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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우리는 고백의 짐승이다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 2. 10.

우리의 존재방식 - '고백告白의 현상학'

우리는 고백의 짐승이다.

 

 

정말 맛있는 커피콩을 두고 커피를 못 마신 지가 벌써 4일째다. 모터식으로 된 그라인더에 커피콩을 넣고 배꼽처럼 생긴 큼지막하고 동그란 버튼을 누르면 콩 갈아지는 소리, 회오리치듯 빙글빙글 돌다가 가운데는 놔두고 벽을 따라 동그랗게 모여 집적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돈키호테보다 더 용감무쌍하다고 감탄하면서 아껴줬는데 목요일 아침부터 토라진 청소년처럼 아무 반응이 없다.

 

 

'어쩌다 그랬는데?'

 

그라인더가 작동이 안 된다고 난감해하는 내게 가족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말들이 모두 똑같다. 기계가 작동이 안 되는 것에 대해 그들은 중세시대의 고해성사실에 나를 앉혀두고 뭔가 고백을 듣고 싶어 한다.

 

고백은 고해성사 이래로 세속권력과 종교 권력에서 중심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타인에 의해 부여되는 신분,정체성,가치의 보증이라는 의미에서 고백은 '인가' 였으나 자신의 행위와 생각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인정으로 고백 의미가 바뀐다. 이는 진실의 고백이 권력에 의한 개별화 과정이며 진실을 생산하기 위한 기술에서 고백은 중요한 지분을 차지한다.

 

개신교, 반종교개혁, 18세기의 교육학, 19세기의 의학이 출현하면서 고백은 자녀와 부모, 학생과 교육자, 환자와 정신과 의사, 비정상자와 전문가 사이의 관계에서 활용된다. 예컨대 심문, 상담, 자전적 이야기, 편지 등 고백의 유형이 다양해지고 이러한 것들은 기록되고 자료로 수집되며 과학화된 분석이 된다.

 

우리는 유별나게 고백을 많이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구나 고백하고 누구나 고백하도록 강요당한다. 얼마 전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화상을 입은 내막에 대해 내게 물었다. 그는 의사로서 환자인 내게 고백할 것을 정당하게 요구했고 나는 순한 양처럼 경위를 말하고 나서 처방을 기다렸다. 배가 아파서 약국에 갔을 때는 육하원칙 중 최소한 다섯 가지는 갖추어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에 해당하는 문장으로 고백을 요구받았다. 또 얼마 전에는 친구가 전화를 했었는데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뭐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어찌 보면 매 순간 비일비재하게 고백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무엇이든 말해야 하고 기억나지 않는 것조차 머릿속을 다 털고 뒤집듯이 다 찾아서 말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마치 말하는 사람에게서 진실이 드러나고 싶어 몸부림치고 있으니 다 꺼내놓고 자유하라고 속살거리는 술책을 고백은 갖고 있다. 고백의 화학작용은 인간의 예속화를 초래하고 물리작용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 권력의 전도다.

 

은밀성을 전제로 하는 성 담론에서 고백은 그 담론에 서린 막연한 친숙성이나 천박성과 관계가 있으며 고백의 진실성은 그것을 듣는 사람, 듣고 침묵하는 사람 쪽이나 질문자 쪽에 있다. 말하자면 진실의 담론이 효력을 발생하는 것은 진실의 내용을 발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도록 강요하는 사람 쪽에 있다.

 

'어쩌다 그랬는데?'라는 질문은 기계를 망가뜨린 잘못을 고백하고, 혹은 무심코 했던 행동들을 고백함으로써 그 행동에 과오가 있었음을 잡아채겠다는 의도가 있다. 고백을 근거로 마땅히 고장 난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묵언의 암시와 평가가 예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보 같이 떠듬거리며 최대로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쓰는 꼴이라니.

 

고백이 자발적일 수도 있고 위협이나 술책에 의해 억지로 고백을 강요당하는 일도 있다. 마치 고백은 영혼 밖으로 내몰거나 몸에서 떼어내야 하는 것처럼 우린 고백을 내놓아야 한다. 중세 때 마녀들에게 행한 고문은 고백의 거부에 대한 대가였다. 고문 같은 참혹한 권력도 따지고 보면 고백을 구애한다. 인간은 사적인 영역이든 공적인 영역이든 늘 고백이 요구되는 고백의 짐승이다.

 

 

기독교적 고해와 사법적 자백에서 지식-권력 형태로 변모해 가는 고백은 이제 지식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다른 사람에 의해 주체의 진실이 결정되고 구성된다. 주체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에 관해 다른 사람이 소유하는 지식을 근간으로 고백은 그 진실성을 판결받는 것이다.

 

최근에 인상적인 두 개의 고백이 방송매체와 SNS에 공개된 적이 있다. 두 발화자는 어쩌다 그랬는데? 라는 대중의 질문에 응하기 위해서 자발적 필요에 의해서든 상황적 강요에 의해서든 그들은 은밀한 내용의 진실을 고백했다.

 

자신들의 과오와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고백하고 자신의 과거와 한때 바램이었던 것을 고백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빈곤과 누추함을 고백하면서 말하기 어려운 치부까지도 다 꺼내놓고 있었다. 그들은 인가와 인정을 요구하면서도 진실의 판결권은 청자에게 있음을 실감케 했다. 그러나 고백은 아주 교묘하게도 이항 대립적인 습성이 있어서 언제든지 고백의 주체에게 권력이 되돌아온다.

 

고백을 하는 이는 어쩌다 그랬는데?라는 질문을 받고 질문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게 되면 그는 고해성사의 자리에 섬으로써 온갖 만연한 추정과 심리적 물리적 물증들을 뛰어넘어 인가나 인정을 받게 된다. 설령 청자들에 의해 '아니오!'라는 판결을 받아도 고백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손해는 없다. 속내 이야기의 증가와 복잡한 지식들은 휘핑기계로 부풀려 놓은 거품 때문에 오히려 진실과 본질은 침강하고, 와글거리는 비난이 임계점에 이를 때쯤이 되면 비애의 주인공으로 등극하면서 일부 동정과 연민의 반향을 얻는다. 이런 고백자는 참으로 영악하다. 고백의 짐승은 후회와 결단의 눈물을 흘리는 짐승이 됨으로써 청자들과 진실의 판결을 놓고 배팅한다.

 

 

내게 던져진 '어쩌다 그랬는데?'

 

기억을 더듬어 고백을 해보자면, 그 전날 매번 조금씩 갈기가 귀찮아서 두 번에 걸쳐 80g쯤 갈았는데, 몸통에 열이 느껴져서 아차 싶었다. 정성스럽게 호호 불면서 닦아주고 쓰다듬어주면서 부디 무사해 주길 빌었다. 5년째 사용 중인 그라인더가 언제나 푸른 빛깔 그대로 금속의 강성을 유지하리라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엔트로피의 법칙은 우주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늘 작동하고 있음을 잊은 것이다.

 

뜨거워서 다 불타버릴 것처럼 열렬한 사랑도 2년 정도가 지나면 냉랭하게 식는데 5년이면 기계라고 해도 모터가 작동 안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만 그래도 더 쉬엄쉬엄 사용하고 더 조심조심 다뤄주었어야 했다. 목.금.토.일. 손으로 꼽아보는데 막 슬퍼진다. 고백의 짐승은 이제 후회의 짐승이 된다. 텀블러에 담아서 뜨겁고 진하게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더욱 그립다.

 

내가 그동안 커피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커피와 나 이렇게 둘만 떼어 생각할 수 없다. 틱낫한은 기계,커피,인간 등의 낱말들에 사로잡혀서 생각하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틱낫한은 낱말과 개념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실재 세계를 깊이 봐야 하며 말들의 세계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앞뜰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에게는 나무 한 그루가 하나의 낱개로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개체가 아니다. 한 그루 나무는 그것을 비추는 해와 구름과 흙으로부터 끌어올리는 삼투현상과 그로 인해 공급되는 영양분들, 그리고 잎에서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공기가 없이는 한 그루의 나무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한 그루의 나무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며 나무를 나무 되게 해주는 많은 요소가 나무를 구성해 줌으로써 한 그루의 나무로 서 있게 되는 것이다.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개개의 현상들 속에서 뒤섞이고 있다.

 

또한, 나무를 이루는 것들이 모두 모여 나무가 되었을진대 그렇다면 낱말로서의 나무는 이러한 사실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헐겁다. 레비스트로스가 철학을 강의하다 말고 민속학자로 방향을 바꾼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는 논리적 말장난의 수렁으로부터 빠져나오길 원했고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삶의 복잡한 양상들은 마치 맨틀의 대류가 일어나 암석판을 이동시키는 지구의 내부처럼, 표면의 양상은 잠복해서 움직이고 있는 이항대립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철학은 말을 두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야생의 시각으로 흐름을 내다보는 것이다. 만약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그는 산 위에서 바다를 명상하는 한적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틱낫한의 이야기 속 나무 한 그루는 레비스토로스가 되고 싶은 그 나무이며 내겐 오늘 너무나 그리워하는 커피다.

 

인간인 나와 그리고 비인간적인 것들의 경계를 횡단하면서 그것들로 구성된 커피. 커피를 이루는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아메리카노는 더는 아메리카노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이 나-그것 관계에서 나-너 관계로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로 넘어가기에 충분한 관계의 거리에 있는 것이다. 커피콩을 분쇄해서 온수에 의해 맛과 향을 내놓아 커피의 진면목을 드러낼 그라인더가 작동하지 않으니 이제 커피는 커피가 될 수 없다.

 

네가 없으면 나도 '나'가 될 수 없듯이. 내 고백은 이렇게 결국 너 없이는 나도 존재하지 않는, 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엄청나게 무게감 있는 고백이 되고 만다. 어쨌든 우리는 상황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 고백을 하거나 고백을 하도록 요구받는 고백의 짐승이다.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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