게 되는 놀라운 능력이 생겼다. 남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모르는 남과 나누고 남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과 연대하며 그들과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되었다.  

이타적인 삶을 살 수있는 사랑 유전자가 창발된 것일까?  어쨌든 인류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과 섬김과 사랑을 베풀 능력이 180만 년 전부터 생겼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대와 나는 자연과 환경도 그곳에 함께 살고 있는 나무도 새도 풀 한 포기도 모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대와 나는 180만 년 전부터 이런 사랑을 하는  능력자, 곧 호모 아망스 Homo amans이다.

 

글_ 백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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