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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과신대 칼럼

초여름의 시작 6월을 맞아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 5. 21.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논쟁했다.

한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니다! 바람이 움직인다.”

두 가지 주장을 놓고 사람들의 편이 나뉘어 있을 때 누군가 말했다.

“저것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저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1228년 중국 선승(禪僧)들의 화두집 무문관(無門關) 제 29칙의 이른바 비풍비번 (非風非幡)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것을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첫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화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 이병헌의 목소리를 통해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세상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흔들릴 때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어떤 처지와 환경 또는 경우와 입장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 생각이 흔들리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로부터 150여 년 후 헤겔(W. G. F. Hegel)이 또한 말하지 않았던가?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생각에 달려 있고, 그 생각의 주체 중심이 곧 나의 마음이다. 따라서 그동안 흔들렸던 일상을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마음잡았다’ 말한다.

 

이 세상 그 어떤 일이든 마음잡지 않고 온전히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던가? 모든 것은 마음을 잡는 일, 곧 새로운 각오의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아직 여전히 기승을 부리지만 결국 잦아들 COVID-19의 먹구름을 서서히 밀어내며 다가올 초여름의 바람과 함께 우리도 새 마음 새 기운으로 바이러스가 힘겨워할 무더위 고개 앞 초여름의 6월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1970년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Fields Medal)을 수상한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그의 책 「학문의 즐거움」에서 “소박한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깊이 생각하라”는 소심심고(素心深考)의 중요성을 말한다. 일의 시작은 마음이되 그 마음의 시작은 거창한 사고의 틀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일은 창조적 결과를 의도한다. 그러나 창조적 결과의 크기와 무관하게 그것을 향한 일의 과정이 거창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작고 소박하되 뜨겁고 세심한 정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소심심고’의 노력이 결여될 때 이른바 작심삼일(作心三日)의 결과가 나타난다. 

 

히로나카에 의하면 사람은 ‘필요(need)에 따라 사는 사람’과 ‘소원(want)에 따라 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필요는 사람의 공간적 외부 상황의 판단에 따른 행동을 낳는다. 그러나 소원은 사람의 마음속 내부의 결정에 따른 행동을 낳는다. 여기서 마음의 결정이 인(因)이라면 행동의 결과는 연(緣)이다. 이러한 인(因)과 연(緣)의 결합이 일의 열매라면 그것의 뿌리가 소원이다. 이러한 세상 모든 일의 인(因)과 연(緣)이 바르게 결합하고 풍성히 결실되기를 지향하는 소원의 힘이 곧 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은 마음의 넓이와 깊이와 힘으로서의 지혜를 요구한다. 지혜는 세상을 넓게 보는 마음의 눈이요 세상의 소리를 깊이 듣는 마음의 귀이며 세상을 더욱 새롭고 아름답게 창조하는 마음의 힘이다. 이런 지혜를 부단히 쌓는 배움의 기쁨이 곧 학문의 즐거움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괴로움 속에서도 배우려 애써야 하는 곤이학지자(困而學之者)이다. 그러나 괴로움 속에서도 배우려 하지 않는 곤이불학자(困而不學者)는 인간 삶의 구체적 상황에조차 옳게 대응하지 못하는 때 묻고 병든 마음의 소유자이다. 세상은 날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변화의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때 묻은 마음을 닦아내지 못하고 병든 마음에 새살을 돋워내지 못한다면 새로운 시간인들 무슨 소용인가? 어느덧 성큼 다가온 초여름의 시작에 무슨 힘이 있겠는가?

 

새로운 시간은 새로운 마음에서 출발한다. 새로움은 물리적 시간의 소산이 아닌 심리적 마음의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새 시간도 오로지 상큼하고 서늘한 여름의 바람이 아니라 무엇보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넓고도 깊은 지혜의 새 마음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잠에 깨어 울고 있는 제자에게 스승이 물었다. “어찌해 울고 있느냐? 꿈을 꾸어 울고 있습니다. 무서운 꿈이었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슬픈 꿈이었느냐? 아닙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어 울었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가? 이런 자를 위해 성경 (공동번역, 잠언 4:23)은 말한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의 샘이다.” 

 

우리가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학문을 통해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밝혀지는 눈물의 씨앗일까? 그보다 지금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같을지라도 하나님 지으신 우주의 신비와 하나님 말씀하신 진리의 상통(相通)을 믿고 과학과 신앙의 합일을 지향하는 가장 고상한 마음과 영혼, 곧 심령의 성취요 복은 아닐까?



글 | 유지황 목사

강릉 하사랑 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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