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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역사란 정답을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 1. 11.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 강연 요약

 

일시: 2020년 12월 19일

강연: 밴쿠버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 최종원 교수

 

이 글은 분당/판교 북클럽에서 주관한 <온라인 과신톡>의 강연, 최종원 교수님의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최종원 교수님의 강연과 그 후 질의응답을 통해 보완된 내용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같이 묶어서 정리했습니다. 본격적인 교회사 강연에 앞서 역사철학의 이해에 대한 심도 깊은 설명이 있었는데, 이는 교회사 이해와 관련하여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역사에 대한 편향된 관념을 바로 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보통 암흑기라 생각하는 중세사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고, 따라서 우리 개신교 신앙의 출발인 종교개혁에 대하여도 다시 성찰하게 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이해: 역사란 정답을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1. 역사에 대한 기대는 다른 학문과 다르다. 보통 '역사를 통하여 성찰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학문에 대하여 이런 말을 쓰지 않는다. 이는 역사에 대한 기대가 다른 학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가 역사의 오용과 남용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역사가 삶에 성찰과 지표를 제시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보다는 의미로서의 역사를 추구하는 것이다.

 

2.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헤로도토스는 “과거의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들이 남긴 위대한 업적을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하기 위해서 역사를 쓴다”고 했다. 사실과 기록으로서 역사, 우리가 흔히 history라 부르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3. 반면에 성서의 기록된 역사는 단순히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어떤 사건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런 역사를 우리는 의미로서의 역사, 또는 해석으로서의 역사라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역사의 목적은 과거의 사실 자체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것이다.

 

4. 사실이나 사건의 기록 만이 역사라면 비판적 성찰이 필요 없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대하는 성인전이나 영웅전은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찾아가기보다는 과도하게 승자의 기록이 많다. 이러한 것들은 객관적인 역사로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이 역사라고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5. 역사학이 학문으로 인정받은 것은 불과 150년전이다. 역사가 학문적으로 인정된 데에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의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의 역할이 컸다. 그는 제도 역사학의 기초를 놓았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주관을 배제하고 과거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면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이 역사다.”

 

6. 역사의 기록에도 과학적 방법론이 사용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역사에도 과학자나 수학자처럼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이 필요했고, 그런 사람을 교육시킬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야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 역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기록 속에서 일련의 흐름,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7. 역사 기록에서 주관을 배제하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말은 쉽게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역사에서 주관을 배제하고 사실을 모아 놓으면 뭔가 찾을 수 있다는 것인가? 역사는 선험적인 것이다. 과거의 사실이 역사 서술의 모태가 된다. 그런데 문서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나 집단과 남길 수 없는 사람이나 집단이 존재하는데, 역사의 기록이란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한 것뿐이다. 이런 개인이나 집단은 지배층이다. 그래서 랑케식의 역사는 영웅 중심, 승자중심, 지배자 중심의 역사, 즉 정치사 사상사 중심이며 대중을 위한 공간의 여지는 없는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다.

 

8. 또한 역사가가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만 역사를 서술할 수 있는가? 완전한 보편적 객관적 기술은 과학조차도 가능하지 않다. 사가의 주관을 완전히 배제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역사에서 사실이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사가가 인식한 사실이다. 사가가 인식하지 아니한 역사 밖의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랑케식의 역사관을 이데올로기화해서 역사 자체에 신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역사주의라 한다. 역사라는 문헌의 기록 속에서 객관을 찾고 오늘날 통용될 수 있는 가치 찾기를 시도하는 것은 매우 고상해 보이지만 이는 하나의 신앙적 표현인 것이다.

 

9. 역사를 사실로만 접근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단군신화는 허구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거짓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역사와 비역사를 가르는 기준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가 아니다. 비록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더라도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했으면 역사다. 역사는 사실 기록을 넘어서야 한다. 그 시대정신을 찾아야 한다.

 

10. 역사주의에 반론을 제기한 것은 신사학파(New History)다. 미국의 역사학자 칼 베커(Carl L. Becker, 1873 ~ 1945)는 “Everyone is his own Historian”이라고 했다. 즉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만 역사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실제성, 객관성, 역사성을 담보하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관심을 과거의 사료를 통하여 투영해보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주의에 대응하여 현재주의라 한다.

 

11. E.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역사가 객관적 과거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늘 여기의 관심을 역사를 통하여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다.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하면서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역사가 오늘날 의미가 있는 것은 강을 건넜다는 사실보다는 그 사건이 지니고 있는 콘텍스트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루비콘을 건넌 것은 역사의 구성물이다. 역사가가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선택함으로써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된 것이다. 이처럼 목적이 선택을 결정한다. 랑케의 역사관이 객관을 추구한 역사라면 베커의 역사관은 주관을 정당화하는 역사관이다. 절대 불변의 사실보다는 상대적 관념적 사실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12. 이와 같이 역사를 바라보는 큰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역사는 주관을 배제하고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기 주관을 가지고 역사가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면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관점의 대립은 기독교 안에도 있다. 성서에서 모든 것의 답을 찾아내려고 하는 성서중심, 문자중심주의와,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을 배제하는 자유주의, 고등비평의 관점의 대립이 그것이다.

 

13.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라는 말은 역사주의와 현재주의가 만나는 점을 찾기 위한 시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역사의 구성요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난 모든 사실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그중에서 가치가 있다고 선택하여 기록한 것이 역사가 된다. 그 선택에 있어서 가치판단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에는 동료들의 동의가 중요한 판단요소다.

 

14.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선택에 의해 역사가 기록된다면 이러한 역사는 10% 엘리트의 영역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90% 민중은 역사와 무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가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객관화된 역사를 추구하는 근대의 역사학이 부딪힌 한계였다. 역사를 과학으로 추구하다 보면 이러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는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15. 이것은 포스트 모던의 역사다. “역사는 죽었다”고 한다. 이는 과학으로서의 역사, 객관을 지향하는 역사는 죽었다는 표현이다. 역사의 지향이 바뀐 것이다. 과거에는 역사가 객관을 찾아가기 위해 과학을 토대로 삼았다면 지금은 역사를 문학으로 보고 있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텍스트로서의 역사의 한계를 벗어나 비문자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어, 관습, 문화, 풍속, 인류학, 고고학, 지리학, 기호학, 심리학도 들어갈 수 있다. 종전의 문헌의 한계를 벗어나 역사의 경계를 넓힌다. 이러한 문자를 넘어서는 역사 인식을 ‘전체사 Total History’라고 한다.

 

16. 이런 관점에서 아날학파가 등장한다. ‘아날anal’이란 연대기, 연표, 연감을 말한다.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비문헌적 자료까지 수집하여 변수로 투입하여 결론을 도출한다면 과거의 복잡한 모자이크 그림을 훨씬 더 잘 맞출 수 있다고 본다. 과거의 정치사 사상사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정치사와 사회사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한다. 사회사에서는 인간이 터를 내리고 살아가는 지리(인문지리)가 삶에 더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고 있다.

 

17. 장기지속과 일상생활. 역사에서 자연환경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람보다 자연환경이 더 오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역사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역사는 사람보다는 거시 담론에 집착한 것이다. 우리와 거리가 먼 그네들만의 담론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생각하고 그동안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탈근대 포스트모던 이후에는 미시적인 담론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E.P. 톰슨(Edward Palmer Thompson, 1924-1993)은 “가난한 양말직공 시대에 뒤쳐진 배틀직공을 후대의 거대한 오만에서 구해내는 것이 역사”라 했다. 오늘의 역사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역사가 망각하고 있는 보통 사람을 망각으로부터 구원해내는 것이다. 여성사, 노동사처럼 아래로부터, 주변부로부터, 비주류로부터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교회사 다시 읽기란

 

18. 교회사의 이해에서도 이러한 원리가 적용된다. 하나님 나라는 가는 곳 뿐만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신학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일상의 신학’을 조명한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생활과 무관한 교리의 형성과정 신학의 형성과정을 교회사라 했다. 거대 담론으로서 교리나 신학의 과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며, 그 속에 있는 대중은 존재하지 않고 집단성만 존재한다. [교회사 다시 읽기]는 이런 우리에게 드리워진 선험적 규범을 걷어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19. 우리가 가진 중세에 대한 선험적 판단은 ‘중세는 어둠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면 중세는 과연 어둠의 시대라는 평가가 맞는 것인가? 그러나 중세교회사를 다시 읽는다고 해서 중세는 밝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 시대를 밝거나 어둠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한 접근법인가 살펴보는 것이다. 중세가 종교적으로 어두웠다(암흑기) 혹은 밝았다(번영기)라는 표현은 기독교를 절대적인 상수로 놓고 보는 것이다. 즉 중세의 역사와 종교의 역사를 등치 시키는 것이다.

 

20. 종교가 어두우면 중세도 어둡다? 이것은 종교개혁가의 접근법이다. 오늘날 우리가 카톨릭 교회에도 구원이 있습니까? 하고 거리낌 없이 질문하는 것은 이미 이러한 중세에 대한 가치판단을 전제한 것이다. 이는 중세를 읽음에 있어서 그 시대의 가치를 찾아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있는 신앙고백의 가치 위에서 과거를 읽는 것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역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서 있는 신앙고백 즉 종파적 이해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구속복이 되어서 그 시각에 벗어난 역사를 못 보게 하는 것이다. 이런 관념을 벗어나지 않으면 중세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21. 중세는 주변부의 힘에 의해 극복되었다. 비잔틴, 이슬람이 중세 라틴 교회에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중세교회가 이교도 문화를 받아들인 것을 혼합주의, 어둠이라고 보는 것은 지금의 시각이다. 개신교는 카톨릭의 면죄부, 성직자의 타락을 지적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이상향에서 벗어난 중세교회를 종교개혁으로 회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도 마녀 사냥을 했고, 잔혹한 종교전쟁도 치렀고 교회는 분열되었다. 지금 내가 선 자리를 확인하고 그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시각으로 교회사를 보는 것은 곤란하다. 교회사는 겸손한 마음으로 나의 상식을 넘어서는 판단과 경륜을 들여 다 보기 위한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22. 이것을 내재적 접근법이라 한다. 왜 중세 기독교인은 그렇게 살았는가? 왜 이교도 신앙을 받아들였는가? 피치 못할 상황은 없었는가? 교회 중심의 시각, 특별한 교리에 매달리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간 일반 사람들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은 제도적으로 탄탄한 기초를 만들어주었으나, 그 속에 들어오지 못한 집단을 소외하고 마녀사냥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종교개혁은 중세보다 신앙생활을 더 힘들게 만든 측면도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재기독교화’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다. 느슨한 신앙공동체를 규율하는 공동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교개혁이 모든 것을 완성한 선으로만 보고 있다. 종교 개혁의 이름으로 배제, 탄압, 혐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3. 중세 기독교에서 교황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은 아니다. 수도원에서 교황을 견제하고 개혁운동을 주도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끊기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종교개혁은 사실 슬픈 역사다. 분열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루터는 시대가 만들어낸 불행한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루터나 칼빈이 아니고, 중세의 수도원과 같은 지속적인 건전한 개혁의 흐름이 현실적인 기대일 것이다.

 

24. 우리가 흔히 ‘종교개혁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대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바로 이런 관념을 정당화하는 말이다. 이는 기독교에는 그런 원형이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갈 그런 이상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완성이 아니다. 이런 관념은 역사를 읽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25. 대부분의 사회 역사 속에서 종교는 변화를 주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교회는 전통을 지키는 보수적 입장을 가진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기독교의 복음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선험적인 가치판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거대 담론은 교회를 전체주의로 흐르게 하고, 개인에 대한 미시적인 관심을 무시한다. 이러한 경향이 무신론이나 회의론이나 여성이나 동성애 같은 문제를 거론조차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세 교회 역사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중세의 면모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선험적 전제를 내려놓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다시 읽는 것이다.

 

26. 종교개혁은 당시 교회의 제도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개인 스스로 주체가 되어 구원을 추구한 것이다. 이는 개인이 성서를 주체적으로 읽음으로써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읽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에 머무르고 있다. 권위자들의 해석을 듣고 그것에 내가 ‘아멘’하는 것에 나의 신앙을 등치 시키고 있다. 이는 루터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주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27. 크리스마스 정신(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은 누가복음 4장에 잘 나와 있다. 예수님께서 30일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고향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읽은 성경 말씀이 이사야서 61장이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4장)”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공생애 처음에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은 의미가 깊다. 이는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교회사를 접근하는 기본적인 마인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거대 담론도 중요하지만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와 같은 소외된 개인에 대한 관심이 훨씬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

 

28. 기독교가 사회 변화에 그렇게 주도적이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존속해올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존엄과 배신이 마주섰을 때 인간의 존엄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대표하는 문화적 인종주의와 혈통주의를 극복한 종교가 기독교다. 이것이 기독교가 전세계적으로 그토록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29.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23번의 공의회가 있었다. 공의회란 교회와 사회의 상호교류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와 상호작용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 모습이 초대교회 모습이나 종교개혁 당시의 교회의 모습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개혁교회가 중세교회와 달라진 것처럼 지금 교회의 모습은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져야 한다.

 

30. 이런 측면에서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구호도 재평가되어야 한다. 이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의 문제를 덮어 버리기 위해서 그것을 자꾸 달이라고 한다. 그 기준에서 교회사를 읽으니 퇴행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는 구원을 지향하는 학문이다. 그 구원이란 망각 속에 잊혀진 개인을 깊은 망각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즉 말하지 못하고 기록을 남기지 못한 들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기록하고 복원해 내는 것이다. 교회사도 교회와 사회의 상호작용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교회사는 거대담론의 정합성을 찾아내는 학문으로 제한하고 머무르면 안 된다. 겸손한 자세로 주변이 어떠했을까 들여 다 보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송윤강

과신대 기자단으로 활동하면서 과학강연, 영화, 도서 등 과학 관련 리뷰를 기고하고 있다. 2021년에는 "카오스와 과신대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글을 기고할 예정이다. 현재 아름다운 서당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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